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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 생명의 표현 -
이전에 우리는 혼의 표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제 총괄적으로 말하면, 혼 생명의 표현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천연적인 능력이고 둘째는 하나님께 굽힐 줄 모르는 강팍한 마음이고, 셋째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여 많은 의견과 계략을 갖는 것이고, 넷째는 감정에 속한 영적인 체험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1) 혼적인 생명 자체가 천연적인 능력이고, 혼의 기관이 2) 의지 3) 생각 4) 감정으로 나누어지기기 때문이다.
혼의 주요 부분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적이면서도 그들의 체험에는 각기 다른 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의 방면에 치우치고, 어떤 이는 감정의 면에, 또 어떤 이는 의지의 면에 치우친다. 이 몇 방면의 생활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이 몇 가지 방면은 다 혼에 속한 생활이다. 혹 생각에 치우친 어떤 믿는 이는 감정에 치우친 사람의 혼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감정에 치우친 사람은 생각에 치우친 사람의 혼적인 것을 발견한다. 사실상 이 두 사람은 다 혼에 속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로 해방받기 위하여 하나님에게서 얻은 빛 비춤으로 자기의 참된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다. 결코 새 지식을 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꺼이 하나님의 빛 비춤을 자기를 비추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 생명은 현재와 같지 않을 것이다.
생각 속에서 진리를 갈구하고 받아들이거나 전파하는 것이 혼에 속한 가장 큰 표시이다. 가장 영적인 체험과 가장 높고 깊은 진리가 생각을 훈련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절대로 생명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을 살찌게 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다. 믿는 이들이 혼에 속하고 생각의 지배를 받을 때 그들의 생각엔 영성의 오락이 가득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보다 자기의 사상을 더욱 의지한다. 그들이 생각으로 궁리하는 것이 기도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보다 더욱 많다.
가장 믿는 이들이 영적인 체험으로 착각하기 쉬운 것은 감정이다. 혼적이되 감정에 치우친 믿는 이는 그의 생명 안에서 언제나 느낌을 추구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또는 신체의 기관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 하고, '사랑의 불길' 이 타는 것을 느끼게 하며, 즐거움을 느끼려 하고, 영성의 높은 상태를 느끼려 하고 일의 순조로움을 느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느낌을 의지하여 이러한 느낌이 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느낌을 의지하여 전진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감정에 속한 믿는 이는 이러한 느낌이 있을 때에만 주님을 섬길 수 있다. 그에게 이러한 느낌이 없을 때에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다.
의지는 혼적인 생명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의지는 사람의 자주적인 기관이다. 혼적인 믿는 이는 의지를 통해 '자아'를 모든 사상과 말과 행동과 생활의 중심을 삼는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이해하려고 한다. 또한 그는 자기의 누림을 위해 무엇을 느끼려고 한다. 그가 한 일들은 자기의 계획을 따른 것이다. 그의 행동의 목적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 안에 혼이라는 단어가 생물과 동물로 번역된 것을 본바 있다. 원어에서 이 단어는 '동물의 생명'이다. 이것은 혼 생명의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로 알게 한다. 혼적인 믿는 이의 생활과 일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말은 '동물의 활동' 혹은 '동물의 활발함' 이다. 이들은 계략이 많고 일도 많으며 생각이 분주하고 감정이 분란하며 전 존재의 안팎이 안정되지 못하고 분란하다. 그래서 감정이 자극을 받으면 온 존재의 다른 부분들도 이에 따라 흥분된다. 그러나 감정이 하락할 때, 비록 감정은 많은 침착해졌지만 그들의 생각과 자아의 뜻은 여전히 분란하다. 혼적인 믿는 이의 생활은 종일토록 활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은 '동물의 활발함'이 충만한 생명일 뿐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모든 것의 주로 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혼의 일은 믿는 이가 천연적인 생명으로 살게 하고 자기 능력으로 일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주님을 알고 주님을 가까이하며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한다. 또한 생각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궁리하고 계획하며 추론하게 한다.
만일 믿는 이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창조된 생명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는 영성에서 가장 큰 손해를 입을 것이고 그의 일에는 참된 영적인 열매가 결여될 것이다. 믿는 이에게 자신이 창조된 동물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적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수치스런 것임을 알 수 있도록 성령의 계시해 주심이 필요하다. 야망이 가득한 어린아이가 자기를 자랑하고 우쭐대는 것을 볼 때에 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듯 우리의 '동물적인 활동'에 대하여 동일하게 대하신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으뜸대는 자리에 서는 것보다 잿더미 속의 체험을 더 많이 갖기 바란다.
- 믿는 이의 어리석음 -
많은 믿는 이들은 혼적인 체험의 해로움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범죄와 영성을 더럽히는 '육체의 일' 에 속한 것들만 거절하고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혼 생명은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생명이다. 동물들도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생명으로 사는 것이 정당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천연적인 생명으로 사는 것인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말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헛되이 생각 안의 가르침만을 받는다면, 그가 반대하든 찬성하든 성경의 가르침은 그의 마음속에서 혼 생명을 마땅히 거절해야 할 이유들임을 발견하지 못한다. 예컨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거나 죄를 범했다면 물론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을 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의 안에 미덕을 계발하려 한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지금 그는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가 하나님의 힘을 의지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정하신 뜻이 아니라 그가 하는 것이며, 죄악된 것이 아닌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은사와 재능을 주셨다면 어찌 이것들로 일할 수 없단 말인가? 내가 일할 때가 나의 재능을 사용할 때가 아니란 말인가? 재능이 없는 사람은 말할 것이 없겠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도 그것을 사용할 기회를 얻지 못하겠느냐고 말한다.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 생각으로 성경의 의미를 힘껏 추구하는 것이 왜 틀렸는가? 성경을 읽는 것이 죄란 말인가? 현재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진리를 생각으로 연구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올 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생각을 주시지 않았단 말인가? 우리의 사상으로 궁리하고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데 어찌 안 된단 말인가?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자 추구하는 것은 성실한 마음에서 메마르고 나의 일에 흥미가 없었는데, 많은 때에 하나님은 나로 주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셨고, 내 마음속에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듯한 극한 즐거움도 느끼게 하셨고, 그분의 임재도 만지듯이 느끼게 하셨다. 이것이 영적 생명의 최고 절정이 아니란 말인가? 많은 때에 이러한 느낌을 잃었을 때 나는 생명의 메마름과 맛을 잃었으며 냉담함과 평범함을 느꼈었다. 이때마다 나는 이러한 느낌을 얻기 위해 진지한 마음으로 갈망하고 추구하며 기도했는데, 이것이 틀렸단 말인가?
이것이 많은 이들이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그들은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을 구분할 줄 모른다. 그들은 아직 천연적인 생명의 가증함을 알게 하는 성령의 계시를 친히 얻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의 계시로 천연적이고 선량한 생명 안의 많은 가증한 부분을 볼 수 있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다. 또한 성실하고 겸손하게 성령께서 지적하신 것을 제거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합당한 때에 성령은 그의 천연적인 생명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그에게 지적하며 보여 주실 것이다.
성령은 그의 모든 일과 생활이 '자아'를 중심과 근원으로 삼았을 뿐 그분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삼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의 모든 선이 자기를 좇아 행한 것이며, 그중 적지 않은 부분이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신다. 또한 그의 일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꺼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행한 것도 아니고 자기 뜻대로 독단적으로 행한 것이며 모든 표면적인 기도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모두 거짓된 것임을 알게 하신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지만, 그는 이러한 은사를 사용할 뿐 은사를 주신 주님의 뜻은 고려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주님의 말씀을 열렬히 사모하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려고 하지 않고 성령의 계시로 알게 하심을 구하지 않으며, 헛되이 지식을 구하고 생각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감각으로 주님의 사랑과 친밀함을 느끼려 하나 이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기보다는 그 느낌 - 그를 적셔주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삼층천'의 영광을 느끼게 하는 - 을 더욱 사랑한다. 그의 모든 생활과 일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 이렇게 믿는 이로 자아 생명의 가증함을 계시로 알게 하신 후에 믿는 이는 자신의 혼 생명을 붙잡았던 것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계시는 한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것이다.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처음에 빛으로 믿는 이를 비추실 때에 그는 빛 가운데서 통회하며 혼 생명을 기꺼이 죽음에 넘기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매우 악하기 때문에 얼마 후 혹은 며칠 후 믿는 이의 자부심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를 즐겁게 하려는 마음은 다시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자기의 혼 생명을 버릴 수 있도록 하는 이러한 계시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몇 가지 일에서 자원하여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안목을 가진 사람은 몇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믿는 이들에게 무수한 실패를 허락하고 적지 않은 수치를 겪게 하실 때 비로소 그들은 자기의 혼 생명을 버리고자 한다. 이러한 원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원함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사람은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믿는 이는 마땅히 이러한 어리석음을 제해야 한다. 마땅히 하나님의 안목을 취하여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 성령께서 혼 생명의 형편없는 부분을 일일이 드러내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믿음으로써 우리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믿고, 성경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생명에 대해 계시로 보여 주시도록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그분이 우리를 혼 생명을 벗어 버리는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 믿는 이들이 혼에 속할 때의 위험성 -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이 도달하기 바라시는 것에 그들이 이르지 못하거나 도달하기를 원치 않을 때 그들은 위험을 피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목적은 믿는 이들이 혼이나 몸 안에서 살지 않고 영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영 안에서 살지 않을 때 믿는 이는 손상을 입게 된다. 이러한 위험에는 다음 세가지 있다.
1. 영이 억압당하는 위험
성령의 모든 일은 사람의 영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일하는 순서는, 먼저 사람의 영 안에서 운행하시고 그 다음은 빛으로 생각(혼)을 비추시고 마지막은 몸에서 실행되는 것이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믿는 이들은 영으로 거듭났으므로 마땅히 영에 의해 행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성령과 동역할 수 있으며 대적의 모든 궤계를 이길 수 있다. 본래 믿는 이의 영은 마땅히 살아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 사람의 영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도록 믿는 이는 마땅히 영의 활동을 소멸치 말고 영을 좇아 사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은 사람의 영의 동역이 있어야만 믿는 이가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승리하게 하실 수 있고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실 있다(잠시 후엔 영의 문제에 대해 말할 것임).
그러나 많은 믿는 이들은 영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떤 때에는 도리어 영적인 것을 혼적인 것으로 여겨 혼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혼돈한다. 그러므로 많은 때에 혼적인 능력으로 살고 일하면서 영의 생명을 억누른다. 그들은 혼을 좇아 행하면서 자기가 영을 좇아 행한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그의 영으로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에게 있는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멈추게 된다.
혼 안에서 살 때 믿는 이는 늘 생각 속의 사상과 상상과 계획과 이상(理想)에 따라 행한다. 또 그는 자기의 원하는 바와 자기 느낌에 따라 행한다. 이러한 결과로 감정적인 체험이 있을 때에는 기뻐하고, 그러한 체험이 없을 때에는 억압을 당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영의 생명 안에 살지 않고 감각 안에 살며 감정의 변화에 따라 생활한다. 이로써 믿는 이는 더 이상 그의 중심 곧 그의 영 안에서 행하지 않고 외적인 몸의 감각 안에서 사는 데에 떨어진다. 이러한 영의 지각은 몸과 혼에 의해 정복되어 믿는 이를 영의 지각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로 믿는 혼이나 몸 안의 지각을 가질 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각을 잃게 된다. 이럴 때 영은 하나님과의 동역을 잃게 되고 영적 생명의 성장은 억압을 당하게 되며, 영의 믿는 이들이 능력을 얻고 인도함을 받아 가서 싸우고 경배하도록 일할 수 없다. 만일 그 사람 속에서 영이 온전하고 자유로이 권세를 잡을 수 없고, 그가 영의 능력으로 세상에 살지 않으며 영을 모든 것의 주로 삼지 않는다면, 그는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본래 영의 지각은 가장 섬세한 것으로써 사람이 영을 좇기를 배우고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을진대 하물며 혼 생명의 거칠고 강한 감각이 방해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혼의 감정은 영의 지각을 혼란스럽게 할 뿐더러 또한 영의 지각을 억압한다.
2. 몸의 한계에 떨어진 것의 위험성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들이 본 '육체의 일' 중에 많은 것들은 사람의 육신에서 나온 정욕이지만 그중에 혼의 일도 적지 않다.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종파'(20절- 원문참조) 등은 분명 사람의 혼 - 곧 인격 - 안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믿는 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의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의 작용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술취함과 방탕함' 등의 육신의 죄들과 같은 부류로 본다는 것을 강조한 이것은 혼과 몸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솔직히 말해서 혼과 몸은 나누어질 가능성이 없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 '육의 몸'(고전15:44)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이 죄스런 성품만 이기려 하고 천연적인 생명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일시적으로는 그가 죄를 이긴 체험을 가질지 모르지만, 얼마 안 되어서 육신과 죄의 영역 안으로 떨어지게 된다. 혹 그가 더 이상 더러운 죄는 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죄라는 단어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옛 창조'를 처리하시는 장소이자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옛 창조에 속한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지 않고 '옛 창조' 전체를 온전히 처리한다. 믿는 이는 십자가에 와서 대신 죽으심의 구원만 받아들이고 함께 죽으심의 구원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일단 당신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당신이 대신 죽으심의 방면만을 깨달았든 더 많은 것을 깨달았든 성령은 당신 안에서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계속 일하여 천연적으로 죄를 미워하는 데에서 함께 죽은 체험을 추구하는 데로 당신을 인도한다. 만일 당신이 계속 이 새 생명의 욕망을 져버린다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단계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그 생명의 복락 - '구원의 즐거움' - 에 대한 누림은 이미 잃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당신이 죄의 성품을 이기게 하는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알았다면, 성령은 십자가에 의해 당신이 계속 전진하여 천연적인 생명을 이기는 체험을 추구하도록 인도하신다. 십자가의 일은 부분적인 일만 하고 멈추지 않는다. 십자가의 일은 멈추지 않고 그 일이 거듭될수록 더욱 깊어진다. 만일 옛 창조가 체험에 있어서 아직 온전히 못 박히지 않았다면 십자가는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일한다. 십자가의 목표는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것을 온전히 파하는 데 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은혜를 입어 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가진 다음 더 이상 천연적인 생명을 이기기를 추구하지 않고 항상 혼 생명 안에서 살고 있다면, 그는 혼이 다시 몸과 연합하여 그로 후퇴하게 하고 전에 벗어난 죄를 다시 범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배를 저을 때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더 깊은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십자가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일은 다 무효로 돌아간다. 이것은 많은 믿는 이들이 일시적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가졌으나 나중에 다시 타락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만일 옛 창조의 생명이 아직 존재한다면 머지 않아서 그는 다시 옛 창조의 성품과 연합하게 된다.
3. 흑암의 권세가 득세할 때의 위험
야고보서 3장 14~15절은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혼 생명과 사탄의 일과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약3:14~15). 여기서 우리는 마귀로부터 오는 어떤 지혜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혜는 또한 사람의 혼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지혜가 사람의 혼 안에서 사탄이 일한 결과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것이다. '육체'는 마귀의 공장이다. 그러나 혼 안에서의 마귀의 일이 육신 안에서의 마귀의 일보다 못하지는 않다. 이 두 구절은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난 시기와 분쟁이 혼 생명 안에서의 사탄의 일로 인한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믿는 이는 대적이 범죄하도록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을 알 뿐 사람에게 어떤 사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인류의 타락은 지식을 사랑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데 있다. 오늘날 사탄은 여전히 이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일하는 기관으로 삼기 위해 믿는 이들을 혼 생명 안에 머물게 한다.
사탄의 계획은 믿는 이들의 '옛 창조'를 더 많이 보존하려는 것이다. 사탄이 믿는 이들이 그들의 죄를 보존하게 할 수 없을 때에는 믿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자원하지 않음을 이용하여 믿는 이들의 천연적인 생명을 보존한다. 그렇지 않으면 음부의 군병은 얼마 안 되어서 실직하게 된다. 만일 믿는 이들이 영 안에서 주와 연합한다면, 성령의 생명은 그의 영 안에 흘러 들어오게 되고 십자가는 매일 매일 더 깊은 작용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믿는 이는 더욱 '옛 창조'를 벗게 되고 마귀가 일하는 장소는 더욱 적어진다. 우리는 사탄의 모든 유혹과 공격과 그의 모든 일이 우리 "옛 창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새 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에 사탄은 결코 시간을 들여 여기에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탄은 자기가 일할 발판을 얻기 위해서 믿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옛 창조' - 그것이 죄이든 선한 천연적인 생명이든 - 를 남겨 두게 한다. 그러므로 대적은 믿는 이가 죄는 미워할지라도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도록 사사건건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그들을 유혹한다.
믿는 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는 '육체 - 이것은 몸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죄를 가리킴 - 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다"(엡2:3). 그러나 앞 구절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악한 영의 일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우리의 목적은 믿는 이들이 사탄이 일하는 장소는 단지 몸만이 아니며 또한 혼도 대적이 기뻐하는 곳임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지금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믿는 이들이 죄에서 벗어나야 할 뿐 아니라 천연적인 생명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오!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여사 이 단계의 중요성을 알게 하시기 바란다. 만일 믿는 이들이 죄의 능력과 혼 생명에서 단계적으로 벗어난다면, 대적의 일은 크게 실패하게 된다.
믿는 이들이 혼에 속하고 자신의 생각을 보호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악한 영은 사람의 천연적인 지혜를 이용하여 그의 모략을 이루기가 쉽다. 악한 영은 아주 쉽게 무의식중에 사람의 생각 속에 어떤 의견을 집어넣어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의 진실함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사람 속에 이루어진 성령의 일도 악령에게 점유된 생각의 지지를 얼마나 받는지 모른다. 비록 동기가 틀리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에 품은 생각에 의해 팔릴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사상들도 세상 사람의 어리석음과 동일한 셩령의 일을 가로막는다. 악한 영의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어떤 때에 악한 영은 환상이나 다른 기묘한 사상을 믿는 이에게 줌으로써 그것이 매우 초자연적인 것이므로 필시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여 가장 심한 미혹을 받게 한다. 혼 생명이 죽음에 넘겨지기 전에는 믿는 이의 생각이 호기심으로 무엇을 '요구하고' '붙잡고' '조사하는' 현상을 갖게 되기 때문에 악한 영은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믿는 이들의 혼 생명에서 감정이 부분은 대적의 일을 재촉하는 부분이다. 믿는 이들은 기쁜 느낌을 탐내고 감각으로 성령과 주 예수의 사랑을 느끼려고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 하기 때문에, 악한 영은 믿는 이들에게 여러가지 기이한 느낌을 주어 그의 천연적인 생명을 흥분시키고 몸의 감각 기관에서 기이한 많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들은 성령의 세미한 음성과 영 안의 섬세한 직감을 억합하고 일하지 못하게 한다(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이 책 후반부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만일 믿는 이가 혼 생명을 철저히 처리하지 않는다면 영적인 전쟁에서 큰 손실을 보게 된다. 계시록 12장 11절에서 우리는 죽기까지 자기 혼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큰 조건임을 볼 수 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연민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대적 앞에 패배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자기의 생명을 생각하고 아끼며 사랑하기 때문에 승리를 잃어버린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믿는 이들은 자기를 생각하고 자신 안에 '빠지며' 대적에게 사로 잡힌다. 대적이 믿는 이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항상 승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애착을 두는 것은 대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다. 혼 생명이 죽음에 넘겨져야 비로소 우리에게는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 사탄은 철저히 처리되지 않은 혼을 통해 일할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혼을 공격하여 믿는 이들을 실패에 떨어지기 할 수도 있다. 혼 생명은 우리 안에 있는 대적의 배후 공급자이다. 만일 믿는 이가 인간의 힘을 사용하여 혼 생명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이것은 적에게 공격할 틈을 남겨 두는 것이다. 아무리 진리를 깨닫고 열심히 싸우는 믿는 이라도 그의 혼은 언제나 위험하다. 믿는 이가 영적일 때 그의 혼적인 부분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혼의 성분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은 더욱 어렵다. 영적인 생활에 혼적인 어떤 것이 섞여 있을 때, 많은 경우 우리는 그것을 감찰해 낼 수 없다. 어떤 때에는 혼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 사이에 약간의 차이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 이들이 깨어 마귀를 대적하지 않으면 그의 혼 생명으로 인해 크게 실패하게 된다.
믿는 이들의 혼에 속한 생명이 마귀에게 기만당하고 이용당하는 이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경고 사항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즉 하나님의 정하심은 우리의 생명과 성품, 무릇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항상 위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