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티 벨"(Charlotte I W Bell : Lottie Bell)선교사는 호남 선교의 개척자 "유진 벨"(Bell Eugene : 裵裕祉) 선교사의 아내다.
"로티 벨"은 1867년 5월,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Memphis)의 장로교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버지니아의 메리볼드윈 대학(Mary Baldwin College)에서 공부했고,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유진 벨"과 1894년 결혼했으며, 결혼 이듬해 한국에 들어왔다.
결혼 전에 그들은 이미 미국 남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이들은 1892년 파견된 7인의 선교사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나라를 찾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로티 벨" 선교사는 내한 직후 첫아들 "헨리"를 서울에서 낳았고, 1899년에는 첫딸 "샬롯"을 목포에서 출산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연이어 출산하는 가운데 선교사역에 동참하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로티 벨" 선교사는 호남 지역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유진 벨" 선교사를 도와 헌신했으며, 한국에 온 지 6년만인 1901년 4월, 별세했다.
소천 당시 남편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를 떠나 전주 지역에서 선교 여행 중이었으며,
급보를 듣고 집에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뒤였다.
"로티 벨" 선교사는 우리나라에서 숨진 최초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언더우드" 선교사 등 여러 동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1903년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교인들에 의해 목포 "양동교회"에 "로티 벨 기념예배당"이 건립되었다.
(현재 "양동교회"에 있는 석조건물은 1911년 준공된 건물로서 "로티벨기념예배당"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양화진에 있는 묘비는 2002년 부활절에 새로 건립되었으며,
원래의 묘비는 순천 기독교 진료소 마당으로 옮겨졌다.
"유진 벨"(Bell, Eugene 裵裕祉)
"유진 벨" 선교사는 1868년 4월, 미국 켄터키 주 스콧(Scott)에서 태어나 리치몬드의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과 루이즈빌 신학교(Louisville Presbyterian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고, 그해 6월에 은사의 딸인 "로티"(Lottie)와 결혼했다.
"유진 벨"은 신학교 졸업 전인 1893년 11월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결혼과 "청일전쟁"으로 인해 출발이 지연되어 1895년 4월에 내한했다.
당시 조선에는 미국 남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레이놀즈" 등 7인이 1892년 내한하여 전주 등 전라북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유진 벨"은 미국 남장로교가 한국에 두 번째로 파송한 선교사인 셈이다.
"유진 벨" 선교사는 전라남도 지역 선교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897년부터 전라남도 나주에서 첫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는
결국 1898년 초부터 새 개항지로 발전하고 있는 목포로 선교지를 옮겼고,
그해 5월, 목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양동교회를 설립했다.
그가 목포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공부방은 후일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로 발전했다.
이처럼 목포를 중심으로 선교에 힘쓰던 그는 갑작스러운 아내의 소천(1901년)으로
두 자녀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02년 12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약 2년 동안
목포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했고, 이 시기에 "영흥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3대째 이어진 한국 선교.
그는 1904년 봄, 미국 남장로교 광주 선교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후 광주를 중심으로 교육 및 의료 중심의 선교사역을 펼쳤다.
광주에서 "유진 벨" 선교사의 사역은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광주기독병원과 "수피아 여고", "숭일학교" 등 수많은 교육기관과 병원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또 광주 제일교회, 양림교회 등 1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등 전라도 지역에 기독교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또 그는 조선장로교 전라노회 노회장과 조선예수교장로회 3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유진 벨" 선교사는 개인적인 시련을 많이 겪었다.
첫 아내를 병으로 잃었고, 1919년 재혼한 아내 "마거리트 벨"(Margaret Bell) 선교사마저
수원 인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당했으며,
본인 역시 과로에 의한 건강악화로 1925년 9월 순직했다.
그 광주 양림동산에 재혼한 "마거리트 벨" 선교사와 함께 묻혔다.
그의 선교사역은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큰딸 "샬롯 벨"은 남편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선교사와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1940년까지 부부 선교사로 일했으며,
해방 이후 한국을 다시 찾아 1960년까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다.
또 "샬롯 벨"과 "린튼" 선교사의 두 아들, "휴 린튼"과 "드와이트 린튼"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유진벨재단"을 설립해 북한 지역 의료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