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시인, 평론가, 중앙대 국문과 문학박사, 홍익대 대전대 호서대 등 외래교수 역임, 《동서문학》 신인상 ’94 등단,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문학과지성사, ‘96), 평론집 시창작론집 등 6권 출간, 《기독교문학가협회》 편집주간., 2023 심산재단 시문학상, 이천문인협회 회장
콘크리트 키드
벽에서 향기가 난다
향기마다 바람에 실려
별밭으로 내려간다
어머니의 고향같은 향기
내가 실려 갈 어느 바다 같은 향기
내 살이 콘크리트 향을 풍긴다
오래도록 콘크리트 속에 살아
콘크리트에 담긴 것이 내 생각이며
내 생각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반듯한 길을 간다
하여, 매끈한 벽이 무너질 리 없다
벽을 닮은 내가 무너질 리 없다
백년을 가도 단단한 콘크리트를
무엇에 비길 수도 없다
하여, 내 인생은 콘크리트를 소망한다
백년이 가도 단단한 살을 소망한다
옹고집 계보학
아직도 붓을 들어 쓰고 있다는
팔순 아버지의 뿌리 깊은 족보 대하록
책상 위에 펼쳐진 흐린 정신을 쓸면서
날마다 쓰고 지우는 글씨들 난삽하네
옹고집 훈장님 아들 가방꼬리가 짧아
노상에서 노상 삽질을 했지
뼈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먹물을 찍어
동몽선습 천자문을 적었지
바람결에 소학이 팔십고개 언덕까지 따라와
한지(韓紙)에 펼치는 청정한 소리
죽기까지 한 삽의 상투를 틀어
한 치도 굽히지 않던 아버님 소리
한 올의 머리카락도 조상으로 빗어 올리는
옹고집 머릿결이 손수 책을 매고
외우는 경전, 우주에 낭낭하다
별시래기
시래기가 품은 별이 바스락거린다
시래기가 맞은 눈이 젖은 채 뽀드득거린다
별을 품고 살아온 만큼이나 시래기는 서걱서걱
시래기도 무게를 단다
빨랫줄에 걸려 얼어붙었던 만큼
바람에 흔들리며 날아가 버린 만큼
가난한 무게가 달린다
바람을 치우다가
별을 품어버린 시래기를
맑은 물에 담가 큼직하게 무를 썰고
고등어를 넣어 그가 안고 있는 바람을 끓인다
하얀 뭇별이 함께 올라오고
시래기는 바람소리를 낸다
살랑 부는 바람이 한 쪽 볼에
뜨겁게 긴장을 불러온다
입 안에서 별이 벙글거린다
그대, 내 슬픔을 볼 수 없으리
그대 내 슬픔에 발 담그려하여
심장에 더운 피 흐르고 오늘 살이 붉다
그러나 그대, 결코
내 슬픔을 볼 수 없으리
내 슬픔을 보려면
백 개의 계곡에 함정에 빠진 백골이
붉은 혀로 타오르는 심장의 늪을 지나
하늘거리는 섬모의 숲을 지나
지질과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불쾌한 엽기를 폭포같이 뚝뚝 떨어뜨리는
허파의 숨구멍을 무수히 지나
오욕으로 물들이는 효소 들이마시며
소화액이 영롱하게 보석처럼 반짝거릴 때
그때, 만개한 슬픔을 볼 수 있으리
백일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백안이 되어
내 안에 돋친 검은 가시를 볼 수 있으리
이천에서 산다는 것은
김신영
도시의 번잡함을 벗어버리고 이천에서 산다는 것은, 또 이천에서 매끼 쌀밥에 나물 얹어 먹는 일이기도 하다. 손님이 올 때마다 이천 쌀밥을 대접한다. 이천은 쌀밥집도 부지기수라 어디로든 발 닿는 데로 간다.
이천의 밥집은 예약을 잘 안 받는다. 예약이 안 된다. 이유인 즉슨, 노쇼가 너무 많은 까닭이다. 이천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물류가 발달한 도시다. 물론 도자기나 쌀밥, 하이닉스 등도 유명하나 물류가 기반이 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유독 노쇼가 많다. 차가 밀리는 것은 다반사요, 의도치 않게 노쇼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에 직접 와서 대기하는 예약만 받는다. 임금님처럼 멋지게 한상을 잘 차린 쌀밥이 드시고 싶으면 오시라. 현지인의 눈매로 엄선한 쌀밥을 대접해 드리겠다.
그중 제일 많이 가는 곳이 전국에서도 입소문이 난 이진상회, 서이천 나들목 바로 앞에 있다. 그다음으로 많이 모시고 가는 집이 강민주의 들밥집이다. 이 집은 이진상회와 친척이다. 호운이라는 쌀밥집도 있다. 모두 대기 예약만 가능한 집이다. 요리사 장인인 셰프가 운영하는 쌀밥집인 임금님 쌀밥집도 있다. 이곳도 대기가 많다.
이제 이천에서 기반을 잡고 작가를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이천문화재단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올해 2024년 1월에 이천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문인협회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학에 외래교수로 출강하다 생업인 학원을 설봉중앞에서 연지도 5년이 넘었고, 여성실학 연구소를 열어 여성과사회적 약자를 위한 글을 쓰고 있다.
은하의 이녁에 나와
맑은 여울에 코를 빠뜨리고
애가 끓는 만큼
긴 회랑에 앉아 깊은 한기를 뿜는다
적막을 뚫고 끓어대는 저편
도시의 자글대는 소리 어지러이 들리네
정적이 대지에 기둥을 심고
여기는 가느다랗게 한 줄 별빛을 긋고
지극한 시구 하나 옹립하려
아수라와 악수를 하였나
가슴 아프게 끓어 대는 시를 안고
와락 넘쳐 버린 허랑 세월이었나
그도 아니면, 시에 깊은 키스를 하고
산 입에 거미줄을 치고 있나
우주의 수레에 끼어
시구를 옹립하는 일
해밝은 빛만큼
이다지 끓어올라 반짝거린다
-필자의 시 <詩의 옹립(擁立)>
김선주 평론가는 이 시를 아래와 같이 기술한 바 있다.
모처럼 “옹립(擁立)”이란 시어를 만났다. 시인 김신영은 “소리의 옹립”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시의 옹립”을 갈망한다. 아니, 시의 옹립은 곧 시인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소리 ‘영혼의 울림’ 그 자체다. 그것은 폐부를 찌르는 단말마의 외침이고 피와 땀의 결정체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내게로 왔다” 의 시구처럼 매 순간 ‘시어’를 제왕처럼 소중히 받드는 마음이 느껴진다. 매일 밤,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긴다.
나는 아늑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산골짜기 도피처로 옮겨도 “저편, 도시의 지글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서울의 변방이던 관악산 밑에 웅크리고 있다가 이곳 이천 설봉공원 밑에 터를 잡은 지도 13년차다. 자글대는 소리 가득한 대도시를 떠나와 이천에서 쌀밥을 먹으면서 시와 글을 줍고 눈물을 훔치며 순이의 착한 심장을 다독이며 살고있다.
첫댓글 원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