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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소련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통일교의 공헌 크다
-공산권 선교의 선구자 석준호 통일교 한국회장의 증언 중에서 발췌-
(중략)
공산권에 천리천도의 말씀을 넣으신 참부모님
저의 첫 공직은 동두천 교회 교회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년 미만 목회를 하다가 서울새마을학사(신촌학사)에서 대학생들을 지도하며 학사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2년 2월 참부모님의 부름을 받아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선교활동은 21년간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중국, 몽골에서 18년간 활동했으며, 그 가운데 미국과 소련을 오가며 3년을 겸하였던 것을 제하면 총 36년을 해외에서 보내고 지난 2008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특별히 참부모님께서 경륜하신 소련 섭리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교훈을 되새기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식구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다시피 1990년 4월 11일 참부모님께서는 모스크바 특별 영빈관에서 성혼 3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신데 이어 모스크바 국제호텔에서 대회를 주관하셨습니다. 그리고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단독 회담까지 가지셨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신 이후 참아버님께서는 당시 미국 카프(CARP, 원리연구회) 회장이었던 저를 부르시어 “소련 대학생 300명을 미국으로 데려와 교육시키라”는 특별지시를 내리셨습니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주신 사명보다도 목표를 초과달성하여 350명을 교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3,000명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1년 안에 말입니다. 그때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첨예한 대립 중에 있었기 때문에 학생 교류라야 연중 평균 7명 내지 8명이 고작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때 소련 학생 3,500명을 100~250명씩 나누어 총 27회에 걸쳐 교육하게 되었습니다.소비에트연방 15개 공화국을 일일이 뛰어다니며 참부모님의 의중을 전하면서 공화국 책임자들에게 “이 말씀을 학생들에게 전하려 하니 영어에 능통하고 품행이 단정한 최고의 학생들로 선발해 달라.”고 협조를 구했습니다. 예상을 뛰어 넘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지원하였습니다. 학교에서 1차로 선발해 준 학생의 숫자가 너무 많아 우리는 2차 관문을 설정했습니다. 보다 우수하고 인성이 바른 인재를 교육에 참여시키기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목적, 가치관에 대해 알아보는 에세이 테스트와 면접을 실시했습니다. 경쟁률은 4대 1이었습니다.
소련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아십니까?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합니다. 소련 전체는 15개 공화국, 러시아 자체만도 21개 자치 공화국이 있습니다. 미국 세미나에 지원한 한 학생에게 어느 지역에서 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며 기차로 하루 반 정도만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 나라에서는 가까운 것입니다. 거대한 땅 소련 전체를 밤낮 없이 누비면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서 직접 원리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승공강의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용납이 되질 않았습니다. 우리는 원리강의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주세계의 중심 사상이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원리강의를 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돌아가서 고발을 하면 중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련 학생들 모두를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만큼 심정적으로 말씀을 전달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봉사를 펼쳤습니다.
초기에는 교육을 받으러 온 소련 대학생들에게 미국 정부도 우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원이 점점 불어나자 국무성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련 학생들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이토록 많이 오고 있는 것인가. 이들이 미국 학생들을 공산화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미국은 점차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소련에 있는 국제관계대학이라는 외교관을 양성하는 전문대학에서 210명의 학생을 보냈는데 미국 대사관은 비자를 불허하였습니다. 당연히 발급될 것으로 알고 공항까지 갔다가 모두 낭패를 보고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이젠 틀어진 일이라고 수군거리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날이 목요일이었는데 우리는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틀림없이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할 테니 다시 나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11시간의 시차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련 시각이 미국시각보다 앞섰던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210명의 학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반드시 비자를 받게 할 테니 월요일에 다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비행기를 전세 예약했던 핀란드 항공사에도 월요일에 반드시 출발할 테니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해도 전액을 지불하겠다는 확답까지 해주며 항공사를 안심시켰습니다.
하늘은 굳게 믿고 큰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국 국무성을 어떻게든 뚫는 것이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닦아 놓으신 모든 기반을 총동원해서 국무성을 뚫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기적같은 길이 열렸습니다. 미국 측으로부터 비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소련 시각으로 토요일이었던지라 영사관이 업무를 보지 않았습니다. 초조하고 애타는 기다림 가운데 월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영사관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210명의 여권을 제출하고 비자 관련서류 일체가 신속히 발급되기를 독촉했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스탬프 찍는 것도 영사관의 일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동의를 얻어 우리 스탭들까지 동원되어 여권에 스탬프를 찍었습니다. 비행기 출발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침내 모든 여권에 비자가 갖춰졌습니다. 그러나 영사관에서 공항까지 가기 위해서는 통상적으로 1시간 반을 달려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KGB(소련비밀경찰)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일체의 검문검색 없이 논스톱으로 전속력으로 다해 달렸습니다. 심지어 KGB 지도부의 특별지시로 소련 이민국까지도 그냥 통과하였습니다. 여권이 누구의 것인지도 채 확인을 못하고 일단 비행기에 전원 탑승시키는 것으로 일을 성사시켰던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정말로 하늘의 역사하심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스로 1년 사이에 3,500명을 교육시켰습니다.
미리 예견하시는 참부모님의 섭리적 경륜하심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1991년 8월 17일 그 교육이 끝나자마자 소련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기를 든 엄청난 규모의 쿠데타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가장 신임했던 오른팔과 왼팔 격의 KGB, 국방장관, 국무장관, 내부장관, 군사령관들이 반기를 든 것입니다.당시 고르바초프 대통령 부부는 크림 반도 얄타에서 휴양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부부는 이들 반란군들에게 강제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으로 영부인 라이샤 여사는 병을 얻어 일찍 작고하고 말았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 세력들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강제로 압송, 탱크를 물밀 듯이 밀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쿠데타는 반란 세력들의 뜻과 의지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련 공산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쿠데타에 반대하는 데모를 펼친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 반대 시위를 누가 주동한지 아십니까? 바로 미국에서 참부모님의 사상, 원리교육을 받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유를 갈망하는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무력으로 중무장한 반란군과 탱크부대를 온 몸으로 저지하는 중심에 섰던 것입니다. 대로(大路) 한 가운데 드러누워 무소불위의 무력을 평화적으로 막아낸 것입니다. 결국 반군세력의 쿠데타는 3일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만일 원리교육을 받고 새로운 비전과 미래를 꿈꾸었던 그러한 소련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어디로 흘러갔겠습니까? 공산과 민주라는 첨예한 냉전시대가 계속됐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다면 오늘의 인류 역사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쿠데타가 벌어진 3일 동안 반군세력에 의해 감금됐던 국가교육위원회 구리예프 차관은 석방된 후 “소련을 구한 분은 바로 문 총재님이시다. 문 총재님이 소련을 구하셨다”라고 밝혔습니다.
미국과 소련을 고작해야 1년에 7, 8명이 오가던 시대에 3,000명 이상을 교육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상상초월이었습니다. 한쪽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고 또 한쪽은 자유민주주의의 대표국이었던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참부모님의 섭리는 현실을 넘어선 경륜이었습니다. 당시 현실만 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측면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참부모님께서는 1년 후 소련에 불어 닥칠 이 쿠데타를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뿐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미리 천비를 말씀해 주게 되면 사탄이 침범하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만 1년 내 3,000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을 반드시 교육하라고 강력히 독촉하셨던 것입니다.
소련에서의 섭리를 체험하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참부모님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깊은 혜안으로 미리 예견하시고 경륜하시는 참부모님이시기 때문에 내리시는 그 지침과 명령 앞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모든 지시는 섭리적 뜻이 계시기 때문임을 알고 분부하심에 절대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참부모님께서 기도와 정성을 모아주시고 영계에서 협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충분히 성사될 수 있는 조건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 차원에서 어려운 목표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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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세계 10월호(양력 2010년 11월호)』PP.31-33 에서 인용. 끝
첫댓글 장문을 쓰느라 수고했습니다 모서갑니다 그리고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