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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역수3권4편.斷占總訣篇之四 단점총결편 附錄 부록1
附錄 부록
《宋史.邵雍傳》 송사 . 소웅전
1.소웅 강절의 인생소개
邵雍字堯夫。
其先范陽人,父古徙衡漳,又徙共城。
雍年三十,游河南,葬其親伊水上,遂為河南人。
소옹(邵雍)은 자가 요부(堯夫)이다.
그의 선조는 범양(范陽) 사람이었는데, 아버지 소고(古)는 형장(衡漳)으로 이사했다가 또 공성(共城)으로 이사했다.
소옹은 30살이 되어 하남(河南)을 돌아다녔을 때 그의 아버지를 이수(伊水) 근처에 장사를 지내고 마침내 하남사람이 되었다.
雍少時,自雄其才,慷慨欲樹功名。
於書無所不讀,始為學,即堅苦刻厲,寒不爐,暑不扇,夜不就席者數年。
已而歎曰:「昔人尚友于古,而吾獨未及四方。」於是逾河、汾,涉淮、漢,周流齊、魯、宋、鄭之墟,久之,幡然來歸,曰:「道在是矣。」遂不復出。
소옹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였고 비분강개 하면서 공명(功名)을 세우고 싶어 했다.
책 중에서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학문을 시작할 때부터 각고면려(刻苦勉勵)해서 날씨가 추워도 화로를 쬐지 않고 더워도 부채를 부치지 않았으며 밤이 되어도 침대에 오르지 않는 생활을 수 년 동안 이어나갔다.
그러고서는 후에 탄식하면서 “과거의 사람들은 옛 사람들과 교우를 맺었는데 나만 홀로 사방(四方)에 이르지 못했구나.”고 하더니 황하(黃河), 분수(汾水)를 넘어 회수(淮水), 한수(漢水)를 지나 옛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정나라의 폐허들을 주유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깨닫더니 돌아와서 “도(道)는 여기에 있다.”고 하더니 마침내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北海李之才攝共城令,聞雍好學,嘗造其廬,謂曰:「子亦聞物理性命之學乎?」
雍對曰:「幸受教。」乃事之才,受《河圖》、《洛書》、宓義八卦六十四卦圖像。
之才之傳,遠有端緒,而雍探賾索隱,妙悟神契,洞徹蘊奧,汪洋浩博,多其所自得者。
及其學益老,德益邵,玩心高明,以觀夫天地之運化,陰陽之消長,遠而古今世變,微而走飛草木之性情,深造曲暢,庶幾所謂不惑,而非依仿象類、億則屢中者。
遂衍宓羲先天之旨,著書十余萬言行於世,然世之知其道者鮮矣。
북해의 이지재(李之才)은 공성령을 대신하고 있을 때 소옹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오두막에 직접 찾아가서 말했다. “그대 또한 물리(物理)와 성명(性命)의 학문을 들었는가?”
소옹이 대답했다. “가르침을 받길 바랍니다.” 그러더니 이지재를 사사하여 《하도》·《낙서》 및 복희의 64괘의 도상을 전수받았다.
이지재가 전수해준 것에는 심원한 단서들이 있어서 소옹은 깊은 뜻을 찾아내고 숨겨져 있는 의미를 탐구하여 마음에서부터 깨달아 신묘한 의미를 이해하였고 함축되어 있는 깊은 의미에 훤해져서 아주 원대해졌는데 스스로 체득한 것들이 많았다.
그의 학문이 더욱 노련해질수록 덕이 더욱 밝아졌는데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써서 저 천지의 변화 및 음양의 소장, 멀리로는 고금의 변화, 작게는 금수초목의 날고 달리는 성정 미물들의 성정까지 관찰하여 훤하게 통달해서 이른바 불혹(不惑)의 경지에 다다랐으니 비슷한 것에 의거하여 비슷한 부류들을 상상하거나 억측하여 번거로운 중이었다.
마침내 복희씨의 선천도의 요지들을 확장시켜 10여만자를 저술하여 세상에 내놨으나 세상에서 도를 아는자는 드물었다.
初至洛,蓬蓽環堵,不芘風雨,躬樵爨以事父母,雖平居屢空,而怡然有所甚樂,人莫能窺也。
及執親喪,哀毀盡禮。
富弼、司馬光、呂公著諸賢退居洛中,雅敬雍,恒相從遊,為市園宅。
雍歲時耕稼,僅給衣食。
名其居曰「安樂窩」,因自號安樂先生。
旦則焚香燕坐,晡時酌酒三四甌,微醺即止,常不及醉也,興至輒哦詩自詠。
春秋時出遊城中,風雨常不出,出則乘小車,一人挽之,惟意所適。
士大夫家識其車音,爭相迎候,童孺廝隸皆歡相謂曰:「吾家先生至也。」不復稱其姓字。
或留信宿乃去。
好事者別作屋如雍所居,以候其至,名曰「行窩」。
처음 낙양에 왔을 때 사는 집이 매우 누추하여 바람과 비를 막지 못해서 몸소 나무를 하고 불을 때서 부모를 섬겼다. 비록 평상시에는 자주 굶주렸지만 화락하며 매우 즐거워하는 것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뜻을 능히 살피지 못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룰 때에는 애통함이 예(禮)를 다하였다.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등 제현은 퇴거하여 낙양에 있었는데 소옹을 공경하며 항상 서로 교유하며 그를 위하여 원택(園宅)을 사주었다.
소옹은 매일 농사를 지으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루었으니
그의 거처를 이름 하기를 ‘안악와(安樂窩)’라 하였고 이로 인하여 자호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하였다.
아침에는 향을 태워서 정좌를 하였고 밤에는 3~4잔 술을 따라 마시다가 조금 취하면 바로 그치고 항상 대취하지 않았으며 흥이 오르면 종종 시를 읊으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다.
봄과 가을에는 성 안을 나와 돌아다녔고, 바람이나 비가 내리면 항상 집을 나서지 않다가, 집 밖으로 나가면 작은 수레를 타고서 사람 한명이 이를 이끌며 마음 가는 곳을 돌아다녔다.
사대부의 집안에서 그의 수레 소리를 알아채면 다투어 서로 환대하였고, 아이들과 노비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우리 집에 선생이 오셨다’고 말하며 다시 그의 성과 자를 칭하지 않았다.
혹 2~3일 머무르다 떠났다.
호사가들은 별도로 소옹이 거처하는 곳처럼 집을 만들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행와(行窩)’라고 이름했다.
司馬光兄事雍,而二人純德尤鄉里所慕向,父子昆弟每相飭曰:「毋為不善,恐司馬端明、邵先生知。」
士之道洛者,有不之公府,必之雍。
雍德氣粹然,望之知其賢,然不事表襮,不設防畛,群居燕笑終日,不為甚異。
與人言,樂道其善而隱其惡。
有就問學則答之,未嘗強以語人。
人無貴賤少長,一接以誠,故賢者悅其德,不賢者服其化。
一時洛中人才特盛,而忠厚之風聞天下。
사마광은 소옹을 형처럼 섬겼고, 두 사람의 순정한 덕은 더욱 향리의 사람들이 흠모하는 바가 되어서 부자와 형제들이 매번 서로 삼가하며 “불선을 행하지 말아라! 사마단명 소옹선생이 알가 두렵구나.”고 하였다.
선비(士)가 낙양에 가는 경우 공부(公俯)에 가지 않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드시 소옹의 거처에는 이르렀다.
소옹의 덕과 기는 순수하여 바라보면 그가 현명함을 알 수 있었지만 잘난 척을 일삼지 않았고 사람들을 차별하지도 않았으며 함께 어울려 놀면서 종일토록 담소를 나누면서도 매우 괴이하지 않았다.
사람과 함께 말을 할 적에는 좋은 점을 말하고 나쁜 점은 감추길 즐겨하였다.
혹 학문에 대하여 묻거든 답하되 억지로 사람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귀천과 연소가 없고 한결같이 정성으로 접대하였기 때문에 현자들은 그의 덕을 기뻐하였고 불초한 자들은 그의 의복에 감복하였다.
일시에 낙양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재질이 매우 성대해졌고 충성스럽고 순후한 기풍이 천하에 알려졌다.
熙寧行新法,吏牽迫不可為,或投劾去。
雍門生故友居州縣者,皆貽書訪雍,雍曰:「此賢者所當盡力之時,新法固嚴,能寬一分,則民受一分賜矣。投劾何益耶?」
희령의 신법이 시행되자 관리들은 급박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혹 관직을 그만두고 떠나기도 하였다.
소옹의 문생들과 옛 친구들 중 주현(州縣)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편지를 보내고 소옹을 방문하였는데, 소옹은 “이는 현자들이 마땅히 진력해야 할 때이다. 신법이 매우 엄중하니 능히 일분을 관대히 하면 백성들이 일분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 관직을 그만두는 것이 무슨 이익이겠는가?”라고 하였다.
嘉祐詔求遺逸,留守王拱辰以雍應詔,授將作監主簿,複舉逸士,補潁州團練推官,皆固辭乃受命,竟稱疾不之官。
熙寧十年,卒,年六十七,贈秘書省著作郎。元祐中賜諡康節。
가우연간 은일한 현자들을 구하자 유수(留守) 왕공진(王拱辰)은 소옹을 응당 초빙해서 관직을 수여해 장차 감주부(監主簿)로 임명코자 하였고, 또 은거하는 처사들을 천거할 때 영주(潁州)의 단련이 관직을 추천하자 모두 고사하다가 명을 받들었지만 결국에는 병을 칭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희령 10년 소옹은 죽었는데 나이는 67세였고, 비서성저작랑(秘書省著作郎)을 추증하였고, 원우 연간에 강절(康節)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雍高明英邁,迥出千古,而坦夷渾厚,不見圭角,是以清而不激,和而不流,人與交久,益尊信之。
河南程顥初侍其父識雍,論議終日,退而歎曰:「堯夫,內聖外王之學也。」
소옹은 고명하고 영특하여 천고를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나 [성정이] 평이하고 순후하여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청아하면서도 격렬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와 오랫동안 교유하며 더욱 그를 존신하였다.
하남의 정호가 처음 그의 아버지를 모시며 소옹을 알게 되었을 때 그와 종일토록 논의하고 돌아와 탄복하며 “소옹의 학문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구나.”고 말했다.
雍知慮絕人,遇事能前知。
程頤嘗曰:「其心虛明,自能知之。」
當時學者因雍超詣之識,務高雍所為,至謂雍有玩世之意;
又因雍之前知,謂雍於凡物聲氣之所感觸,輒以其動而推其變焉。
於是摭世事之已然者,皆以雍言先之,雍蓋未必然也。
소옹의 지식과 사려함은 보통사람들을 뛰어넘었으며 일을 마주하면 능히 사람들보다 먼저 알아냈다.
정호는 일찍이 말하기를 “그의 마음은 [사심 없이] 텅 비어있고 밝았기에 스스로 능히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 학자들은 소옹의 현묘한 지식 때문에 소옹의 소행을 힘써 높이며 ‘소옹에게는 세상에서 소요하는 뜻이 있다.’고 말했고, 또 소옹의 예측능력 때문에 소옹은 뭇 사물의 소리와 기운이 감촉하는 바에 대하여 종종 그의 움직임으로 변화를 추론하다고 말하였다.
이러한것들은 세상일이 일어나는 것은 다 먼저 소웅선생이 말을 하였기 때문이고 소웅이 필연이 아니겠는가
雍疾病,司馬光、張載、程顥、程頤晨夕候之,將終,共議喪葬事外庭,雍皆能聞眾人所言,召子伯溫謂曰:「諸君欲葬我近城地,當從先塋爾。」既葬,顥為銘墓,稱雍之道純一不雜,就其所至,可謂安且成矣。
所著書曰《皇極經世》、《觀物內外篇》、《漁樵問對》,詩曰《伊川擊壤集》。
소옹이 병에 들자, 사마광 장재 정호 정이는 낮밤으로 그를 보살폈다. 장차 임종할 때 [그들은] 함께 밖에 있는 뜰에서 장례의 일을 논의하였는데, 소옹은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선 아들인 백온(伯溫)을 불러 “제군은 나를 가까운 성의 땅에 묻어주고 마땅히 선조들의 무덤에 따를 뿐이다.”고 말했다. 장례를 치루고서 정호는 그의 묘지명(墓銘)을 쓰며 ‘소옹의 도는 순일하여 잡박하지 않았고 그가 도달한 경지는 편안하고 완성되었다고 이를만하다.’고 칭송했다.
그는 《황극경세皇極經世》, 《관물내외편觀物內外篇》, 《어초문대漁樵問對》를 저술하였고 시로는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이 있다.
===== 아래는 부록 2로 별도 해석 함
宋謝良佐曰:「堯夫精《易》之數,事物之成敗始終,人之禍福修短,算得來無毫髮差錯。
如指此屋,便知起於何時,至某年月日而壞,無有不准。」
明季本曰:《梅花數》一名《觀梅數》,本題曰《康節梅花數》,故附邵圖之後,梅花者先春而蓓蕾,生意之早動也,占於幾動之初,思慮方起而鬼神可知之時,故數以梅花名焉。
乾一、兌二、離三、震四、巽五、坎六、艮七、坤八。
此先天橫圖八卦之定數也。
송사량좌 왈; "요부정 (역)의 수는 사물의 성패 시종, 사람들의 불행과 축복이 단축되고 계산에 작은 털만큼도 없다.
이 집을 언급하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으며 특정 년, 월, 일로 손상 될 것이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명 이본 왈 : "매화 꽃 번호""관메이 번호",이 제목은 "강지 매화 번호"이므로 shao 차트 이후, 매화 사람 전봄과 새싹, 사업의 초기 움직임, 여러 움직임의 시작을 설명하고, 광장과 유령 신에 대해 생각하고, 매화 신이 알 수 있으므로 매화의 수가 유명합니다.
乾西北屬金,坎北屬水,艮東北屬土,震東屬木,巽東南屬木,離南屬火,坤西南屬土,兌西屬金。
此為後天之方位也。
有先天之數未得卦先得數,以數起卦,故曰:「先天。」
有後天之數未得數先得卦,以卦起數,故曰:「後天。」
건서북속금, 감북속수, 간동북속토, 진동속목, 손동남속 목, 리남속화, 곤서남 속토, 태서속금.
이 타고난 수평 차트는 또한 가십의 명확한 수에 대한 것입니다.
qianbei는 jin에 속하고, kanbei는 shui에 속하고, genbei는 토양에 속하고, zhendong은 나무에 속하고, xundong은 나무에 속하고, yuannan은 불에 속하고, kun southwest는 토양에 속하고, duisi는 금에 속합니다. 이것이 내일 다음 날의 방향입니다.
계산되기 전에 계산되는 타고난 숫자가 있으므로 계산되므로 "선천적"이라고 불립니다.
내일 다음 날의 숫자는 계산되기 전에 계산되지 않으며, 그 숫자는 내일 이후의 일 수로 계산되므로 "내일 다음 날"이라고 말합니다.
先天之數,謂物之所生氣之,所置事之所遇,皆有年、月、日、時,年以子年起一數,年有十二月,則以正月起一數,月有三十日,則以初一起一數,日有十二時,則以子時起一數,皆隨其數而數之,以分八卦,如一為乾,二為兌而八則為坤也,除八之外,則用畸零之數起焉,年月日之數為上卦,年月日加時之數為下卦,合年月日時之數,以六除之,餘為動爻,
又如十幹則以甲起一數,十二支則以子起一數,所聞之聲,則以字句之多寡起數,所見之物,則以件目之多寡起數而為上卦,以所值之時數作下卦,併卦數時數總除取爻,如前法。
타고난 존재의 수, 화난 것들, 사물의 만남은 모두 년, 달, 일, 시간을 가지며, 그 해는 아이의 시작부터 계산되고, 12 월이 될 때, 그것은 첫 달부터 계산되고, 삼십 일이 있을 때, 그것은 시작과 함께 계산되고, 날이 열두 시간이있을 때, 그것은 아이의 시간으로부터 계산되고, 그 숫자로 계산되고, 그 수에 따라 계산되고, 그것은 가십으로 나뉘어지며, 하나는 건조하고, 둘은 교환되고, 여덟은 kunye이며, 그것은 누락 된 0의 수로 시작되고, 년, 달, 일의 수는 상위 구아이며, 년, 달, 일의 수는 낮은 구아이며, 년, 월, 일의 수는 여섯 개로 나뉘며, 나머지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 개의 qian은 지아에서 계산되고, 열두 개의 가지는 서브로 계산되고, 들었던 소리는 단어와 문장의 수로 계산되며, 보이는 것은 항목 조각의 수로 계산되고, 횟수는 하부 구아로 사용되며, 시간 수는 이전 법률에서와 같이 구아의 총 수로 나뉩니다.
又如一語則平分其數而為上下卦,數少者為上卦,數多者為下卦,蓋取天輕清地重濁之義也。
其餘或驗其方所,或辨其物聲,詳其所屬皆可起卦。
察其悲喜,斷其吉凶。
所謂未得卦先起數者,如此後天之數,以物類之屬八卦者為上卦,以取動爻物類,
如乾天、坤地、乾馬、坤牛之類,詳見蓍法別傳內篇。
또 다른 예는 문구가 숫자를 균등하게 나누고 위쪽과 아래쪽 gua이고, 적은 구아의 수는 위쪽 gua이고, 더 많은 구아의 수는 아래쪽 gua이며, 하늘의 의미는 가볍고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송곳니를 검사하거나 물건을 확인하고 소지품을 자세히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관찰하고 그 길조를 깨뜨립니다.
내일 다음 날의 수와 같은 소위 미개발 구아 번호는 qiantian, kundi, qianma, kunniu 등과 같은 사물의 유형을 취하기 위해 객체 클래스의 바구아를 상위 구아로 취하여 야로우 법률 전기의 내부 장을 참조하십시오.
八卦萬物屬類,所謂未得數先得卦者,如先天斷卦吉凶,止以卦論,不用易爻之辭,以其時未有易書也。
後天則用易辭兼以卦斷,以其時已有易書也。
8괘는 만물이 류에 속하며, 구아지 치열한 선천적 판단과 같은 구아를 얻기 위해 소위 계산되지 않은 첫 번째, 구아 이론으로 멈추고, 이순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 당시에는 이순신이 없었습니다.
후천 즉, 그것은 쉬운 말과 gua 판단을 사용하며, 그 당시에는 이미 이순신이 있었다.
凡上下二卦無動爻者為體,有動爻者為用,
體卦為主,
用卦為事,
互卦為事之中應,
變卦為事之末應,
互者中四爻互二體也。
무릇 위쪽과 아래쪽 트라이그램에 움직임이 없는 사람은 몸이고, 움직인 사람은 몸이고, 몸은 주요하며, 삼중조의 사용은 사물이며, 상호 삼중항은 문제의 중간이며, 구아의 변화는 문제의 끝이며, 두 사람 중 네 개는 또한 상호 작용의 두 몸이다.
變者之卦也,體之氣宜盛不宜衰,
盛者如春震巽朩,秋乾兌金,夏離火,冬坎水,四季之月坤艮土是也。
衰者如春坤艮土,秋震巽朩,夏乾兌金,冬離火,四季月坎水也。
體党多而體勢盛,用黨多而體勢衰,
如體卦是金而互變皆金,則是體黨多矣。
如用卦是金而互變皆金,則為用黨多矣。
변은 괘이다, 몸의 기는 마땅히 왕성 해야 하며 쇠하지 않아야 하며,
왕성은 봄의 진 손 목 같고, 가을은 건 태 금, 여름은 리화, 겨울은 간수, 4계의 달은 곤 간 토 같은 것이다.
쇠는 봄은 곤 간 토 같으며, 가을은 진 손목 같고, 여름은 건 태 금, 겨울은 리화, 4계의 달은 감수와 같다.
많은 신체 파티가 있고 몸이 강하고 많은 파티가 있고 몸이 약하며 몸이 금이고 상호 변화가 모두 금이라면 그것은 신체 파티입니다. 구아의 사용이 금이고 상호 변화가 모두 금이라면, 그것은 파티의 많은 사용입니다.
體用之間,比和則吉,用吉變凶者,或先吉而後凶。
用凶變吉者,或先凶而後吉。
체와 용 사이에, 비화는 즉 길이고, 용길 변흉은 , 또 먼저 길이며 후 흉이다.
용흉 변길은 또 선흉이며 후에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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