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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17
주간조선 2012년 12월 3[2234]김용규 철학자·‘철학카페’ 시리즈 저자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적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가가 되지 못하는가
기독교인이 모두 도덕적이지는 않다. 기독교 국가가 모두 모범국가도 아니다 |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자신의 철학과 인문학으로 풀어낸다. 주간조선은 그의 답을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라는 제목 아래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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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의 총본산인 바티칸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는 알려진 대로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신자이다.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물질적·정신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012년 IMF(국제통화기금) 통계에 의하면 이탈리아 국민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3만3942달러이고, 2002년 국제형사경찰기구(ICPO)의 보고에 따르면 범죄율은 3.75%이다. 같은 통계에서 국민의 84%가 신도와 불교도인 일본은 1인당 GDP가 4만6972달러이고 범죄율은 2.30%이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 22.8%가 불교도이고 10.9%가 가톨릭신자이며 18.3%가 프로테스탄트인 한국은 1인당 GDP가 2만3679달러이고 범죄율이 1.66%이다. 여기에서 하나 묻자! 당신은 종교(특히 기독교)가 국가의 경제적·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위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마치 그런 것처럼 그 둘을 연관시켜 물었다. 요점은 기독교 국가에 범죄가 왜 그리 많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회장뿐 아니다. ‘우주에는 신이 없다’를 쓴 데이비드 밀스도 그의 책에서 “미국은 분명 이 지구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국가입니다. 동시에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범죄율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국민의 10% 미만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유럽 국가의 범죄율은 미국에 비해 지극히 미미합니다”라고 종교와 국가의 범죄율을 당연한 듯이 연관시켜 종교를 비난했다. 그런데 밀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통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트가 52%이고 가톨릭이 24%인 미국의 범죄율은 4.16%(2002년·ICPO)로 다른 유럽 국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다. 강력범죄율만 더 높을 뿐이다. 예컨대 가톨릭이 85% 전후인 프랑스의 범죄율은 6.67%이고, 프로테스탄트가 87%인 스웨덴의 범죄율은 13.35%나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특히 기독교)와 국가의 경제·사회적 상황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범죄율을 낮추는가 당신도 알다시피 중세에는 가톨릭교회가 정치와 종교 일치를 당연시하는 성직주의(clericalism)를 통해 교황과 사제들의 권리를 강화하여 국가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정교분리가 일반화된 근대에는 프로테스탄트가―막스 베버(1864~1920)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천착한 대로―소명의식과 근면, 성실, 절제, 시간엄수 같은 노동의 윤리를 통해 국가의 경제·사회적 상황에 무시 못할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와 국가의 경제적·사회적 상황 사이에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어 보인다. 통계적으로만 보아도 그렇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부터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해보자.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 가운데서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가 도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가르침들이 상당 부분 도덕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십계명만 보더라도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와 같은 도덕적 명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막연히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나 국가가 부유하고 범죄율이 낮을 거라고 여긴다. 이 회장의 질문이나 밀스의 불평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다시 통계를 보자.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신자거나 프로테스탄트인 서유럽의 국가들은 부유하다. 하지만 국민이 거의 가톨릭교도인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예컨대 국민 모두가 기독교신자인 룩셈부르크(가톨릭 87%, 프로테스탄트 13%)는 1인당 GDP가 10만6958달러로 세계 1위이다. 하지만 역시 전 국민이 기독교신자인 볼리비아(가톨릭 95%, 프로테스탄트 5%)는 1인당 GDP가 2492달러밖에 되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속한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 90% 이상이 루터 프로테스탄트인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범죄율이 10% 전후인 반면, 역시 90% 이상의 국민이 이슬람이거나 불교도인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범죄율은 1% 미만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독교를 믿는다고 국가가 부유해지고 사회가 안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지 않은가? 국가가 부유해지고 사회가 안정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종교 때문이 아니고 정치·경제·사회와 같은 다른 요인들 때문인 것 같지 않은가? 만일 당신이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면 들려주고 싶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2007년 1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교황이 다스리는 바티칸 시국(市國)은 당연히 국민 전부가 가톨릭신자이고, 전 세계 가톨릭신자들이 흠모하는 모범국가다. 이 나라가 국민 1인당 범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로 밝혀졌다. 바티칸 검찰총장인 니콜라 피카르디는 교황청 법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2006년에 바티칸의 국민 1인당 범죄율이 이웃 이탈리아보다 20배 이상 높다고 지적하면서, 바티칸에서 가장 빈번히 저질러진 범죄는 도둑질, 뇌물, 사기, 경찰과 공무원들에 대한 모욕의 순이라고 공개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마땅히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왜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도덕적이지 않을까? 호주 출신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도덕성에는 왜 종교가 필요 없을까’라는 글에서 이에 연관된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했다. 그는 “얕은 웅덩이에 어린애가 빠져 허둥대고 있는데, 근처에는 당신밖에 없다. 아이를 끌어올리면 그 아이는 살아남겠지만 당신의 바지를 버린다. 이 아이를 끌어올리는 것은 ( )”와 같은 도덕적 딜레마 문제 3개를 만들어 웹사이트에 올렸다. 그 다음 사람들에게 ‘의무적이다’ ‘허용될 수 있다’ ‘금지된다’ 가운데 하나를 괄호 안에 적어 넣도록 했다. 그랬더니 전 세계 참가자 1500명이 거의 같은 대답을 했다. 위에 소개한 문제에 대해서는 참가자의 97%가―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가리지 않고―‘의무적이다’라고 응답했다. 싱어는 이 결과를 도덕성과 종교는 무관하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만일 종교가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답이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다. 싱어는 또 최근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뇌과학에서 실행한 실험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들었다. 자기공명장치(MRA)로 촬영해보면 피실험자들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할 때 뇌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활성화되었다가 갈등이 해소되고 나면 진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을 촬영한 뇌영상을 근거로 도덕적 판단이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내려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우리가 도덕적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진화를 통해 길러진 직관이라는 뜻이다. 어떤가? 그럴 듯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 신학이 내놓은 답변을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더 총괄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인간론과 구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성이냐, 도덕성이냐
기독교 신학 안에는 이 종교의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인 구원을 이루는 두 개의 주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하나는 ‘의롭다 함’이라는 의미의 칭의(justification)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하게 됨’이라는 뜻의 성화(santification)다. 칭의는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이라고도 한다. 성화는 세속됨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의미한다. 요컨대 성화는 악인이 선인으로 된다는 의미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를 “신과의 화해”로, 그리고 성화를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 그래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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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교황청 앞 광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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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가 죄와 의의 문제에 관련된 구원의 방법이라고 하면, 성화는 선과 악의 문제와 연관된 구원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칭의는 종교성을 부여하는 사역이고, 성화는 도덕성을 신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칭의와 성화의 이 같은 구분을 ‘기독교인들은 왜 도덕적이지 않을까’ 하는 우리의 테마와 연관시켜보면 매우 흥미롭다. 다음과 같은 의문문들이 자연스레 얻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왜 칭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화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왜 죄 사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왜 신과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왜 종교성은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이 신장되지 않을까? 그렇다! 바로 이것이 위에서 본 통계들에 나타난 기독교인들의 실상이자 그들이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받는 이유이다. 그런데 과연 왜 그럴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신에게서 돌아선 죄를 사해주는 칭의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단 한 번’에 일어난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대로 죄가 신에게서 세상으로의 ‘단 한 번 돌아섬’이듯이, 죄사함도 역시 세상에서 신에게로의 ‘단 한 번 돌아섬’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 없이”, 곧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진다. 바울이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로마서 3:28)라고 교훈했듯이, 인간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도덕적 선행을 했기 때문에, 또는 신비적 경험 내지 수련 때문에, 다시 말해 뭔가 의롭다고 할 만하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받는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기독교인을 “항상 의인이면서 항상 죄인”이라고 규정한 것이 바로 그래서다. 이것이 칭의에 들어 있는 역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역설 안에서 신의 사랑과 은총이 비로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는 신의 입장에서 사랑이자 인간의 입장에서 은혜다. 이때 의롭다 함을 받는 자의 역할은 단지 이 ‘믿을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뿐이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납하는 신의 사랑과 은혜를 용납하는 용기가 믿음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로마서 5:1)라고 표현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가 나왔으며,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고 외친 종교개혁의 구호가 탄생했다. 하지만 성화는 다르다.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성화는 죄사함과 함께 ‘동시에’ 시작된다.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탐욕을 버리고 신을 향해 살면서 거룩하게 되는 일은 전 생애를 두고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에 의해서 ‘단 한 번’에 의인이 되지만 ‘단 한 번’에 온전한 선인이 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사랑과 은혜로 ‘단 한 번’에 신과 화해하지만 ‘단 한 번’에 온전하게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부패의 잔재가 여전하여, 영혼과 육체의 전쟁이 계속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들은 왜 도덕적이지 않을까 하는 세간의 질문에 대한 일차적 답변이다. 차제에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도 하자. 기독교인들이 모두 도덕적이지는 않다. 기독교 국가들이 모두 모범국가는 아니다. 성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교리는 성화에 있어 인간의 역할과 책임으로 연결된다. 성화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신의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사도 베드로가 “오직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베드로후서 3:18)라고 교훈한 것이나, 바울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느님(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린도후서 7:1)라고 가르치며 성화를 위한 신자들의 노력을 강조한 것이 그래서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신학적 논란이 있다. 성화가 신의 사역임과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신과 인간이 공동으로 일한다는 뜻인가? 50 대 50으로, 아니면 99 대 1로 협력해서 일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성화는 100% 신의 사역이고 동시에 100% 인간의 일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영감(gratia inspirationis)’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답했다. 신이 은총의 영감을 통해 “우리들의 그릇된 욕구 대신에 선한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를 돕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지의 영감’이라고도 부르는 이 은총은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지만 이것은 명령이나 강압이 아니고 ‘부드러운 강요’로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의 의지와 일치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그가 우리 안에 일하심으로써 감화를 시작하시기에 우리는 선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의지를 가질 때 우리와 함께 일하심으로써 그것을 완성하신다”라고 표현했다. 때문에 성화는 신의 입장에서는 온전히 신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온전히 자유의지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규정한 ‘신앙의 빛 안에서 협력(cooperation)’이라는 개념으로서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신인협력설’의 근간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반발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성화도 칭의처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사랑과 은혜로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도 신학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입장과 주장이 있었고 지금도 논란 중이다. 하지만 그 같은 프로테스탄트들의 주장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와 교회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당시 가톨릭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교리란 언제나 직면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재조명되고 재진술되면서 균형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성화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가진 장점은 구원에 있어 인간의 책임을 인정하고 ‘구원의 제도’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할애한 데에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구원에 있어 신의 사랑과 은혜만을 강조한 나머지 구원받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소홀히 하는 데에 있다. 그 결과 신자들이 얻는 심리적 위안과 신의 사랑과 은혜는 극대화되었지만 신자의 비도덕적 행위에 관한 억제력은 현저히 삭감되었다. 오늘날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로마서 3:28)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반기지만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야고보서 2:24)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꺼린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은 왜 도덕적이지 않을까 하는 세간의 의문에 대한 또 하나의 답변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죄사함을 받은 자는 ‘선의지의 영감’에 의해 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악이 죄의 열매이듯, 선이 구원의 열매다. 믿음이 선한 행위를 낳고 선한 행위가 믿음을 키운다. 이 같은 구도에서는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함은 대립하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알고 보면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도 사실상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가 구원에 있어서 신의 사랑과 은혜만을 주장한다면,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교회가 끼어들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되 분리하지 말고’ 균형 있게 가르쳐야 한다. 교회가 구원기관으로 일할 때는 구원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신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의 장소로서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교육기관으로 일할 때는 선행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 열매이자 그에 대한 책무임을 가르쳐야 한다. 내 생각은 그런데, 당신 생각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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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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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사회가 더 도덕적으로 변할까? 라는 질문에 우리는 선 듯 ‘예스’ 라 답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복음은 죄악된 영혼이 성화로 인해 그 영혼에 인간의 도덕성이 드러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세상 종말에 대한 경고는 낙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딤후3:1~5)
이런 이유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주요과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인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인가’로 분리되어있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자유와 사회정의 에 관심을 집중하는 반면 미국의 복음주의자 빌리그레함(Billy Graham) 목사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된 로잔운동(lausanne Movement)은 기독교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집중하는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세상은 복음의 전파와 관계없이 점점 더 비도덕적인 성향으로 변해갑니다. 복음의 능력은 구원받은 영혼이 사단의 권세를 대적하고 이기는 것이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며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바꾸는 것이 아니요 내가 바뀌면 세상은 바뀐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