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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27-32, 세리 레위를 부르심, 24.6.2, 박홍섭 목사
누가복음의 핵심 구절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라는 19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누가는 그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되 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많은 기록과 보고들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 중에 지금 우리가 보는 5장은 갈릴리 사역의 일부분이고 오늘 본문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가버나움에서 한 중풍 병자의 치유를 통해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심을 밝힌 예수님은 이어서 레위를 부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의 시각으로 보면 주님이 레위를 부르신 것은 그가 세관에 앉으신 것을 우연히 보시고 즉흥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부르신 것처럼 레위도 그를 부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관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여기에 마태라는 별명을 가진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 한마디만 하셨는지, 아니면 여러 말로 권하셨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또 레위가 그 전에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 직, 간접적으로 들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자세한 상황을 밝히지 않았어도 이미 레위가 예수님이 전했던 말씀을 들었던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기쁨으로 결단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세리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릅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 있었던 세리였습니다(27). 세리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금공무원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도 세금공무원이 별로 인식이 안 좋은 시절이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리’는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가장 악질적인 죄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로마는 유대 지역의 세금을 대리수납제도로 징수했습니다. 대리수납이란 입찰을 통해 가장 많은 금액을 거둬서 세금으로 내겠다는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위임하는 제도입니다. 이렇게 입찰을 통해 세금징수권을 따낸 세리들은 악착같이 온갖 종류의 세금을 백성들에게 거두어서 계약한 액수를 로마에 내고 남은 것은 다 자신들이 차지했습니다. 당시 문헌에 의하면 인두세, 토지세, 소득세, 마차 바퀴 사용료, 도로 사용료 등 각종 사용료, 구매세, 수출입세, 특정상품보유세 등 온갖 종류의 세금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거두는지에 따라서 자신의 이익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세금을 징수하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세리였고 그 결과 이들은 면허증을 발부받은 강도라고 불렸습니다. 백성들은 이들을 동족들의 피를 착취하는 매국노와 배신자로 취급했고, 이방인보다 더 더러운 죄인으로 경멸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세리가 회개하는 것을 불가능하며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규정했을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일반세를 받는 세리보다 세관에 앉아 통관세를 매기는 세리들은 더 악랄한 세리로 비난받았으니 레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중에 가장 악랄한 죄인이었습니다.
지금 레위는 그런 사람들의 미움과 멸시와 손가락질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눈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 보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했던 인생이 세리 레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관에 앉아서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사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 보셨다고 할 때 단어는 자세히 본다는 의미로 마 9:36에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기진함이라”라고 하신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을 자세하고 불쌍히 보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경멸의 눈초리로 보았지만, 주님은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택하여 주신 그 영혼이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으로 살고 있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세관에 앉아 있는 그를 불렀습니다. “나를 따르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나를 좇으라,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는 회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레위를 부르실 때는 이제 그 고단하고 처절한 몸부림을 그만두고 돌이켜 나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는 회개의 요청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그냥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지 않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함으로 회개를 강조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돌이킴과 회개가 포함된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능력의 말씀으로, 큰 자비와 긍휼의 눈길로 레위를 불러주셨을 때 레위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입니다. 그토록 사회적인 비난과 사람들의 지탄과 욕과 손가락질을 감수하고 돈을 좇던 이 사람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을 수 있었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의 능력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음성과 눈으로 우리를 불러주실 때 변하지 않던 우리의 마음이 거듭나고 돌이켜져서 죄인 된 삶을 중단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걸 신학 용어로는 유효한 부르심, 혹은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이 부르심이 있어야 우리가 중생할 수 있고 회개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르심이 먼저고 따름이 뒤입니다. 부르심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주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를 찾아오셔서 그를 보시고 불러주셨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그의 ‘꽃’이란 시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사는 것이 단지 하나의 몸짓이고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몸부림 같은 삶에 의미가 생기고 목적이 만들어져 향기로운 꽃이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빛이 되고 싶다.
사람의 부름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 레위를 불렀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그의 삶이 그렇게 허망한 몸부림으로 끝나지 않도록 그를 불러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그의 삶을 꽃이 될 수 있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사람이 신을 부르고 신을 찾아가는 형태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갈대아 우르에 사는 그를 하나님이 불러주셔서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80살에 광야에서 양치는 그를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인 그를 하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라는 별명을 가진 세리 레위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어서 마태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까? 오직 부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의미이며 목적이어서 세관에 앉아 몸부림을 치는 그를 예수님이 불쌍히 보시고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인종과 국경, 사상과 학식의 유무,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잃어버린 영혼인 우리를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한 적이 있습니까? 로미오가 아무리 창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노래를 불러도 쥴리엣이 창문을 열고 응답하지 않으면 둘 사이에 사랑의 꽃은 피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그 사람의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누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까? 31-32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왔노라” 스스로 자신은 문제가 있는 죄인이며 주님의 구원하심과 고쳐주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마음이 있는 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의사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병든 자를 위해서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왜 의사가 필요하겠습니까? 그처럼 예수님도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내가 그에게 꽃이 되어주고 의미가 되어주고 생명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르심에 나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그 어떤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고집하면서 거절한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원을 위한 자비로운 부르심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위한 엄중한 부르심만이 남게 됩니다. 세리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따라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 중에도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이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해서 살고 있는 분들은 겸손하게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허망한 것 중의 가장 허망한 것이 부르심을 받고도 예수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여전히 자기의 욕망과 소원을 위한 삶을 바꾸지 않고 예수를 통해 그 모든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몸부림 중에도 가장 허망한 몸부림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부추기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지 않습니다. 회개시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단지 죄 용서 받은 것에 대해 안도하며 또 다시 죄 가운데서 우리의 욕심을 향해 달려가도 좋을 안전 장치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정욕과 허망한 생각들을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 수 있도록 부르십니다. 죄와 더불어 먹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며 예수님과 함께 누리고 사는 새로운 삶을 위해 자격 없고 조건 없고 공로 없는 우리를 은혜로 부르십니다. 세리 레위가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 그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수하고라도 악착같이 모았던 돈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잔치를 왜 합니까? 기쁜 일이 있어야 합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것도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기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세관의 자리가 주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이 삶은 나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 벅차서 내 친구들, 죄인들로 정죄 받았던 나와 똑같은 세리들, 그들을 함께 초대해서 너희들도 나를 부르고 나에게 이렇게 놀라운 기쁨과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라고 간증하며 그 감격과 감동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까지 잘못된 나의 삶을 버렸을 때 얻는 기쁨! 이 기쁨은 모든 것을 움켜잡고 버둥거릴 때 얻지 못한 기쁨입니다. 역설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오는 자에게 내가 버린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찬송가 289장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오늘 우리에게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가 있으면 공부가 달라집니다. 사업의 의미와 목적도 달라집니다. 이 은혜가 있으면 장사와 직장생활이 달라집니다. 이 은혜가 있을 때 찬양하는 모습이 달라지고 기도가 달라지고 봉사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런 은혜가 주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