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6. 구하천보
백년 삶 원하지 않고 청진에 이르고자 했다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의 암흑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구하(九河, 1872~1965)스님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일신하는 것은 물론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동량을 양성했다. 또한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와 지사들에게 전달하여 조국해방의 꿈을 키웠다. 구하스님이 걸어온 길을 <구하대종사 민족불교운동 사료집> <축산문집> <금강산 관상록>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백년 삶 원하지 않고 청진에 이르고자 했다”
명신학교건립 유학승 선발 등 인재 양성
한글경전.독립자금 지원 민족정신 고양
○…“오문대도불씨지문(吾聞大道佛氏之門)” “저는 큰 가르침이 불씨의 집안에 있음을 들었습니다.” 갑신년(1884년) 동짓달에 12살 된 한 소년이 양친 앞에서 출가의 뜻을 밝혔다. 불씨(佛氏)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나타낸 말이다. “(부모님) 슬하에서 벗어나 큰 도를 이루고자 합니다”라고 간청한 이 소년이 훗날 구하스님이다. 양친은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눈물을 머금은 채 출가를 허락했다.
<사진> 영축총림 통도사 영각에 모셔져 있는 구하스님 진영.
○…천성산 내원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어른들을 극진하게 시봉하고, 밤이면 잠을 아껴 경전을 읽었다. 그러기를 5년. 마침내 경월도일(慶月道一)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았다. 1889년 7월16일로 스님의 세수 17세였다. 더욱 수행정진에 몰두하던 스님은 이듬해인 1890년 내원사를 떠나 예천 용문사로 갔다. 용문사에는 용호(龍湖)스님이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몇해 동안 경학을 깊이 공부하고 참선수행을 겸비한 스님은 ‘지혜의 눈’이 열렸다. 공부를 마친 후 출가본사인 통도사로 돌아오며 지은 시가 <축산문집>에 실려 있다.
“금경(金經)을 힘써 얻어 본산(本山)으로 돌아오니 /
깊고 깊은 불법(佛法) 모두 평화로운 모습일세 /
마음 비워 급제하여 선탑(禪榻, 참선할 때 앉는 의자) 더욱 높아지니 /
설월(雪月)의 빛과 바람 한가롭기 그지없네.”
○…인재양성이 불교의 미래이며, 조국의 희망임을 인식한 스님은 경남 지역에 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1906년 명신학교(明新學校, 지금의 하북초등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 해동고등학교, 1932년)와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1934년)를 설립했다. 특히 통도사 경내에 개설한 명신학교는 10년 뒤에 사립 통도사 학림으로 발전했으며, 졸업생인 오택언 김상문 등이 1919년 3월13일 ‘신평의거’를 주도했다.
구하스님은 어려운 절 살림에도 불구하고 ‘총명준수자(聰明俊秀者)’를 선발하여 외방(外邦,외국)에 유학 보내는 등 ‘사람 기르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또한 1912년 마산 대자유치원, 1923년 진주 연화사 유치원, 1936년 울산 동국 유치원 설립 등 어린이들에게 불심을 심어주었다. 스님의 이 같은 노력은 통도사는 물론 조선불교와 우리 민족을 위한 동량을 길러 내려는 원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군(郡)에 1 포교당이 있어야 한다.” 스님은 최소한 남해.의령.밀양.울주.창녕에 포교당을 한곳씩 만들어 전법(傳法)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야 함을 역설했다. 스님이 통도사 소임을 볼 무렵 세운 포교당 가운데 지금도 유지를 계승하고 있는 도량이 여럿이다. 일제강점기 통도사가 창건한 포교당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개원 시기. 마산 포교당 정법사(1912), 진주 포교당 연화사(1923), 창녕 포교당 인왕사(1923), 물금 포교당(1924), 언양 화장사(1927), 창원 구룡사(1929), 의령 수월사(1930), 부산 연등사(1932), 울산 포교당 해남사(1936), 양산 포교당 반야사(1940).
<사진> 일제강점기 구하스님이 독립자금을 지원했음을 증명하는 당시 영수증.
○…한문 경전을 쉬운 우리말로 옮기는 역경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통도사.해인사.범어사 등 경남지역의 큰절 3곳이 힘을 모아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하여 한문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3개 사찰이 1934년 종무협의회를 구성하고 역경불사를 진행했는데, 구하스님이 원장을 맡았다.
이밖에도 김경산.김설암.이고경.임환경.백경하.오성월.차운호 등 9명의 스님이 역경원에 참여했으며, 주임 역경사는 범어사의 허영호 스님이 맡았다. 해동역경원은 1938년 9월까지 지속됐으며, 4년간 <불타의 의의> <사종의 원리> 등 두 권의 포교총서와 <불교성전>이라는 한글번역본을 발간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을 통도사 불교학림 강사로 초빙한 것도 구하스님이 주지로 있던 1913년경이었다. 만해스님은 불교 대중화를 위해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했는데, 통도사 광명전에 소장된 대장경을 열람하고 ‘활동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 바로 구하스님이었다.
당시 일경(日警)의 감시 하에 있던 만해스님을 통도사 안양암에 머물도록 주선해주었으며, <불교유신론>의 간행 비용도 후원했다. 하지만 감시가 더욱 심해지면서 다른 스님을 통해 물금역까지 만해스님을 모셔 무사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만해스님은 오세창.정학교 등의 글씨를 모은 12폭 병풍을 기증했다. 운허스님이 통도사에서 <불교사전>을 편찬할 때는 손수 과자 그릇을 갖고 다니며 집필자들에게 나눠 줄 만큼 정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통도사는 개산(開山)이래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 <축산문집>에도 실려 있는 이 사건은 ‘의병대 사건’이다. 무장독립운동을 하던 의병대의 간곡한 청으로 당시 통도사 주지였던 스님은 화엄전에 소총 30자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 소총은 의병들이 사용하려고 숨겼던 것인데,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의병의 자백으로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축산문집>에는 “전모가 탄로나서 이를 수습하는데 큰 곤혹을 치르기도 하셨던 스님은 비상한 수단을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니…”라고 당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1912년 11월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발표 동참, 백산상회 안희제와 범어사 김상호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제공, 1920년 3월 의춘상회(의춘신탁)를 설립해 독립자금 마련, 1920년 4월 동아불교회를 설립해 항일불교운동을 시도하는 등 조국해방을 위해 힘을 쏟았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