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3일. 오트란토에는 거리 쓰레기통이 아주 많다. 곳곳에 대형 쓰레기통도 비치 되어 있다. 배에 있던 항해쓰레기를 간편히 처리 한다. 어제는 배에서 샤워했다. 공간이 넉넉하기 샤워도 어느 정도 제대로 한 것 같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일찍 일어났다. 모처럼 야간 견시 없이 푹 잤다. 오늘은 반드시 Wifi 잘 되는 좋은 숙소를 찾아야겠다. 아니다. 토, 일 이틀간 어차피 강풍이니 비가 온다는 토요일 밤에 예약을 할까? 고민 좀 해야겠다. 가진 자원을 최대한 아끼고 유용하게 활동하는 것이 세일링의 기본이다.
다음 주 출항계획을 점검한다. 크레타 Chania marina 까지의 거리는 427마일, 약 3일 반의 항해다. 화요일 오후부터 바람이 거세져서 강풍과 약풍이 교차한다. 일단 가기로 마음먹지만, 만만치 않은 항해가 될 거다. 문제는 파도다. 2.3미터 구간이 몇 군데 있다. 혼자라면 맘 편히 떠나겠지만 아이가 있으니 고민이 된다. 선배 선장님들께 문의 한다. 삶에 있어 핑거포스트가 되는 분들이 있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일이다. 다들 바쁘시지만 짬을 내 반드시 답을 주신다. 이런데서 씨맨쉽 Seamanship 이라는 걸 깊이 느낀다. 나 역시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들께 등불이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씨맨쉽에 덤을 얹어 다른 분들께 전달하는 일. 그래서 우리나라 요트 대중화의 길에 잔돌이라도 치우고, 낙엽이라도 줍고 싶은 마음이다.
한분은, 파도는 큰 문제없다. 풍향풍속이 문제다. 또 한 분은, 파도 방향이 중요하다. 뒷 파도면 3~4미터에도 출항한다. 따라가면 그리 출렁거리지 않고 잘 간다. 라고 하신다. 모두 옳으신 말씀이다.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이다. 그러면 나는 두 분의 의견을 종합해서. 다음 주 ‘수~일요일’ 로 항해일정을 잡아본다. 매일의 항해 궤적을 미리 예상하고, 그 시간에 내가 그 지점에 있을 때쯤의 일기예보를 확인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30노트 이상 강한 바람은 피하고 뒷 파도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다음 주 월요일 쯤 다시 일기예보를 확인해야만 한다. 바다는 슈퍼컴퓨터의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태초부터 바다는 명령하고 우리는 따른다. 뱃사람들이 포세이돈이나 용왕님을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할지 확실하게 느낀다. 바다에서 부주의는 곧장 생명으로 치환된다.
첫 번째 구간은 맛보기였다고 하면, 이번은 제대로 된 항해라고나 할까? 날씨 정보를 보며 새벽부터 고민이 많다. 일단 오늘 오전 8시 30분에 기술자 무스카텔로가 약속대로 와주어야 한다. 그가 배의 문제점들을 제대로 수리해 줘야 마음 편히 출항이 가능하다. 어제는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못 온 거니까, 오늘은 반드시 올 거야 스스로 마음을 편히 먹기로 한다. 안 그러면 또 나만 스트레스다. 이탈리아니까, 무스카텔로는 9시 30분에 왔다. 왔으니 다행이다. 젊은 기술자 로미오 (외모는 전혀 로미오스럽지 않다)와 함께다.
로미오는 배터리부터 체크한다. 한동안 점검하더니, 뭐가 문제냐? 라고 거꾸로 묻는다. 엔진을 켜면 100%로 표시 되다가 끄면 바로 75%로 떨어진다. 내가 하루에 8시간 엔진으로 충전하며 가다가 16시간을 충전 없이 범주해도 괜찮겠느냐? 물으니 전혀 문제없다고 한다. 일단 하루 종일 220V 전원 없이 서비스 배터리가 얼마나 남는지 체크해 본다. 만약 항해 중에 배터리가 모자라면 선내 발전기를 켜서 충전하기로 하고 배터리에 관한 부분은 넘어간다. 12V 이상으로 16시간을 못 버티면 중간에 발전기로 충전하거나 시동을 켜면 된다. 엔진 시동용으로 예비 배터리도 하나 새로 산 것이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이대로 크레타까지 가보고 배터리 교체여부를 결정하자.
이제는 전동 윈치 부분. 로미오는 전동 윈치 아래 부분을 뜯더니 나더러 한번 보라고 한다. 보니 전선이 완전히 타버렸다. 전선만 문제인지, 모터까지 타버렸을지는 분해해 봐야 안다고 한다. 로미오는 좁은 공간에 고개를 들이밀고 몇 번이나 아휴~ 하고 한숨을 쉬며 일한다. 요트 일은 공간의 제약이 크다. 덩치가 클수록 불리하다. 이탈리아어 번역기를 켜고 ‘좁아서 힘들지?’ 하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요트일 해본 사람들 끼리 서로 입장을 이해하는 거다. 레이마린 C80 부분은 자신의 분야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을 불러 준다고 한다. 해서 오늘의 작업 진척율은 33%다. 아무 이상 없는 배터리 33%, 모터는 타버렸으니 0%, C80 플로터 부분은 다른 사람이 와야 하니 0%. 33%면 야구선수나 내과 의사의 성공률과 비슷하네.
아침에 부둣가의 선박 주유소에 들렀다. 마침 사람이 있다. Unleaded(무연)이라고 쓰인 곳이 가솔린인데, Gasllio(가솔리오)이라고 쓰인 곳은 디젤이다. 이러니 어디서든 디젤? 하고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 Gasllio이라고 쓰였다고, 이거로군! 했다간 낭패다. 그런데 주유소 계류장이 너무 얕아서 큰 요트들은 들어 올 수 없다. 말 통으로 날라야 한다. 주유소 직원은 말 통으로 나르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혹시 싶어서 판매시간을 물어 보니, 오전 7시에서 12시까지 오후 3시에서 7시까지라고 한다. 중간 휴식인 시에스타를 확실하게 지킨다. 1리터에 1.79유로(2,417원) 완전 비싸다. 오케이! 낼모레 올게 하고 일단 확인만 한다.
배로 돌아와 뱃전에 묶여 있던 예비 경유 말 통을 들어 경유를 부으려고 하니 허어, 신기하다. 한국 20리터 말 통처럼 뒤에 공기구멍이 없다. 호스를 연결하여 부어 보니 당연히 하 세월이다. 옆으로 막 샌다. 바스토 철물점에서 산 주유 펌프를 꺼냈다. 엥? 이게 전동식이다. 이 조그만 게 당연히 수동식인줄 알았더니 낭패다. D 건전지 2개가 들어간다. 배터리를 사러 시내로 나갔다. 도중에 어제 들른 카페 곁을 지나다 보니 Wifi가 된다. 길가다 말고 서서 한국으로 화상통화를 한다. 부모님께 리나를 보여 드리기 위해서다. 어른들은 손녀 얼굴을 보고 너무나 행복해 하신다. 대형마트가 대략 도보로 20분 거리. 도중의 작은 마트에는 D 건전지가 없다. 가는 도중에 철물점이 있다. 물건이 많지 않지만 D건전지는 있다. 2개가 4.5유로 (6,075원) 10개를 샀으니 건전지 값만 3만원이 넘는다. 이래저래 항해엔 돈도 많이 들어간다.
마트에 다녀오면서 도둑 Wifi를 쓴 카페에 들어가, 피자와 콜라, 환타로 점심을 때운다. 피자가 짜다. 산살보에서는 뭐든 다 맛있었는데, 이탈리아 전체가 다 맛난 것은 아닌가 보다. 갑자기 춥다. 오전 6시에 4도이던 기온이 오전 10시엔 더워서 점퍼를 벗었고, 오후 2시엔 다시 춥다. 종잡을 수 없는 오트란토 날씨다. 서둘러 배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기로 한다. 그러나 배로 가면 2시 30분. 이탈리아는 오후 4시면 뭐든 다 파장 분위기니, 다시 나오기도 만만치 않다. 이탈리아에서 시간은 물에 젖은 크래커처럼 쉽게 부스러지고 증발된다. 아내는 배로 오자마자 아기에게 볶음밥을 해 먹인다. 나는 배에 경유를 채우러 나간다.
경유를 부어보니. 대략 60리터가 들어가자 가득 찬다. 원래 예상은 226Nm 에 41시간, 디젤 소비량 69.9L 였는데 대략 비슷하게 선방했다. 배의 데이터를 고친다. 50피트, 시간당 속도는 5.3, 유류소모량은 2.0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렇게 가기를 소망한다는 의미도 있다. 느리게 가자.
아내는 아기와 함께 배에서 잠들고, 나는 다시 Garden Bar 로 왔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켜 놓고 일기예보를 확인하며, 그리스 크레타의 Chania Marina 로 메일을 쓴다. 이번 오트란토 마리나처럼 헤매지 않고 바로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서다. Mr. Spyro 가 친절하게 답변해 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기적이 있었다. 로미오가 윈치모터를 고쳐 온 거다. 겨우 하루만에? 이탈리아에서? 나는 윈치모터가 다 타버렸으면, 최악의 경우에 250만 원 이상의 비용에, 15일 이상 대기해야 할 각오를 했었다. 그러나 겨우 하루 만에 가격은 240유로(324,000)에 해결되었다. 정말 기도가 답을 주었다고 밖에는 따로 할 말이 없다. 항해엔 뜻밖의 행운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