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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거닐며
서 언
어떻게 나의 철학을 정립할 것인가. 누가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한다던 속언처럼 그냥 산다. 그렇지는 않지. 그냥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지는 것일 테지. 인간 몸 받기 어렵다는 우리네 삶에서 일찍이 부처님 만나 불법의 대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살아왔는가를 생각해 본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시다가 어느 바라문에게 농사를 지어 의식을 해결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 나 씨 뿌리는 농사의 삶을 통해 삶의 철학을 세워 보려고 한다.
우수의 해빙
겨우내 얼어붙었던 산과 땅을 풀어주는 입춘과 우수. 요람에서 받은 부모님의 사랑을 뒤로 하고 냇물이 풀려 봄의 전령을 맞으러 가듯이 그렇게 들판으로 발길을 옮긴다. 추웠던 겨울만큼이나 움추려진 어깨는 쉬 펴지지 않는다. 아직 제법 쌀쌀한 날씨이다. 논 언저리에는 아직 덜 녹은 얼음이 힘없이 남아 있다. 유난히 추웠다고 호들갑을 떨던 이들도 이제는 하나 둘 삽을 옆에 낀 채 들판으로 나오는 것이다. 부지런한 이들은 두엄을 한 짐씩 지고 총총 걸음으로 자신의 논밭으로 향한다.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우수가 지나면 이제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의 손길도 바빠진다.
농부의 바쁜 손길처럼 걸음마를 배우고 이래 래 사회 적응기를 거친 어린 아이들은 해빙기를 지나며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평생 자신의 먹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부모로부터 농사법을 배우듯이. 글자를 배우고 산식을 배우고 이것저것의 이름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맺음을 배운다. 이름하여 개념화의 시작이다. 집안의 형편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학교 경험은 조정된다. 겨우살이를 얼마나 하였느냐에 따라 해빙을 맞는 마음이 다르듯이 학습기를 거치며 단련된 정도에 따라 그들 앞에 놓인 우수와 춘분은 다르게 다가온다. 들고 나온 삽으로 물고를 트기도 하고 열기도 한다. 지난 가을 탈곡 후 남겨준 찌꺼기들로 막혀진 농로를 여는 것이다. 씨나락으로 남겨놓은 알곡들을 정리하여 염분기 있는 곳에서 알곡들의 생명을 튀워주는 작업도 한다. 한알 한알 그들이 물속에 잠겨 싹이 잘 나도록 정성껏 항아리에 담는다. 그리고 그들이 생명을 발아할 무렵 못자리를 보러 나가는 것이다.
우수를 맞는 것은 각양의 모습이다. 긴 겨울만큼이나 단단히 준비했던 이들은 즐거운 해빙이건만 춥다고 움츠리고 사랑방의 구들장을 졌던 이에게는 괴로움의 탄가일밖에. 잠자고 있던 무명은 고해의 바다에 내몬다. 아직 봄이 아니라고 외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준동하는 만물
만물을 꽁꽁 얼게 했던 추위를 견디지 못한 제대로 저장되지 못한 놈(씨앗)은 씨나락 물에서 여축 없이 떠오른다. 생명을 잉태하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경칩이 지나면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 그들은 곧이어 수없는 알들을 풀어놓는다. 수없는 갖가지 생명들이 가장 작게 하였던 몸을 키우기도 하고 나래를 펴고 울음을 토한다. 이제 봄인 것이다. 아직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들판에 살림에 도움이 될 봄나물이라도 찾으려는 바구니든 아이들의 모습이 적지 않다. 자고 있는 것은 아직도 봄을 잊고 추위 속으로 파고드는 게으름인지 모를 일이다.
연장을 정리한다. 씨나락을 준비한다. 봄나물을 뜯으러 다닌다. 길어져 가는 해만큼이나 시장기는 는다. 봄의 전령은 그렇게 우리를 깨우고 있다. 일어나라고. 일어날 놈은 일어나지를 않고 사라져야 할 게으름은 하품을 내놓는다.
따뜻한 봄의 기운이 만물을 소생하듯 봄의 하루라는 놈은 이것저것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어디다 씨를 뿌려야 할지, 지난 해 거둔 양식은 보리고개를 넘길 수 있을 것인지. 이제 학교를 보낼 나이가 된 아이의 학자금,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외지로 보내야 할 큰 아이의 문제 등 모든 문제는 없었던 게 새로 생긴 듯 복잡하기만 하다. 이렇듯 봄의 천사는 희망의 메시지만 주는 게 아니다. 녹은 얼음보다 더한 장리 빚의 이자는 더 부풀려 늘어나고.
보이는 놈에게만 봄이 온 게 아니고 숨어있던 갖가지 문제가 봄눈 녹듯 나타났으니. 긴 장탄식의 하모니는 어쩌란 말인가.
못자리와 모내기
아무리 양식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모종을 할 것은 남겨야 하는 법. 못자리를 하지 않고는 어떻게 모를 내랴. 물꼬를 터 못자리에 물을 맞춘다. 학업을 하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기본 학습에 대한 개념 정의라면 그럴 듯하겠지. 이곳저곳 들판에 못자리하는 일손이 분주하다. 그래도 올 해는 봄비가 넉넉한 편이라 천행이다. 몇 해 전 수십 년만의 겨울 가뭄은 식수까지 고갈되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몇 십 년만의 겨울 가뭄이라고 하지만 가뭄만 탓할 것은 못되었다. 몇 해 전부터 시작된 윗마을의 골프장 공사만 아니었으면 왠 만한 가뭄에도 식수를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곳이었으니까.
수 년 전부터 윗마을에서 골프장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조금만 가뭄이 들어도 논바닥이 말라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가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평생 농사만 짓던 이 마을 일대에 평소 농지 거래 값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값을 쳐 준다는 데 마음을 빼앗겨 너도 나도 농지를 외지인들에게 팔았던 것이다. 그러기가 수 년, 그 땅을 사들인 이는 모 재벌이었고, 그들은 거기에 골프장을 짓는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도청 군청 등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골프장 건설을 취소해 줄 것을 건의하고 다녔다. 공무원이나 관계기관에서는 한결같이 ‘검토해보고 답변해드리겠다’는 말로 마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는 동안 골프장 건설 회사 측은 마을의 몇몇 유지들을 만나 골프장 건설이 마을의 발전에 덕이 된다며 설득을 하며 술판을 제공했다. 그러는 사이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마을 이장이 골프장 회사 측에 향응과 위로금을 받았다느니 하는 그렇고 그런 것들이었다.(이 삽화는 박범신의 소설에서 패시티쉬한 것임)
올해는 그래도 봄비가 제법 자주 오고, 지난겨울 대설이 있었던 터라 못자리를 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쟁기와 쓰레질을 한 못자리는 가지런했다. 씨나락을 붓는 농부의 마음은 조금씩 감흥이 싹튼다. ‘그래 네놈들이 잘 자라 주어야지.’ 가진 재산도 별로 없고 배운 지식도 없는 농부에겐 농사라도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른 대책이 없는 것이다. 씨 뿌리지 않고 거두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 곱디고운 자식의 머릿결을 만지듯 못자리에 씨나락을 뿌린다. 고루고루 펴지 못하고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많거나 적으면 그 아까운 알곡들이 땅에 그냥 썩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한 달여를 낮밤 없이 못자리를 지킨다. 제법 봄햇볕이 알맞게 내려준다. 싹을 내민 놈들은 하루가 다르게 파란 잎을 보여주고 있다. 한 뺨이나 자랐을까. 어린모는 이제 혹독한 시련을 맞는다. 이제 성년이 돼 시집 장가들 때를 맞은 것처럼. 모내기철이 된 것이다. 모를 찌는 주인 아낙들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한 무더기씩 짚에 묶여져 넓은 논 이곳저곳에 나누어진다. 그리고 나란히 좌우정열된 자리에 앉는다.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 백일을 보내게 된 것이다. 자리를 찾은 놈들은 이제 경쟁하듯 하늘로 팔을 뻗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며칠이 지나자 자리를 잃은 놈들은 부유를 시작한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힘없이 노랗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모내기가 무섭게 부유하는 놈들에게 자리에 새로 모를 심는다. 흙탕물이 심하던 무논에 이제 수정같이 맑은 물이 채워진다. 모내기의 소용돌이에 집을 잃은 놈들도 이제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오월을 지나 유월의 태양은 들판을 태울 듯 거세게 햇살을 퍼붓는다. 푸르다 못해 검게 그을린 벼들은 사력을 다해 위로 향한다. 이제는 더위가 시작되었다. 고랑 사이사이로 피를 비롯 달개비나 갖가지 잡초도 지지 않는다. 돌보지 않는 그들인지라 생명력이 더욱 거세다. 누구의 도움도 원치 않는 그들의 자생력은 여타를 압도한다.
태워버릴 듯하던 햇살에 주눅들었던 이들에게 한 줄기 소낙비는 갈증이 해소됨과 동시 벼 도열병의 집을 짓는 이들에게 한줄기 광명이 된다. 한 줄기 소낙비가 이제는 장마로 변한다. 이제 그들의 시대인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논밭을 초토화시키는 제초와 병충균 박멸을 위한 농약이 등장하였다. 이제 대량살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왠 만한 놈들은 그곳에 자리 잡을 수는 없다. 독한 놈만 살아남은 약육강식의 무대, 한 여름의 전쟁터로 변한 것이다.
도고마성이라 했던가. 병이 극성하면 할수록 투약이 늘어난다. 벼 때문에 뿌려지는 약이건만 벼까지도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극심한 전쟁 속에 메뚜기와 벌레들이 무더기로 퇴출된다. 이제는 독한 놈만 남아 있는 살벌한 시대인 것이다. 온몸에 흠뻑 농약 세례를 입은 벼는 그래도 억척같이 몸을 지탱한다. 걷힐 줄 모르던 장마도 이제 한풀 꺾이고 다시 농부는 잡초를 뽑고 부지런히 논에 물을 댄다.
이제 제법 큰 키를 뽐내며 도열해 있다. 혹독한 장마와 더위, 그리고 도열병이라고 알려진 놈들과의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여름의 밭 작물을 속속 수확하게 된다. 이제 농부들에게 품삯이 쥐어지는 때인 것이다. 햇콩, 오이, 참외, 토마토 등 조금씩 밭을 차지하던 놈들을 거둬 오일장 난전 한켠에 신세를 지며 구겨진 몇 푼 돈과 바꿔 온다. 오는 길에 고등어 한 손이라도 손에 들 수 있는 이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것도 잠시 농약 값에다 농기구 수리비에도 품을 산 품값 등을 제하면 아이들 학자금은 어림도 없다. 두 달을 넘긴 무논의 수확을 기다리는 수밖에.
가을의 찬가
추석을 지나며 쌀 벼는 이제 다 자라고 열매가 익어간다. 수확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지난여름의 혹독한 열병을 이기고 견뎌온 놈들에게 더 이상 보낼 찬사가 없다. 그냥 가을 태풍이나 오지 말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알곡이 익어가면서 하나 둘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황금물결을 연출한다. 실바람이 불어도 술렁댄다. 더 이상의 장관이 어디 있을까. 나날이 들려오는 일기예보. 큰 바람이 없기를 고대한다. 9월 이후의 바람은 사실상 다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 가뜩이나 잘 익어가고 있는 벼에게는 KO펀치다. 넘어진 벼를 붙들고 한없이 흘린 눈물이 얼마였던가. 수십 년 농사밖에 모르는 농부가 흘린 눈물 말이다.
아직 찬가를 부르기에는 이르다. 큰 바람이 아니라 잔비만 와도 싹이 튼다. 무논은 벼가 쓰러지면 2~3일이 지나지 않아 채 익지도 않은 놈들은 썩고 익은 놈들은 싹을 튀우는 것이다. 그래서 농사꾼들은 곳간에 벼를 채우기 전에는 안심을 못하는 것이다.
누렇게 익을 대로 익은 벼를 거둔다. 조심스럽게 한 알이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벼를 벤다. 그리고 단을 쌓고 또 탈곡을 한다. 구슬땀쯤이야. 뭐가 두려울까. 탈곡이 끝나기도 전에 방앗간으로 실려 가는 놈들이 더 많다. 부채 상환이나 도짓돈, 학자금에다 농자금에다 갖가지 빌려 쓴 돈을 변제하기 위해 내 곳간으로 가지 못하는 놈이 적지 않다. 그래도 모처럼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가득 차는 곳간
‘그래, 갈 놈은 보내야제. 그만해도 올 해는 천행이구먼. 그래도 가뭄도 태풍도 피해주었으니까.’ 광에다 나락을 옮기며 가슴이 벅차 오른다. 지난해보다 훨씬 나은 수확에. 그나마 천행인 것을 사실이다. 지난 봄부터 진 빚을 갚기 위해 내 광에 채워보지도 못하고 탈곡하는 자리에서 토실토실하던 놈들을 내주고 났을 때의 허탈함. 그것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올 해는 풍년이었고 남들이 쉬는 틈틈이 읍내로 다니며 품을 팔았던 덕에 빚이 줄었던 것이다.
채울 것이 없는 이의 서글픔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향연의 준비도 못하고 마는 가을을 수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갚아야 할 빚을 청산하지 못한 때문인 것이다.
나눔의 기쁨
곳간이 텅 비었을 때는 늘 배가 고프다. 그러나 곳간이 차면 곳간을 바라 보기만 해도 기쁘다. 가진 것이 없으면 어찌 잔치를 벌이랴. 잔치를 벌일려면 곳간에 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기쁨도 즐거움도 나누어 줄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존경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줄 양식이 가득 찬 이는 정녕 행복한 것이다.
이제 겨울이 다가온다. 곳간의 양식은, 그들을 가난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겨울아 올 테면 오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긴 겨울밤 밤참을 먹으면 오순도순 사랑하는 식구들과 옛날이야기라도 나누면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채워야 한다. 곳간에 양식을 채우기 위해 봄부터 열심히 땀 흘린 자만이 행복을 맛볼 테니까.
우리네 삶을 바라보기에 너무나 좋은 꺼리인 한 해 농사짓기. 우리가 겪는 갖가지는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리라. 지금부터 농사꾼처럼 들판에서 본 인생의 농사를 지어보자.
우리는 나면서부터 심한 불평등을 경험한다. 어떤 집안에서 나느냐에 따라 상대적 차이는 현격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해빙은 무엇인가. 무명의 터널을 거치는 탄생과 학생기가 아닐까. 학생기도 자유의지보다는 환경에 더 많은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자유의지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에 의하였기 때문에 (業報所生) 타자를 탓할 형편이 못된다. 고해라고 하는 것이 실감난다. 좀 형편이 좋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한 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착실한 준비 기간을 가진 농부는 걱정거리가 적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감 있게 자신의 삶을 살 것이다. 그러지 못한 이는 반대의 삶에 휘둘려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답은 이미 주어졌다. 우리는 때로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등 제법 의미 있는 물음에 고민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가 아니라 어떻게 일 뿐이다. 왜 농사를 짓느냐고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무기라고 말하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의 시사는 적지 않다. 열심히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항상 그것에 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늘 변한다. 마른하늘에 천둥 친다는 말처럼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쉼 없이 변하는 자연과 같이 우리가 살아가고 숨 쉬는 유위의 세계는 항상 하는 것이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을 농사는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 제멋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발견하게 된다. 상의상관의 법칙이다. 볕이 세면 병원균도 강해진다. 바람이 불면 통풍이 되어 병을 막아주기도 한다. 스스로 제값을 가지고 있지만 작용 받는 것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기도 한다. 불확정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람과 태양과 농부의 손길과 벼의 생산성은 결코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확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마치 성불의 한 목표만을 위해서 수행하는 불자처럼 말이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바로 실재인 것이다. 풍년을 이루지 못하는 한 어떤 기쁨도, 가족의 행복도 보장받지 못한다. 바른 법대로 수행하지 않고는 일체 중생의 행복은 담보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는가. 바로 농부의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농부는 자신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 나아가서는 모두에게, 농사를 지으므로 행복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곳간에 채우지 못하면 긴 겨울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통 받아야 하듯이 나의 의지대로의 삶은 결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하고 안하고는 농부의 마음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괴롭고 싶으면 괴롭게 살면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복을 원할 것이다. 행복을 원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이 자신만을 위한다면 참된 행복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나만 부지런하면 된다고 해서 윗마을 골프장에서 흘러나오는 농약과 지하수 고갈은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누구도 연기적 존재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사고의 모순을 여기서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불교를 마음 밭을 일구는 심전농사라고 하였다. 이 농사를 제대로 짓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다. 또 파사현정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세상의 법은, 출세간 공부를 하는 우리하고는 무관하다는 생각의 한계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마음 밭을 일구어 갈 때 가져야 할 가치철학으로, 한해 농사를 비유하고 있는 졸문의 위 삽화처럼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언행은 나와 이웃을 규정하고 있는 연기적 존재이다. 둘째 결정적, 확정적인 것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연기적 존재이고 무상, 고, 무아한 존재이므로. 셋째 나만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요 전체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실재적 존재이다. 넷째 각각의 존재는 행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이끌어가는 총체적 존재이다. 다섯째 우리는 언제나 완전한 자유의지로 삶을 영위한다.
졸문의 삽화에서 제공하는 원리인데 너무나 불교적 사유구조와 일치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개념 범주는 대정대장경을 편집한 다카쿠스 준치로가 정리한 불교철학의 근본원리와도 일치하여 평소 생각을 정리하여 보았다.
이와 같은 원리는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도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일 것이다. 이러한 철학체계를 갖고 있는 불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아를 완성해가는 도정에서의 삶. 이 길에 들어서게 하여 참된 삶으로 인도하게 하는 거룩하신 불법승께 지심으로 절한다.
2003년, 우천 이성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