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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주체사상
(신17:1-20)
<신앙인의 주체사상>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주체사상하면 여러분 익숙해서 이북의 주체사상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주체라고 하는 말은 나쁜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그릇되게 사용하는 집단에 의해서 점유되어버리면서 그 단어가 애매하게도 아주 안 좋은 그런 분위기와 뉘앙스를 품게 돼서 곤욕을 치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이북사람들만이 써야 될 단어가 아니기에 우리도 한번 그 단어를 통해서 오늘 본문을 보기를 원합니다.
신앙인의 주체사상.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오늘 본문 계속해서 모세의 설교가 진행되는 가운데 우리가 읽지 않은 앞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의 생활,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느냐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흠이 있거나 어떤 악질을 앓는 피부병이 있는 그러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또 다른 신이나 아니면 다른 자연물들, 일월성신을 하나님처럼 숭배하지 말 것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돌로 쳐 죽이라고 까지 아주 참혹하게 말씀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것이 바로 송사문제에 관한 것이에요. 제사장이 있고 재판장이 있어서 그 제사장과 그 재판장에게 가서 너희는 송사를 치를 것이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갈 때에 제사장의 재판을 받고 그리고 왕이 생기게 될 경우에는 그 왕은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야 되느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또 왕이 있어야 되니까 그 왕은 도대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되느냐 하는 이야기를 오늘 해주고 있습니다.
근데 이 제사장이 되고 왕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 제사장과 왕.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넘어오면서 다 우리의 사건이 되어버렸어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 그 의미를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 스스로가 제사장이 되고 우리 스스로가 왕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 삶을 다시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제사장이 되고 왕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앞에 제사장 이야기 재판장 이야기가 나오고 왕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베드로전서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벧전2:9)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왕 같다 하는 이 말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어떤 주체적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의 주체성이리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는 거 잠깐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대인관계와 하나님관계 두 개를 크게 나눠서 생각을 해볼 수가 있어요.
우선 주체적인 관계에서 대인관계라고 하는 것은 대인관계에서 주체성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대인관계에서 주체성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특성을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만난다 라고 하는데서 주체성이 출발합니다. 대인관계에서 내가 나만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나 홀로 가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에서 주체성이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고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나에게도 하나님이 독대해주시기 때문에, 나를 하나님이 단독자로 만나주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힘입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그렇게 하나님이 만나주시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누구의 말을 들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노예 근성을 못 벗어버리고 예수님 믿음으로서 주어지고 있는 자기의 변화된 신분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가장 큰 특징이 뭐냐 하면 자꾸 하나님 뜻을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꾸 어떤 원리나 원칙, 내가 붙잡고 기댈 수 있는 그러한 원칙이나 좌우명 같은 걸 자꾸 찾아요. 우리 기도교인은 좌우명 하나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신념어린 어떤 격언 하나에 매달려 사는 살마들이 아니에요.
인생의 처세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 뭐 선생이면 선생, 사업가면 사업가, 의사면 의사, 직종에 따른 어떤 특정한 처세를 위한 어떤 원칙이나 원리를 갖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감명이 되는 말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 하나를 가지고 평생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말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내가 평생 가져야 될 원칙이라고 붙잡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원칙이 들어서고 말아버리고 맙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내 옆에 계시면서 나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도 뭐라 그러십니까? 너희가 사람들에게 잡혀갈 때에 무슨 말할지 염려하지 말아라.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너희에게 해야 될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다. 얘기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기에 주체성의 근거가 있는 것이에요. 나도 하나님과 단독으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중에서 내 삶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 만날 수 있다.
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은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들을 필요도 없고 어떠한 강박관념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좋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할 수는 있습니다. 이거 왕의 특권이에요. 그러나 누구의 말을 들얻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그 말을 듣는 것뿐이지요. 신하들의 말을 듣는 것뿐이지 신하 말을 묵살해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게 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왕같다 하는 것입니다. 이 지구 위에서는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체성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이외에는 그 누구의 말도 이 세상에서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여러분 그럴 수는 있어요.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지 않습니까? 또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에게 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서 주님을 만나게 되면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니까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로 내가 들어간다.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가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이런 말도 있어요. 그러니까 몽둥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도 있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이 그럴 수는 있지마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들어야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보면 사람이 무심코 하는 말 중에도 나에게 한느 말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끼리 대화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에게 종속되고 굴속되고 예속된 상태에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왕 같은 사람들이에요. 여기에 주체성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 믿을 때 특별히 저같은 목사님들이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구체적인 삶의 답변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문제가 있어서 왔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문제가 있어서 상담을 하러 온 교인이 있다 그러면 그 교인에게 목사로서 해야 될 것은 지금 돈 문제나 경제 문제 때문에 사로잡힌 마음을 먼저 보고 그 마음이 돈 문제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해방되게 해주는 게 목사가 돕는 일입니다.
해방돼서 뭐 하느냐? 하나님을 만나게 해드르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나게 돕는 일이에요. 그 다음 돈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당사자가 직접 교통을 할 수 있도록 열어준 다음에는 뒤로 물러나 앉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돈 문제 자기의 경제문제를 하나님과 둘이서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게 목사지, 그 돈 문제 갖고 온 것에 대해서 곧바로 얘기를 해버립니다. 이건 이렇게 처리해라 저건 저렇게 처리해라... 이거는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것이 반복되다 보면 어떻게 되느냐? 목사님들이 그야말로 교인들 앞에서 왕으로 군림하게 돼버려요. 내가 왕이라고 하는 것은 군림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의 말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말이 최우선으로 될 때 그런 마음이 있을 때 그럴 때 하나님은 모든 걸 통해서 말할 수 있고 내가 그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알아듣는 것이지 누구를 빤히 바라보고 기다리면서 저 사람이 나한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으면 나는 못듣는다 이런 마음가짐 가지면 바른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윗이 왕 시절에 나단 선지자에게 꾸중을 듣지 않아요?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지요. 이것이 이제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과 직접 교류를 하게 되고, 다윗도 하나님과 직접 교류를 했어요. 하면서도 나단 선지자가 얘기할 때 그렇게 듣습니다. 지금 나단 선지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나단 선지자가 말해야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복하고 있었던 게 습관이 돼 있던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말할 때 왕으로서 단칼에 쓸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걸 하나남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거 어떻게 이런 교통이 시작되느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 세상 사랑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마음을 갖자마자 세상에 대한 모든 종속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하나님과의 교통의 관계가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말입니다 백합화 하나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흔들리는 나무 잎새를 하나를 보면서도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자, 신앙인의 주체성은 그러면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오늘 왕이 율법을 복사해가지고 늘 옆에 두고 평생을 그 율법을 떼지말고 그 율법을 계속해서 읽으라고 얘기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에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주체적 의견이 표현된 것이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기의 주체성을 포기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율법을 지킨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늘 떨어지지 않게 하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체성 앞에서 내 주체성을 반납하고 포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신앙인의 주체사상의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에요.
대인관계에서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가의 관계에서만 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나간다.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한님의 의견과 하나님의 주체적인 섭리 앞에서 내 주체성을 반납한다, 내 주체성을 포기한다, 내 주체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이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는 왕 처럼 아무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하게 내 주체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이것이 신앙인의 주체사상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사로서 목회하는 현장 속에 적용해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타나느냐? 여러분, 이 신앙인의 주체적인 마음을 생활 속에 응용해나갈 때, 저는 목사니까 목회현장에 응용해나가고 여러분은 사업하면 사업장에 장사하시는 분은 장사하시는 그 현장에서 이걸 적용해나가요. 자식을 기르는 엄마면 엄마로서 이런 주체적 어떤 신앙인의 주체성을 어떻게 실현시켜나가느냐? 주체성의 핵심은 뭐냐?
주체적 행복이에요. 사람들에게 종속되고 예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주체성을 포기하게 될 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것으로 인정하게 될 때 나타나는 게 행복입니다.
이 주체적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갈 때 신앙인의 주체사상의 핵심은 무엇이냐?
주체적 행복이라는 겁니다. 행복감인데 그 행복감의 내용이 뭐냐? 하나님으로 행복해지는 거예요. 어떤 일 앞에서 그 일을 관계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 행복한 거 이게 주체적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적용합니다. 그럼 목사가 목회현장에 적용할 때 어떻게 적용하느냐?
먼저 목사로서 불행해져요. 왜 불행해지느냐? 부흥이 안 될 때 불행해집니다. 장로님들과 티격태격할 때 불행해집니다. 교회에 사람 수가 안 늘어나는 거예요. 그럼 불행해져요.
이건 뭡니까? 예속되어져 있는 것이에요. 주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주체적 행복을 모르는 것이에요.
주체적 행복이라는 것은 목회가 안 되더라도 하나님은 안 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근데 왜 하나님이 안 되는 법이 없는데 그 안 되는 것이 없는 하나님으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고 안 되는 목회를 가지고 불행해하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으로 주체적 행복을 이룬 다음에 목회현장에 나오는 게 목회자이지 목회가 안 된다고 불행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거꾸로 나와서 기도하고 울고불고 하는 게 목회자입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자녀를 기르는 엄마다. 주체적 행복을 가지고 자녀에게 나가는 게 엄마지, 자녀의 일이 안 된다고 해서 자녀에게 예속되어 있으면서 자녀의 일이 안 되어가지고 불행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와서 울고불고 하는 게 이게 신앙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주체적 행복은 어떨 때 생기느냐?
옆에 있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속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수직적으로 세워갈 때 행복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이 수평선 상에 모든 관계를 먼저 끊어냅니다. 그리고 주체적 행복을 찾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행복을 찾아요. 이게 주체적 행복이고 이 주체적 행복감을 갖고 이제 옆으로 나가는 겁니다.
이럴 때 이런 위험성이 있어요. 주체성과 주관성이 혼동이 되어버릴 수가 있어요.
주관적으로 빠져버릴 때 성경연구 같은 거 여러분 큐티가 위험하다고 하는 거 제가 왜 자꾸 큐티가 위험하다고 하냐면 이제 대학입시전형이 다가오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이런 대학입시생을 둔 엄마들한테는 성경에서 나오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들리느냐 하면 대학입시를 어떻게 해서든지 통과하게 되는 걸 형통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근데 하나님의 뜻에서 형통이라는 것은 천국까지 갈 수 있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자녀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과정이 형통인 것이기 때문에 천국으로 갈만한 자식이 되려면 대학을 못 들어가는 것이 형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근데 큐티를 하게 되면 내가 지금 처한 주관적인 입장에서 성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대빵 위험한 거예요.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정말 내가 결론을 내놓고 형통이다. 대학입학을 하는 게 형통이다 라고 결론을 내놓고 성경을 보게 됩니다. 이게 뭐라구요? 아전인수다 이겁니다. 결론을 내놓고 그 결론에 맞춰서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거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지금 우리 아침 홈채플을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끊임없이 내 주체성을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겁니다. 왜 자꾸 사람에게 말을 들으려고 그래요? 사람에게 상담하고 사람에게 말을 듣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나가는 거. 왜? 내가 제사장이니까. 또 왕같은 자이니까. 내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됩니까?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것 이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을 위해서 율법이 존재하는 거예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거예요.
기준에 어긋난다. 예를 들어서 도둑질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도둑질하라고 시켰다. 내가 아무 말도 안 듣느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도둑질하라고 시켰다. 이거는 마귀가 들려준 거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율법을 통해서 내 주관적인 입장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들을 잘라낼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율법으로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못가요.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 주체성을 죽이면서 하나님을 만나요. 그러면 주체적 행복감이 거기서 생기는 거예요. 주체적 행복감이 생기면 그 하나님과의 행복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들려주시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나가서 행하며 사는 거예요. 그럴 때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이 이 율법적 십계명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점을 우리가 염려하고 조심하기만 한다면 그 다음에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내 주체성을 반납하고, 주체성이 뭐예요? 여러분? 문제가 있고 일이 있을 때마다 아, 이거는 잘 됐다 잘못됐다는 판단부터 주체적 입장이 되는 거거든요? 잘 됐다 잘못됐다 다 없애버리고 내 주체가 죽었다. 주체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입니다.
다 죽었다 생각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날 때 주체적 행복감이 생긴다.
돈 때문에 행복한 것은 그건 종속된 행복이다. 자녀의 일이 잘 돼서 행복한 것은 종속된 행복이고 노예의 행복이다. 남편이 어떻게 해주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노예의 행복이다. 오직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거,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의 영을 내가 체험하므로서 느끼는 그 행복만이 주체적 행복이다. 주체적 행복감을 갖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셔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두 가지 단어만 생각하세요.
주체적 행복과 노예적 행복, 예속된 행복.
예속된 행복은 이 세상 일이 잘 돼야 비로소 기쁜 거 예속된 행복감이고, 주체적 행복은 하나님 때문에 행복 한 거 이 주체적 행복감이 신앙인의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누구의 말을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지 마세요.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왜? 내가 지금 마음이 또 돈에 붙잡혀 있고 건강에 붙잡혀 있고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못 만나니까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계속 전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 만나게 해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체적 행복감을 회복하고 그리고 나가서 세상을 살도록 돕는 거 아것이 또 아침 홈채플의 목적 아니겠습니까? (2007.10.11)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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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씀=영=생명. 이 길은 외길, 하나의 길입니다. 강단에서 던져지는 말씀에 대한 적용, 거짓된 복음 정말 진저리쳐집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갖게 하옵소서.. .
곧 어머님께서 재 입원하시겠네요... 부족하지만 함께 기도하오니 힘을 내세요^^ 늘 님의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