|
오늘은 6월 12일로 19일째 되는 날이다.
일요일의 상쾌한 아침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슬로바키아로 이동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슬로바키아 까지는 201키로미터다.
정상적인 속도로 이동한다면 1시간 56분이면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슬로바키아 대통령 관저
슬로바키아의 정식 국호는 슬로바키아공화국(The Slovak Republic)이다.
폴란드·우크라이나·독일·루마니아·오스트리아 및 체코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인구는 대략 550만명 정도다.
민족구성은 슬로바키아인이 85.8%, 헝가리 인이 9.7%, 체코 인이 1%미만이다.
이러한 민족구성으로 보아 체코와 는 처음부터 국가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통령관저
종교는 가톨릭교가 단연 우세하다.
그외 개신교가 10.8%, 그리스정교가 4.1%다.
겨울은 춥고 건조한 반면, 여름은 덥고 습기가 많은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는 곳이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는 오랜 세월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 왔다.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 부터 독립하자 슬로바키아는 또 다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슬로바키아는 숙명적인 운명인가 보다.
국민들의 얼굴은 늘 굳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늘이 져보였다.
그것은 운명적인 삶때문도 있겠으나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환경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 과도 흡사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막시밀리안 분수대
그러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해왔다고 하는 것은 강인한 민족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슬로바키아는 타의에 의해서 체코와 연방을 결성했다.
그것도 짧은 기간이다.
1939년 슬로바키아는 독립을 선포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침공을 받게되었다.
이에 슬로바키아인은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다.
레지스탕스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 되었으며 이것이 1944년 8월의 국민적 봉기다.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점으로 치닫고있었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갔기때문이다.
브라티슬라바 성으로 이동, 트램
독일의 패망은 체코∙슬로바키아 에게는 기회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희망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가 등장했기때문이다.
사회주의체제는 국민들의 소박한 꿈을 빼앗아갔다.
우울한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암울한 기운이 몸을 짓누르고 있다.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다.
시내에서 사람들은 볼 수 없고 적막 하기만 하다.
그런데 전날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그것은 말이 아닌 몸짓이나 표정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었다.
세계적인 이목이 체코∙슬로바키아로 향하고 있었다.
정치인 두브체크의 민주화 발언이 매스컴을 타고 있다.
국민들은 긴장하기시작했다.
국민들은 두브체크의 민주화 발언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국민들의 열망은 민주화다.
시내관광
모두가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국민 모두가 민주화에 열망하고 있다.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도 라듸오에 귀를 기울이기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가슴을 조이며 울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자유를 향한 열망으로 가슴이 타들어갔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조여왔다.
소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시는 냉전시대다.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 했던 시기다.
자본주의 체제 맹주 국가가 미국 이듯이 사회주의 체제 맹주 국가는 소련 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창설되었다.
소련도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결성했다.
이 두 체제가 세계를 양분하고 있다.
도로를 넓히며 포장하고 있다.
도시 기반사업 확충에 여념이 없다.
이때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정치인 두브체크가 자유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소련을 극복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소련의 행동이 잠잠했다.
몇분 후에 소련의 탱크가 이동한다는 매스컴의 뉴스가 들려왔다.
나는 라듸오에 귀를 기울이며 가슴을 조였다.
자유가 성취 되기를 기도했다.
미하엘 성문
소련은 불시에 체코∙슬로바키아로 이동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탱크에 짓밟히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가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울부짖었다.
이것이 프라하의 봄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많은 자치권을 획득했다.
정당도 설립되었다.
미하엘 성
체코계 당과 슬로바키아계 당이 그것이다.
체코계 당은 체코에서 슬로바키아계 당은 슬로바키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에게 국가의 미래를 묻는다면 자신의 소신을 과연 피력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정당은 이익집단이기때문이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은 다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단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체코와 슬로바키아(Slovakia, The Slovak Republic)다.
나는 슬로바키아 땅을 밟고 만감이 교차했다.
미하엘 성으로 이동하다.
민주화를 외쳤던 체코∙슬로바키아사람들이 뇌리를 스쳤기때문이다.
슬로바키아는 1970년대 우리나라 풍경처럼 느껴졌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기때문이다.
산천도 태고적 모습이다.
인위적인 변화도 없었다.
브라티슬라바 로 이동하고 있다.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 수도다.
구 시가지
브라티슬라바 시로 이동하는 도로는 한가하고 평화스럽다.
우리나라처럼 교통체증이 없었기때문이다.
과거의 어느 순간이 그대로 정지된 듯했다.
산에서 개울가로 천연스럽게 물이 흐르고 있다.
주택은 언덕에 옹기종기 붙어있다.
평화롭고 낙천적인 정경이다.
사람은 눈에 별로 띄지 않고 있었으나 승용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이색적이다.
수도 브라티슬라바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도나우 강 줄기도 보이고 있다.
스바토플룩
이 강줄기를 거슬러올라가면 브라티슬라바시가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브라티슬라바시는 슬로바키아 남부 도나우 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면 흑 해에 도착할 수 있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때문에 고대부터 아시아와 교류할 수있었다.
현재도 동유럽의 중요한 철도 분기점으로 유럽 각국과 연결되어있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다.
인류가 정착하기시작하여 농경이 이루어졌던 시기다.
브라티슬라바 여행지
켈트 족은 독일 남동부, 라인강 ·엘베 강 연안이 원주지다.
이들은 청동기시대부터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며 이지역에 거주했다.
일부는 브리타니아까지 진출했다.
호전 적이며 모험심이 강했다.
켈트 족이 웅거 했던 도나우 강 가에 서있다.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오 간데 없다.
그러나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나우 강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남북을 가르고 있다.
브라티 성으로 올라가는 길
켈트 족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슬라브족이 차지하고 있다.
슬라브족은 이곳에 정착 하여 왕국을 건설했다.
그 왕국이 니트라 왕국이다.
이후 9세기 경에 브라티슬라바 언덕위에 성채가 들어섰다.
이것이 오늘날 브라티슬라바 성이다.
한 나라의 수도 라고 하기는 좁다.
인구도 적다.
하루 정도면 브라티슬라바 여행이 가능할 것 같다.
슬로바키아는 내륙 국가이며 1차 산업인 농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관광자원도 빈약하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이곳을 거의 거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우연히 선배의 안내로 이곳까지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 부부에게 감사를 드리며 볼거리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지금가지 서유럽과 동유럽을 여행했다.
그러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아직 여행하지 못했다.
정치적 불안과 체제불안때문이다.
패키지 여행에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이곳을 추천하는 여행사도 눈에 띄지 않고 있다.
브라티슬라바 성
이것은 관광지로 추천 할 만한 곳이 아니거나 인프라시설이 낙후되어있기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폭을 넓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였던 슬로바키아 까지 여행을 하고 있다.
E∙U 회원국 이라는 이점이 있기때문이다.
슬로바키아는 E∙U 회원국중에서도 가장 낙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선입 감이었다.
실제 이곳을 여행하고보니 E∙U 회원국 중 어느 국가와도 차이가 없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때문이다.
오히려 소박하고 정감이 넘쳤다.
브라티슬라바성 조감도
브라티슬라바 시는 현재 개발 붐이 일고 있다.
고층 빌딩이 하루가 다르게 솟고있다.
볼거리를 찾아 이동하고 있는데 빗방을이 떨어지기시작했다.
혹시나 여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다행히도 비는 금방 그쳤다.
도착한 곳은 그라살코비크 궁전이다.
현재 슬로바키아 대통령궁 관저로 이용되고있다.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궁전 뒷쪽에 프랑스 정원이 눈길을 끌었다.
브라티슬라바성 정원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이 이곳에서 초연을 할 정도로 이곳은 바로크 음악의 중심지다.
대통령궁 관저 양쪽에 근위병이 서있다.
부동 자세로 기립하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불에 타는듯 이글거렸다.
날카로운 매의 눈처럼 사방을 감시하고 있다.
근엄하고 엄숙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지의 주름은 날카롭고 예리하다.
구김살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복원된 중앙광장과 롤란드 분수
대통령궁 관저 앞으로 이동했다.
거기는 분수대가 있다.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아직 이른 시간대 라서 일 것이다.
시차를 두고 분수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날씨가 화창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다.
움침하고 찌푸리고 있다.
그래서 분위기가 더욱 스산해 보였다.
맨홀에 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동상.
분수대를 감상하고 구시가지로 이동했다.
옛 사회주의 체제의 잔재가 남아있지 않을 까 하는 호기심때문이다.
좌우로 눈을 돌렸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사회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념보다는 빵이 더 중요시되고 있었기때문이다.
구 시가지는 대한민국의 재래시장과도 비슷했다.
시장은 자본주의 산물이다.
이윤을 달성해야하기때문이다.
현수교인 에스엔페 대교
브라티슬라바성에서 바라본 도나우 강.
다리 위 UFO 같은 둥근 카페
공산주의 시절은 음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칙칙한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
국가가 몰수 했던 건물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고 있다.
주인은 화사한 주황색으로 건물을 도색하고 있다.
천지가 개벽되고 있다.
사회주의의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기위해서다.
붉은 색 전차가 레일위를 달리고 있다.
유유자적하고 있다.
낭만적이고 평화롭다.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나 신속하고 빠른 것을 원한다.
그래서 빨리빨리 민족이라고 부른다.
도로가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자본주의가 꽃이 만발하고 있다.
중앙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앙광장은 브라티슬라바 구시가지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역사 지구 라고도 할 수 있다.
회색 빛깔의 전통건물 사이를 느림의 여유를 향유하며 걷고있다.
유서 깊은 구 시청과 종탑을 관람하기위해서다.
성당을 바라보며 거닐고 있다.
브라티슬라바 성 입구
모든 것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어서 평화롭다.
성당 앞은 옛날부터 시정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늘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제1의 약속장소로 꼽히고 있는 롤란드 분수대가 광장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막시밀리안 분수 대다.
기둥 위에 갑옷을 입은 기사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방패를 쥐고 있다.
미하엘 탑문(Michael‘s Gate)으로 이동했다.
미하엘 탑문(Michael‘s Gate)은 구시가지로 통하는 4개의 성문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북쪽 성문이다.
탑문 아래 바닥은 세계 각국의 수도와 방위가 표기돼 있다.
여행자들이 발도장 찍기에 정신이 팔려있다.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된 미하엘(Michael) 탑은 현재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55m 높이의 정상에 올라가면 붉은 지붕이 물결치는 구시가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탑 내부는 15~16세기 시대 무기와 의복이 전시되어있다.
구시청사의 종탑에 나폴레옹 군대가 도나우 강 건너편에서 발포한 포탄이 박혀있다.
많은 사람들이 포탄을 지켜보고 있다.
블루교회
나폴레옹시대 포탄 이라니 신기하다.
도로를 따라 언덕으로 다시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맥주 한잔이면 더위가 가실텐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오른쪽으로 대주교 관저가 있다.
왕궁처럼 보였다.
주교 관이 화려하게 치장되어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중세에서 근세로 바뀌면서 주교관 건물 양식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점점 축소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때문이다.
대성당 광장은 어느 곳이나 사람들로 성황이다.
재력가 들이 이곳에서 돈을 물쓰듯 쏟아붓고 있기때문이다.
빈부의 격차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소비를 미덕이다.
성당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광장은 더욱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성 클레어 수도원을 감상하고 브라티슬라바 성(Castle)으로 이동하고 있다.
등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배의 발걸음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아무리 더위가 극성을 부려도 언덕위에 자리 잡은 역사적인 유적지를 포기할 수 없다.
이곳이라면 시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기때문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보고 걸었다.
브라티슬라바 성(Castle)과 연결된 도로는 약간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숨이 더욱 헉헉거린다.
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브라티슬라바 캐슬(Castle) 입장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입구도 보였다.
성문을 지나 전망대로 이동했다.
성은 하얀 백색 벽과 붉은 지붕을 갖춘 현대식 건물이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보다 역사적 가치는 덜했다.
전망대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앞은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다.
브라티슬라바시를 가르고 있다.
도나우 강 위에 범선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이동하고 있다.
갈매기가 유람선을 선회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 기마 상이 있다.
주인공은 스바토플룩(Svatopluk) 1세다.
스바토플룩(Svatopluk) 1세는 대 모라비아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다.
장군이자 명군이다.
문득 을지문덕장군의 오언고시가 생각났다.
을지문덕장군은 수나라 30만 별동부대를 수장시킨 인물이다.
오로지 국민만을 섬기는 명장이다.
을지문덕장군은 수나라 군인의 복장으로 변장하고 수나라 군대의 상황을 파악하기시작했다.
그의 통찰력은 신의 경지를 능가했다.
그것을 토대로 오언 시를 남겼다.
오묘한 책략은 하늘의 경지에 이르르고
신묘한 계략은 땅의 경지에 이르렀다.
전공이 이미 높으니
족한 다면 돌아가거라.
이것은 을지문덕장군이 당나라 장군 우 중문과 우 문술 에게 쓴 오언시다.
당나라 군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난 후 그의 정확한 평가다.
자신감이 넘친 내용이다.
스바토플룩(Svatopluk) 1세가 을지문덕장군과 같은 지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도나우 강을 바라보고 있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범선은 멈춰서 있다.
모든 것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 인천에서 출발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렌트 카를 탑승하고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까지 이동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이곳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시에 도착했다.
19일째 여행은 지속되고 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아름답다.
땀도 흘리고 고통도 많았다.
그러나 고통은 사라지고 희열만 남았다.
브라티슬라바 성은 고성 이라기 보다는 현대식 건물에 가까왔다.
예전의 성이라면 하고 아쉬움도 남았다.
눈 앞에 대교가 보이고 있다.
브라티슬라바의 명물인 UFO 다리다.
브라티슬라바성은 해발 150미터의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날씨가 화창하면 서쪽으로 오스트리아를 바라볼 수 있고, 남쪽으로는 헝가리를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구름이 많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쪽을 바라보며 상상으로 나래를 폈다.
브라티슬라바가 카르파티아 산맥과 알프스 산맥 중간에 위치해 옛 부터 중부 유럽의 전략적 요충지로 꼽혀왔다.
9세기 경 대 모라비아 왕국의 요새로 축조된 이 성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 11명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 후 브라티슬라바 성(Castle)은 거의 무너져 내렸다.
슬로바키아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1957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르고 있다.
고성이라면 역사적 유물로서 가치가 훨씬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잊지못할 여행으로 간직하고 싶다.
성곽 뒷쪽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소박했다.
1번 게이트로 들어가서 2번 게이트로 내려왔다.
성에서 내려와 다리 밑을 지나면 성 마틴 대성당과 마주친다.
브라티슬라바 시에서는 큰 성당이다.
헝가리 성 슈테판 성당이나 체코의 성 비투스 성당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그러나 성 마틴 대성당은 브라티슬라바의 상징이다.
그리고 슬로바키아의 자존심이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한가지 볼거리 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블루교회와 UFO 다리로 이동했다.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내려다 본 UFO다리는 환상 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너무 아름다웠다.
시간은 오후 8시가 넘어가고 있다.
숙소에 도착하면 밥을 하고 반찬도 만들어야 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형님 두분이 매일 식사 준비를 했다.
나는 식기를 세척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생각이 늘 가슴을 짓눌렀다.
젊은이도 아닌 60세 나이에 캠핑장만을 전전하고 있으니 웬 고생인지 모르겠다.
숙소로 이동하고 있다.
숙소는 브라티슬라바시 근교의 Inter Camp다.
건물은 낡고 노후화 되어 있다.
창문은 거미들이 장막을 치고 있으며 창문 밖의 전등은 날 파리가 점령하고 있다.
태고적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누구 한 사람 날 파리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기때문이다.
이러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눈을 감으니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