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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채울 고난의 은혜(1605.2014.4.13. 종려주일)
사53:1-10
할렐루야!
주의이름으로 여러분을 사랑--목사님도 사랑--옆사람--옆자리 앉아 영광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한주간 오락을 금하고 경건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은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이 마음 속 깊이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아픔과 감격과 죄사함의 큰 은혜를 맛보기를 바랍니다. 큰 죄인인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큰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큰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우리 학생들은 다 예쁩니다. 우리 학생들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나타나면 주변이 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 학생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머니의 얼굴을 세상에서 그렇게 추할 수 없을 정도로 이그러져 있었습니다. 불에 타다남은 부지갱이 같은 흉측한 얼굴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어머니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싫어서 그는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어머니를 소개하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도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배고플 것을 걱정하여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로 갔습니다. 딸의 교실을 찾아 갔습니다. 도시락을 전해 줄 때 그 여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누구냐’이 여학생은 도시락을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어머니 듣는 데서 말했습니다. ‘우리 집 식모야’그리고는 도시락을 빼앗듯이 가지고는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 온 여학생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어요?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어요’합니다.
그 때 어머니가 울고 있는 딸 옆에 앉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딸아! 엄마 얼굴이 이렇게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연이 있단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란다.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시고 나는 집 바깥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집안에는 어린아이인 너만 있었단다. 내가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방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미 집은 불덩어리였지. 그러나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 갔다.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말렸다. 소방수들도 네 생명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갔지. 안방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너를 부둥켜안고 뛰쳐 나왔다. 나는 너를 안고 있기에 내 얼굴을 무엇으로 가릴 수가 없었다. 너만 꼭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화상을 얼굴에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생명을 건졌다. 그러나 얼굴은 이 모양이 되었다’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감격하여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며 말했습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제가 너무 잘못했어요’그 후 이 여학생은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를 누구에게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자랑하였습니다. 내가 당할 것을 어머니가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우리가 당할 것을 예수님이 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충만한 은혜와 복을 누리려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일단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주어진 복음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1.희롱 당하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후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피와 땀을 흘려 기도 하신 후 사랑하던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에 의해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대제자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서 온갖 곤욕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선 홍포를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군인들이나, 행정관, 또는 왕들이 입었던 망토와 같은 옷인데 주님을 놀리기 위해서 그 당시 황제들이 입는 자색 옷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홍포는 낡은 천으로 만들어서 금방 찢어질 것 같은 얇은 천이었는데 이 모두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짓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는 왕관 대신 가시로 만든 관을 씌워서 사람들에게 보임으로 부끄러움을 사게 했습니다. 그리고 갈대로 쳤습니다. 갈대는 그 당시 그곳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천하고 약한 풀이었습니다. 이토록 심한 조홍을 당하시고 난 후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인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흉악한 두 강도와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멸시하고 침 뱉던 빌라도 뜰에서 우리 주님은 인류를 죄악 속에서 구원하기 위한 장렬한 역사를 이루시었습니다.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주간만이라도 잃었던 예수를 다시 만나고 소홀했던 사명을 다시 잡아 헌신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사도, 복음의 나팔, 헌신의 일꾼, 구제의 천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십자가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해, 우리의 죄악을 위해 조롱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로마 군병의 채찍에 쓰러지고 넘어지며 걸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여섯 시간을 고통당하며 피와 물을 다 쏟았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우리인간은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머리로 죄를 짓고, 두 손과 두발로 많은 범죄를 했습니다. 이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친히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또 예수님이 죄악을 짊어지셨다고 말했는데 이 죄악은 원죄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진 죄악의 담을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모두 허물어뜨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심으로 인류의 죄가 청산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긍휼과 사랑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86세의 나이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를 죽이려던 총독이 폴리캅에게 ‘예수를 모독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을 때 폴리캅은 ‘주님은 86년 동안 나를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모독하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와 공산주의자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들을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를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 가족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웃을 한 민족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신 주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의 참된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채찍에 맞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던 그 당시 로마에서는 사형수들에게 사형 집행을 하기 전에 채찍으로 때려고 고통을 가했습니다. 이 채찍은 끔찍하고 대단히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어떤 사형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기 전에 이 채찍을 맞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한 채찍은 손잡이가 짤막한 채찍인데 그 끝에는 여려 줄의 가죽 줄이 있고 그 가죽 줄 끝에는 날카롭고 예리한 쇠붙이나 아주 단단한 짐승의 뼈를 쪼개서 붙인 채찍입니다. 이 채찍으로 사람을 때리면 채찍이 사람의 몸에 착착 감겼다가 끌어당기면 살점이 찢어지는 고통을 주는 채찍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채찍을 몸소 다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탈진한 상태에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소망스런 하늘나라 복음은 물론, 고통스러운 병자를 고치며, 지탄받는 죄인을 용서하시어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치료와 용서와 축복과 은총을 베푸셔서 시험 든 사람의 영혼과 낙심하는 자의 마음과 병든 사람의 육체와 실패한 자들의 재기와 성공을 위해 기적을 베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하늘나라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물과 피를 쏟으시고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못 박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우연히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고 예수의 희생을 통해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선택받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구원 얻은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4.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입니다.
사53: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허물과 죄를 담당하심이란 우리 영혼 구원을 의미합니다. 영혼 구원이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 다음은 영혼의 소생과 기능의 회복,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잃어도 영혼 구원만큼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마음의 치유입니다. 4절‘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질고와 고난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에 동참하신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것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죄로 인한 고통과 불행을 다 아시기에 스스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약하며 쉽게 죄에 빠지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잘 알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이 아니면 죄와 사탄을 이길 수 없기에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아시는 만큼 긍휼히 여기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4절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치유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처 때문에 현재의 고통은 물론 미래에도 계속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을 히12:15을 보면 쓴 뿌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나면 한없이 고통을 생산하고 또 남까지 괴롭게 합니다. 조선 왕조의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었습니까? 히틀러가 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습니까? 모두 쓴 뿌리 때문입니다. 이처럼 쓴 뿌리는 무섭습니다. 그래서 쓴 뿌리 나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육체의 건강입니다.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합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셔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난당하신 이유는 성도의 영육간의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본래 죄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누리려면 이 예수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셔서 치료해 주십니다. 혹은 치료의 길을 내어 주십니다.
5절‘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했습니다. 여러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김영윤의 허물을 위함이요. 예수님의 상함을 김영윤의 죄악을 위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김영윤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김영윤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대인관계의 회복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입니다. 6절‘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했습니다. 아울러 7절이하에서 침묵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데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청하여 찔리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다. 창에 찔리셨습니다. 채찍에 찔리셨습니다. 못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이 고난으로 몹시 상하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가 상하셨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못이 박힘으로 손과 발이 상하셨습니다. 창으로 찌름으로 옆구리가 찢어져 가슴이 상하였습니다. 그가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죄악의 원어는 원죄입니다. 나의 자범죄와 원죄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약 3시간동안 채찍에 맞으시고 약 9시간동안 피가 흘렀습니다. 이는 우리 병을고쳐 주시려는 고난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닙니다. 작은 고난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모두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다룬 영화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멜 깁슨 감독이 제작한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셔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열두 시간을 상세하게 영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마치 동물처럼 매를 맞았는데, 그들의 채찍 끝에는 쇠갈고리가 달려있어 그것으로 때리면 채찍에 온몸에 감기고 쇠갈고리가 몸을 파고들어가 잡아 당기면 몸이 쫙쫙 찢겼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원래 사형수를 때릴 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로 서른아홉 번을 때린다고 합니다. 그 후에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갈보리 언덕에 오르셔서 손과 발에 대못을 박고 십자가에 달려 온갖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6시간 동안 매달려 있다가 최후에 그들이 와서 옆구리에 창을 찔러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도저히 인간의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 고통을 당했나요? 우리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당신 자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들이 당해야 될 죄의 대가를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죄까지도 다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후에 우리가 미래에 지을 죄도 주님이 먼저 모두 걸머진 것입니다.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매를 맞고 피를 흘려서 청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53:4-5절‘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이제 ‘우리’라는 말을 고쳐 ‘나’라고 바꿔 읽기 원합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이처럼 내 허물, 내 죄악 때문에 주님이 그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이 감사드려야 됩니다. 우리들의 육체의 질병이 가져오는 몰인정하고 무정하며 살인적 아픔을 주님이 대신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해도 예수님은 우리의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질병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축복 받은 예배에 초대를 받으신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2천년 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가야 할 자가 천국 가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께서 강림하시는 날 부활해서 주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받아 복된 삶을 사는 영광스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금년 고난주간을 자기 영성개발로 신앙의 성장을 위해 금식하고 묵상하고 애통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를 힘써 단절되었던 예수와의 대화가 재개되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구경꾼이 일꾼 되고, 말꾼이 순종하는 충성된 성도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성숙된 신앙, 변화된 인격을 통하여 내 삶과 생활 속에서 희롱 당하신 주님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워 인내의 신앙으로 성장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워 묵묵히 봉사하며 충성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고,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워 끝까지 순종하고 승리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