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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는?
그녀는 책상 모서리에 있는 책갈피를 손으로 집어 페이지에 끼워 넣고 벽시계를 바라본다. 저녁 7시.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각은 8시다. 시간은 넉넉하다. 그녀는 초침을 바라보며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상상한다. 소설 속의 그는 형사였다. 그는 모텔을 덮쳤다. 그리고 아내의 간통장면을 목격했다. 그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증오? 배신? 혹은...꿈?
삶은 한가지이면서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밖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소설 속의 그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깊은 생각은 흔적을 남긴다, 어지럽다. 약간 열린 방문 틈으로 그녀를 힐끗 보던 남편은 설거지를 시작한다. 참으로 찌질하다. 언제까지 얹혀 살 생각인가. 간혹, 남자가 전업주부를 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녀의 남자가 그러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녀의 인터넷 쇼핑몰이 대박 난 순간부터 남편은 집에 눌러앉았다.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꾸 눈치를 보는 한심한 남자. 어쩌다가, 수컷의 본능을 잃어버렸을까.
그녀는 자신이 남자처럼 느껴졌다. 냉장고에서 차디찬 캔 맥주를 꺼내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TV를 켰다. <사랑과 영혼>. 저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그녀는 캔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남녀가 도자기를 빚으면서 손을 맞대는 장면에서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별 시답잖은... 그녀는 캔 맥주를 거푸 들이켜면서 오늘은 참 심심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린다. 낯익은 전화번호. 그녀가 폴더를 연다.
나야. 액정에 넘실거리는 굵은 목소리, 온몸의 희열이 그녀의 피부에 돋아난다. 그녀는 폴더를 닫고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켠다. 옷장을 열고 블라우스를 입는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밥 먹고 가라는 남편을 지나쳐 거실로 나간다. 남편은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녀가 나가자 그는 설거지를 멈추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꺼낸다. 흰 연기 속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흩어진다. <아무래도...정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담배를 쥔 손을 펴 한 쪽 가슴에 가만 얹어본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구친다.
*
고개를 든 그는 주방으로 갔다. 책의 내용은 좀 이상했다. 굳이 남자를 불치병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었겠는가. 여자는 바람을 피우고 남자는 죽는다? 무언가 불편하다. 게다가 전업주부라니. 결국은 여자가 남자의 병을 알게 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는 뭐 그런 내용, 비극이지만 희극적이다. 어쨌든 그를 실소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일은 어젯밤에 생겼다. 사촌이 죽었으니까. 녹차를 마실 생각이었다. 엷은 햇살이 베란다에 비쳐들었다. 그는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스위치 손잡이를 돌렸다. 심지에서 불꽃이 확 일었다. 아내는 아직 자는 듯 안방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는 녹차를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참 좋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녹차를 마셔보는 것 같았다. 웬일이에요? 그의 아내가 부스스한 얼굴을 한 채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응, 오랜만에 잠도 잘 잤고 햇살이 너무 좋아서. 별일이네. 글쎄, 이제 나도 나이를 먹는 모양이지. 당신 혹시 죽은 사촌 때문에 그래요? 도대체 어떻게 된거죠? 정확한 건 가 봐야 알지. 그는 말을 하면서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사촌을 잘 모르는 척 하는 아내의 상기된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큰아버지에게 간다고 말하긴 했지만 어쩐지 개운치가 않다. 그렇다고 가지 않는다면 뒷말이 무성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는 갑자기 녹차가 쓰게 느껴졌다.
예식장은 시내에서 좀 떨어진 외곽이었다. 지은 지 10년도 훨씬 넘은 건물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양새가 좋지 않은 만큼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장례식장이었다.
와, 더럽다. 그의 아내가 장례식장에 처음 도착해서 한 말도 그랬다. 그가 사는 아파트도 낡았지만 그의 아내는 천성적으로 깨끗한 걸 좋아해서 날마다 쓸고 닦았다. 가끔 그녀의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와우 정란이 너 알아줘야겠다. 어쩜 안과 밖이 이렇게 다르니? 할 정도였다. 들어가서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입 닫고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그래? 아무튼. 그는 아내에게 단단히 다짐을 두었다. 큰집과 그리 좋은 사이도 아닌데다가 사촌과는 특히 그랬다. 인사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는 차 안에서 부의 봉투를 꺼냈다. 아내가 쳐다보며 물었다.
얼마 넣었어요? 알 것 없어. 넣을 만큼 넣었으니까.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주말이어서 더 그런가?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빈소엔 상복을 입은 몇 사람이 서 있었고 입구엔 좀 낯익은 얼굴이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그는 죽은 사촌의 큰형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깍듯이 인사를 했다. 사촌형은 그가 올 줄은 몰랐는지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석문이 왔는가? 자네 얼굴 보기 힘들군. 동생이 자네 얘기를 많이 하던데 말야. 사촌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바닥을 펴고 빈소를 가리켰다. 사진 속의 사촌은 웃고 있었다. 너무 젊어 보여서 어쩐지 오래전 사진처럼 보였다. 그는 절을 하고 상복을 입은 가족과 마주섰다. 큰아버지와 사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쳐다보는 눈길들이 예사롭지 않아서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가 말했다.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자네 좀 있다 나 좀 보세. 큰아버지가 말했다. 인사만 하고 나오려던 그의 계획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절을 하고 나오자 사촌형이 따라 나왔다. 사촌형은 눈으로 조문객실에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밥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아내가 집에 가자고 소매를 잡아끌었지만 그는 모른 체 했다. 언제든 갈 수는 있지만 몰래 장례식장을 나가다가 사촌형의 눈에라도 띄면 낭패였다.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게 사촌형은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바라보는 눈은 이글거렸다. 그는 사촌형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반찬 겸 술안주로 나온 홍어는 밋밋한 맛이었다. 사촌형은 그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나서 큰아버지를 모시고 오겠다며 일어났다. 그냥 가면 안돼요? 좀 기다려 봐, 큰아버지가 할 말 있다잖아. 그는 아내의 물음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 가고 싶은 건 그였다. 앉게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에게 큰아버지가 손을 들어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큰아버지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병을 들어 유리컵에 따랐다. 그리고는 물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주로 김치 한 가닥을 오물거리던 큰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잠바주머니를 뒤적였다. 잠바속주머니에서 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큰아버지가 종이를 펼치자 볼펜으로 갈겨쓴 글씨들이 보였다.
보게.그는 큰아버지가 건네주는 종이를 펼쳤다. 글씨가 삐뚤빼뚤한데다 글자들의 크기도 제각각이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기 힘들었다. 이게 뭡니까?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남이 유언장일세. 아버지 더 이상 살기 싫습니다. 제가 원했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형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석문이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유언장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다 보았나? 그를 바라보는 큰아버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화를 애써 참는지 내쉬는 숨이 들쑥날쑥했다. 그는 유언장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 큰아버지에게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돈은...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뭐가 오해란 말이지? 큰아버지가 그의 말을 잘랐다.
사실 그 돈은 예전에 다 갚았습니다. 뭐? 돈을 갚았다고? 돈을 갚았는데 일남이가 유언장에 저렇게 쓰고 하고 죽어? 에끼 몹쓸 놈 같으니라구. 큰아버지의 손바닥이 그의 뺨에 와서 부딪쳤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억센 손이다. 그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후레자식이네. 네깟 놈을 조카라고 생각한 내가 한심하다. 그는 뺨을 어루만지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주변 친척들의 눈이 모두 그와 큰아버지에게 쏠려 있었다. 그의 아내는 어느 틈에 그에게서 유언장을 빼앗아 읽고 있었다.
큰집과 거의 왕래가 없던 그가 사촌인 일남이와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순전히 일남이 쪽이 원해서였다. 몇 년 전부터 술 한 잔 하자고 전화가 자주 왔었던 것이다. 그는 마지못해 나가곤 했다. 사촌이라도 형은 형이기 때문에 술값계산도 거의 그가 했다. 돈을 빌리게 된 것도 그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요즘 어렵다고 하자 일남이가 필요한 돈을 물었고 선뜻 내주었던 것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형과 나 사이에 각서까지 쓸 필요가 뭐 있수. 그냥 돈 생기면 갚아요. 뭐 안 갚아도 상관없고. 내가 형한테 얻어먹은 술이 얼만데요. 그랬던 일남이가 이런 유언장을 남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신, 이거 정말이에요? 그의 아내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눈빛 속에는 어이없음과 의혹과 불신이 함께 들어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죠? 돈을 빌린 거 맞아요?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물었다. 뭘 알고 싶은데? 그가 아내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생겼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의 각진 턱이 부르르 떨렸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할 거 아니에요. 얼마를 빌렸길래 죽으면서까지 그 얘기를 쓰냐구요. 아내는 그를 이해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그는 항상 외톨이였다. 술을 좋아했지만 얻어먹고만 다니는 축이었다. 언젠가 회사 내의 부부동반 등산모임에 나갔을 때 한 사원이 그랬었다. 박 대리님 술 한 잔 사는 걸 못 봤어요. 그 돈 모아서 뭐하세요? 부자시죠? 그 여사원은 그의 아내에게 지나가는 투로 부러운 듯 말했지만 쩨쩨한 남편을 둔 것 같아서 속이 거북했더랬다. 그 후로 남편은 얼마가지 않아 모임에서 탈퇴했다. 그녀는 그녀대로 억울했다. 돈을 그렇게 안 쓴다는 남편은 네 식구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돈을 준 적이 없었다.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외식을 한 기억도 까마득했다. 그녀가 참다못해 화장품 회사에 들어가게 된 이유다. 한차례 이혼 직전까지 갔지만 초등학생인 딸들 때문에 포기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녀가 아는 남편은 남의 돈을 떼어먹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죽은 일남에에게 물어야지 나라고 그자식이 그럴 줄 알았겠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유언장에 그딴 얘기나 써 놓을 줄 알았겠냐구. 겨우 삼백 만원이야, 삼백 만원. 알겠어? 삼백 만원이라구요?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그의 아내는 어이가 없는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가증스러운 범죄자를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그도 그 눈빛을 느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전방을 주시했다. 자네가 그렇게 발뺌할 줄 알았지. 삼백 만원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내가 알기로 일남이는 억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어. 곧 사기죄로 구속될 테니 후회나 하지 말게. 법원에 근무하는 사촌형이었다. 그가 아는 사촌형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뒤가 무르고 종잡을 수 없는 일남이와는 딴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내는 시큰둥했다. 그의 말을 듣기는커녕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아내는 늘 그랬다. 그가 생각하는 아내는 용의주도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월급을 주면 주는 대로 써버렸다. 동창회다 뭐다 무슨 모임이 그리 많은지 회사 야근이 많은 그보다 늦게 들어올 때가 많았다. 견디다 못한 그가 이혼을 말했지만 그녀는 뜨악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아내에 대한 생각을 접고 일남이의 죽음을 생각했다. 일남이는 왜 나를 물고 늘어졌을까. 죽어서까지 사촌 형인 나에게 얻으려는 건 무엇이었을까. 단지 죽기 전에 빌린 돈을 받기 위해서? 사촌 형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장례를 지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유언장은 말 그대로 유언장일 뿐이다.
죽기로 마음먹은 놈이 무슨 소리를 못하겠는가. 돈을 빌렸다는 말만 있을 뿐 액수도, 정확한 날짜도 없었다. 증인은 더더구나 없다. 법원에 근무하는 형의 말에 형사도 마지못해 소환장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생각으론 이미 해보나마나 한 수사였다. 다만 짜증이 좀 났다는 것 뿐, 그의 생활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달랐다.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니, 걱정이라기보다 당연히 올 것이 왔으므로 죄를 지은 사람은 죄 값을 받아야 한다는 눈빛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뭘요? 날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잖아 지금. 내가 경찰서에 잡혀가서 감옥살이라도 해야겠어? 그런 거야? 그답지 않게 소리를 높였다. 아내의 눈빛은 전혀 인간적이 아니다. 과연 한 지붕 아래서 여러 해를 살아온 남편에게 보낼 눈빛인가? 당신 일남씨에게 어떻게 했죠? 어떻게 했길래 그 사람이 자살을 하냐구요. 이제 본심이 나오는군 뭐가요? 일남 씨? 일남 씨 좋아하네. 그렇게 좋으면서 왜 그렇게 대했지? 일남이가 죽은 건 당신 때문이야. 그도 아내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죽은 일남이는 아내를 좋아했다. 처음엔 그냥 총각이 연상의 아줌마를 좋아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일남이와 그가 몇 년 전 술 한 잔을 할 때 일남이는 여전히 총각이었다. 술장사를 했는데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그는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생활고에 허덕이던 때였다. 형이랑 만난 지도 꽤 되는군요. 그러게 말이다. 몇 년 전에 큰어머니 돌아가실 때 보고는 처음이지? 우리는 사촌이면서도 왜 이렇게 소원하게 지내는지 모르겠어요? 이제부터라도 가끔 술도 한 잔씩하고 지내죠. 그거 좋지. 그날 술을 많이 마시고 집으로 일남이를 데려왔었다. 아내를 처음 본 일남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내는 전형적인 미인 형은 아니지만 섹시한 여자였다. 학교 다닐 때 핸드볼을 했을 만큼 몸은 잘 발달되어 있었다. 마른체형이면서도 힙과 가슴이 특히 도드라졌고 얼굴은 몇 군데 손을 보아서 어디 가면 빠지지 않았다. 아내가 학교 다닐 때의 사진이 없는 건 그런 이유였다. 언젠가 장모님 댁에서 처녀 때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광대뼈는 내려 앉혔고 눈은 쌍꺼풀에다가 턱뼈도 깍은 듯 했다. 입술도 도톰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일남이가 뻑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보이는 게 전부니까. 형수님이 미인이신데요. 고마워요. 도련님도 멋져요. 일남이가 군침을 흘리며 말하자 아내가 그렇게 대꾸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두 년놈들이 그때부터 눈이 맞았다는 걸. 일남이는 그 후로 뻔질나게 전화를 해댔다. 그는 좀 의아하면서도 노총각이 외로움을 타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술자리에 아내가 나갈 때도 있었고 나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내가 못나갈 때 일남이는 바쁜 일이 있다며 일찍 자리를 뜨곤 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일남이가 스와핑을 제안하기 전까지는. 결혼도 하지 않은 노총각이 스와핑이라니. 일남이는 자기 애인과 그의 아내를 바꿔 잠자리를 하자고 했다.
처음엔 술 취한 놈의 말이라 여겼지만 일남이가 달콤한 제의를 해왔다. 적지 않은 액수를 그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그 제의를 허락한 것이 그의 실수였다. 며칠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소환장을 받고도 출두를 하지 않자 담당형사가 전화를 해왔다. 김 석문씨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경찰서입니다. 소환장 받으셨죠? 네 왜 출두하지 않으셨습니까 . 전 그런 사실이 없어서 안 갔습니다. 이보세요, 김 석문씨. 그건 경찰서에서 판단합니다. 나오지 않으시면 구인장 발부될 수 있으니까 내일오전 중으로 꼭 나오세요. 아셨죠? .... 알았냐고 묻잖아요 지금, 내가 거기 가야해요? ...알겠습니다. 사촌형이 어떻게 손을 써 놓았는지 담당형사는 적극적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마당에 무얼 캐내려는 것일까. 담당형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가 일남이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일남이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게 그를 가장 극한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대로라면 그에게 일남이의 죽음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다. 그가 일남이에게 돈을 빌렸다는 것도 빌리고 같지 않았다는 것도 일남이가 죽으면서 남긴 종이쪼가리 한 장에 연유할 뿐이다. 에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그는 혼잣말을 되뇌인다. 아내는 며칠 동안 말이 없다. 말이 없기도 하고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어딜 돌아다니는지 집에 온전히 붙어있는 날이 없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베란다 철쭉과 고무나무의 물을 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활짝 꽃을 피울 철쭉처럼 햇살은 눈부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햇살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의 아내는 어젯밤에 술을 진탕 마셨는지 방에서 감감 무소식이다. 어떻든 아내와 입을 맞추어 두어야할 필요성을 그는 느낀다. 소환이 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혹, 아내까지 경찰서에 가게 된다면 서로 다른 진술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아내와 그는 지금 어쨌든 일남이의 죽음에 대해 서로의 책임을 미루는 중이니까. 일남이의 유언장은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여러모로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아내가 잠을 깨어 거실로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나랑 얘기 좀 해요 그의 아내는 거실로 나오자마자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얘기? 그가 말을 받았다. 그가 할 얘기는 따로 있었지만 아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나 당신에게 실망이 커요. 원래 비밀이 많은 남자였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내가 생각할 땐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구요, 돈 문제가 아니면? 일남 씨와 함께 여행가자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요. 여행 가서 나와 일남이 여자친구만 방에 놔두고 둘이 나가서 아침에 들어왔죠? 왠지 느낌이 이상했어. 둘이서 무슨 짓을 한거죠? 일남씨 여자친구도 일남 씨가 너무 이상하다면서 헤어질 생각을 하더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가 두 손을 펴 보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말 더 들어봐요. 일남 씨가 그 여자친구를 사귄 이유가 있어요. 그 여자는 운동선수 출신인데다 여자답지 않게 남성적이더군요. 언젠가 여자친구가 자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는데 일남씨 하는 말이 ‘남성스러워서’였다더군요. 거기다 당신은 어때요?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죠. 당신은 결혼한 뒤로 나를 여자로 본 적이 없어요.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자의 직감처럼 확실한 게 없죠. 어때요, 내 말이 틀렸어요? 아내가 그를 꼬나보며 말했다. 그는 아내의 말이 너무 뜻밖인지 몽롱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일남이가 여자친구를 데려왔지만 스와핑을 거절당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심한 일남이가 유흥주점에 가자했고 그는 일남이가 하자는 대로 한 죄밖에 없었다.
아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었다. 으흐흐흐 그가 흐느끼듯 웃었다. 이 도저한 상상력 앞에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체념이 헛바람처럼 새어나왔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두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그는 경찰서 형사과에 갔다. 사촌형이 그를 사기범으로 고발했다고 했다. 형사도 좀 난처한 듯 했다. 유언장대로라면 돈을 빌린 건 분명해 보이는데 자살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헷갈려하는 눈치였다. 법원에 있는 사촌의 부탁이라도 받았는지 자꾸 유도심문을 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가 삼백만원이라고 딱 잡아떼자 짜증을 냈다. 자꾸 이러면 신상에 이로울 게 없어요. 쿨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갑시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십분이 넘도록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자 담당형사는 자판을 두들기다말고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경찰서를 나와 무작정 걸었다. 아내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둘이서 무슨 짓을 한 거죠?’ 일남이의 유언장은 뜻밖이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는 유언장을 보고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돈의 액수도 적혀있지 않은 유언장은 휴지나 다름없다. 그가 주장하는 액수가 일남이에게 빌린 돈의 액수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은행에 가서 사촌형에게 돈을 부쳤다. 죽은 놈에게 돈을 부치다니! 그는 속으로 외쳤다. 그는 은행을 나서면서 이혼이란 단어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남이가 죽었으므로 일남이와 아내의 관계 역시 뼛가루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그는 잠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했다. 신호가 열 번째에 이르자 그는 폴더를 닫을까했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야. 지금 집 앞에서 좀 보지. ......알았어요. 잠시 침묵하던 여자가 말했다.
그는 백 여 미터를 걸어 입구를 나무계단으로 장식한 커피숍에 들어갔다. 그는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나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 건너 횡단보도에 여자가 서 있었다. 청바지에 추리닝 잠바를 걸친 여자가 액자 속의 풍경처럼 그에게 붙박혀 왔다. 여자가 액자에서 걸어 나오듯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무슨 일이죠? 여자의 말투가 싸늘했다. 말투 뿐 아니라 얼굴에서도 냉기가 흘렀다. 말을 하는 여자의 아랫입술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정리를 좀 하고 싶어서. 아직 정리할 게 더 남았나요? 여자는 여전히 선 채였다. 그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는 힐끗 창밖을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앉았다. 그럼 이대로 끝내자는 거야?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남이 때문이라면... 일남씨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 당신이 더 잘 안잖아요. 여자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일남이와 자주 만나던 작년 여름이었다. 고깃집에서였다. 여자는 흰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고 왔는데 무척 건강해 보였다. 그의 아내처럼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여자답지 않게 각진 턱과 강인한 모습이 호감이 갔다. 일남이가 여자를 데려온 것은 말하자면 소개팅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남이와 그만 아는. 처음엔 버팅기던 여자도 나중엔 일남이에게 싫증이 났던지 만나자는 그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그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일남이의 제의가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이 뭔데 내 삶을 갉아대는 거예요?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가 하는 말들이 결국 물처럼 흘러갈 거라는 걸 알았다. 어쨌든 그들은 공범이다. 부부관계는 아마 더 끈끈해질지도 모른다. 일남이가 죽지 않았다면 마른 감정의 부유물을 진실로 알면서 살다가 헤어질 수 있었다.
여자가 떠나고 남은 것은 아내뿐이다. 갉아대다니 무슨? 그가 약간 비웃음을 띤 채 되물었다. 몰라서 물어요? 대체 뭘 알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얘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일남이와 아내, 그와 여자. 이제 그 한 축이 무너졌다. 그리고 여자는 떠났다. 당신이란 사람 웃겨 아주. 여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비장한 결의를 다지듯 입술을 깨물고 여자는 떠났다. 여자도 떠난 이상 일남이의 죽음으로 벌어질 전개는 그에게 사소했다. 이미 돈도 부쳤다. 더 이상 무얼?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아내는 무언가를 더 내놓으라 한다. 비밀? 비밀. 빌린 돈의 액수이거나 일남이, 혹은 여자와의 관계. 의심은 모든 것을 비밀로 밀어붙인다. 막다른 곳에 다라라야만 터트려지는 비밀. 하지만 이제 내겐 남은 비밀이 없어. 그가 아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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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을 덮었다. 소설의 결말이 훤히 보였다. 일남이가 죽었고 둘은 그 죽음에 공범이지만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가게 될 거라는. 그는 기지개를 켰다. 아내는 싱크대에 가득 쌓인 설거지를 팽개쳐 놓고 방 안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 그는 어딜 갈 거냐고 묻지 않는다. 방문을 열고 바라보는 그의 눈을 보며 아내가 말한다. 친구가 잠깐 보재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요즘 부쩍 외출이 잦다. 설거지를 미룬 적이 없던 아내였다. 항상 집을 쓸고 닦던 아내가 방바닥에 너저분한 머리카락과 먼지를 보고도 반응이 없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서 친구 한 놈이 떠올랐다. 몇 년 동안 서로 잊고 지내다가 몇 달 전에 전화를 해왔다. 결혼을 하지 못했다면서 그를 부러워했고 아내와 함께 가진 술자리에서 제 여자친구를 앉혀두고도 아내의 가슴과 엉덩이를 줄기차게 훔쳐보던.
아내의 외출이 잦아진 게 그즈음이다. 아내가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는 아내가 흘리고 간 핸드폰을 줍는다. 제발...꼭 할 말이 있습니다. 문자엔 친구 놈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문자는 좀 이상했다. 잘 만나주지 않는 사람에게 애원하는 듯했다. 문득, 여자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집이 무덤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까 읽은 소설을 떠올렸다.
일남이는 왜 죽었을까. 일남이는 아무래도 그의 아내를 사랑했던 것 같다. 아내가 일남이를 내쳤다면 상심한 일남이가 자살을 선택했을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유언장은 그가 빌려간 돈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그 대목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진실은 유언장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소설 속의 그가 왠지 측은해졌다. 빌린 돈을 두 번 갚고도 의심을 떨쳐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불분명하다. 그나마 분명해 보이는 것은 주인공의 아내가 일남이와 잠자리를 했을 거라는 거다. 그는 늘 사랑의 완성은 잠자리 후에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게 동서고금의 진리다. 도대체 저 문자는 무얼 뜻하는 걸까. 친구 놈이 아내를 사랑하는 거라면?
그는 소설을 다시 펼쳐 맨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문득, 헤어진 여자가 생각났다> 그는 책장을 덮고 잠깐 깊은 심연에 빠졌다. 왠지 자신이 거룩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봐야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그는 가슴속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골라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편에서 맑고 싱싱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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