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6:1-13,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24.4.17, 박홍섭 목사
사무엘상 15장부터 31장까지는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과 하나님에 의해 사울과 다른 왕으로 세워지고 있는 다윗의 모습이 일관된 대조로 나타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앞서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다가 자신의 왕위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통보를 받았습니다(13:14). 그리고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것을 남겨와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15:28).
그리고 16장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사울을 버린 하나님은 사울 대신 다윗을 세우려 하십니다. 사울과 다윗 둘 다 하나님이 주도하여 세운 왕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뚜렷한 대조가 있습니다. 그 대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 대신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하시는 장면인데 여기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사울 다음에 세워지는 왕은 하나님을 위한 왕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어떤 왕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를 위하여 왕으로 세워달라고 미련한 고집을 부려서 허락한 왕입니다(8:5, 22).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열방과 같은 왕을 구했고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열방의 왕과 똑같은 자로 드러납니다. 탈취하고 빼앗아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그 권세를 누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왕,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백성들을 이용하고 유리할 때는 자신의 공이고 불리할 때는 백성을 핑계하는 왕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이 원하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새로운 왕을 세우고자 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은 하나님이 사울을 세울 때의 경험이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가장 준수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세를 외쳤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마음에 흡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한 왕의 기준은 용모와 신장입니다. 그것이 대변하는 사람의 외형적인 힘과 능력입니다. 그렇게 용모와 신장의 기준으로 엘리압을 보니 그가 하나님이 기름 붓겠다고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7절입니다. 사울처럼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기준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의 기준이고 이제는 나의 기준으로 세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이새의 일곱 아들 중에는 그 중심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새에게 다른 아들은 없냐고 묻고 들판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다윗이 와서 기름 부음을 받게 됩니다. 11-13절이죠.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의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지금의 막내는 귀엽고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자, 나이, 노동력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남자 어른만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와서 청할 때 다른 형제들은 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차려입고 사무엘 앞에 갔는데도 다윗은 부름을 받지 못하고 혼자 들판에서 양을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는 표현은 용모와 키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아직 소년 아이라는 뜻입니다. 막내라는 단어 자체가 어리다. 귀하지 않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용모와 키를 기준으로 보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기름을 부어 세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용모와 키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중심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외모만 보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기준이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기준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특징을 새로운 왕의 조건과 기준으로 제시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다윗에게 드러난 특징이 어리고 약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리고 약함이 새로운 왕의 기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린 다윗을 택하시고 세우신 것은, 나이와 외형과 용모와 키가 대변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조건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과 기준은 외모만 볼 수 있는 우리의 기준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 때 이 세상이 말하는 능력과 조건, 자격, 스펙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원리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사울 대신 새로운 왕으로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던 하나님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다윗보다 더 낮고 천한 자리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세상은 주님의 외모를 보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버렸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힘과 권세와 지위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린 그 돌을 모퉁이 돌로 삼아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집, 교회를 세웠고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불쌍히 여기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그런 은혜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여기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과 용모와 키, 학력과 재산, 권력과 힘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알아주심은 용모와 키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조차도 우리는 외형만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