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16> 조준호
“깨달음이란 불교적 세계관 확립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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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사진은 태국 스님들이 인도 기원정사 유적지에서 좌선명상하는 모습. |
“지극한 마음으로 선정에 든 수행자에게 제법이 저절로 드러날(pa-tubhavanti) 때 그에게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린다. 제법의 인연을 반야지혜로 통찰(paja-na-ti)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도송 전후로 12연기가 역순으로 시설되고 있다. 이는 깨달음의 내용은 바로 12연기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성격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매우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지극히 고요하고, 수승하며, (분별) 사유의 범위를 넘어 있으며, 미묘하여, 지혜 있는 자만이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최초로 깨달은 자의 술회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물론 그 내용인 (12)연기법이 매우 깊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극히 고요하고, 미묘한 것으로 일상적인 사유의 범위를 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경전에서는 깨달은 자를 늘 모셨던 아난이 자신의 생각으로는 12연기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무엇이 깊은지를 질문하자
“12인연은 보기도 알기도 어렵다. 모든 하늘 악마 범천 사문 바라문으로서 아직 12인연을 보지 못한 자가 만일 사량(思量)하고 관찰하여 그 뜻을 분별(分別)하려고 한다면 곧 정신이 크게 아득해져 능히 보는 자 없을 것이다.”라고 주의시키고 있다.
그래서 다른 경전에서는 12연기를 보는 것은 그대로 진리를 보는 것이며, 성불법이라고까지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깨달음의 내용은 사량과 분별로 닿을 수 없음이 특히 강조됨은 물론 깨달음과 12연기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염두 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오랜 불교사에 있어 12연기만큼이나 분분한 논의가 진행된 교리가 없었다. 이는 현대의 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12연기의 깨달음이 달리 무엇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다시 확인해 보는 것으로 그 심대한 함의를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도이다. 구체적으로는 자타(自他), 단상(斷常), 유무(有無), 일이(一異), 그리고 고락(苦樂) 중도 등이다.
중도란 이러한 자타, 단상 등을 모두 남김없이 각각 파기.부정하고 세워지는 법이며, 그것이 12연기이다. 이러한 자타나 단상 등의 현대적 표현은 관념론이나 실재론, 유물론 그리고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적, 결정론, 예정론 그리고 비결정론 등으로 현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계관적인 입장이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쯤 되면, 세존이 왜 깨닫기 어렵고 더 나아가 그러한 깨달음의 내용을 머리로 헤아리는 사량과 분별로는 오히려 정신이 아득해져버릴 것인가를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연기법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 평생을 줄기차게 씨름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세계관 즉 정견(正見)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자체가 세계관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팔정도에서 정견이 첫번째로 내세워진다. 이타의 자비행이라는 사회적 실천은 이 점에 초점이 놓여져 있다. 정견의 확립이야말로 자타의 바른 삶. 행복한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계정혜 삼학이 수행 기본…그 바탕위서 수행해야
감정.사유가 투명해진 청정한 상태서 반야드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이는 바로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초기불교의 부파에서는 모든 중요한 수행법을 ‘깨달음을 위한 37가지 부분’이라는 의미의 37보리분(菩提分)으로 묶어 설명한다. 이는 단적으로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이 깨달음과 관련하여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수행은 기본적으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으로 압축되며 깨달음은 다름아닌 삼학의 완성을 조건으로 일어난다고 강조된다. 다시 말해, 삼학의 연장선상에 깨달음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윤리.도덕적 청정성의 확보[계학]없이 깨달음은 없다고 못 박고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선정이 강조되는데 이는 앞의 세존의 짧은 오도송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깨달음의 7가지 지분(支分)이라는 칠각지(七覺支)는 모두 선정 수행이 주를 이룬다. 달리 말하면, 선정 수행을 떠난 진리의 드러남이나 깨달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선정론으로 귀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대한 비중이 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문제는 선정을 마음의 안정이나 집중과 같은 문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에 마음의 안정이나 집중은 감정[受]이나 사유[想.行.識]를 정화시키는 기본조건으로 그 핵심적인 목적은 부적절한 감정과 분별망상을 쉬는 것에 있다.
초기경전에서 정학의 동의어는 심학(心學)으로 바꾸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선정의 결론인 상수멸정은 본래 감정과 사유가 ‘투명해진 청정한 상태의 완성’을 의미했고,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만이 완전한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으로서 깨달음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감정과 사유의 정화를 통한 청정해진 마음의 확립 없이는 반야지혜는 물론 깨달음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깨달음이 직관인가 분석인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직관이다. 깨달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직관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지만 앞의 세존의 오도송 가운데에서도 ‘제법이 저절로 드러날 때’나 ‘반야지혜로 통찰’ 이라는 표현이 또한 잘 말해 주고 있다. pa-tubhavanti를 ‘저절로 드러난다’고 옮긴 이유는 이 말의 쓰임새는 모두 예기치 않았던 것이 어떤 순간에 갑자기 나타날 때 사용되고 있음이다. 예를 들면, ‘마치 범천이나 신통력을 쓰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갑자기 드러난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는 깨달음이 논리적 사유나 추론 또는 분석을 통한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의 기본 선정 체계인 사선에서도 말[언어]을 바탕한 분별사유는 제2선에서 이미 쉬는 것이다. 그 이후의 깨달음은 언어와 분별사유를 매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 교리적으로 또한 증명된다.
다음으로 앞의 오도송 가운데 위빠사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말은 paja-na-ti이다. ‘반야지혜로 통찰한다’라고 옮길 수 있는 것은 pan-n-a-(般若.智慧)의 동사형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오랜 불교사에서 지중한 무게를 갖는다. 반야는 초기불교 이래 진리라는 가장 불교적인 표현의 여실(如實 :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여실지견인데 다시 여실지견이란 말은 사유분별을 매개하지 않고 본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렇게 바로 보기 때문에 직관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존의 깨달음은 언어나 사유 또는 분석의 결과물이나 구축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완전한 그리고 최고의 권위가 있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이나 사유의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 넘은 영역으로서 깨달음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항상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성과 영원한 진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깨달음을 위한 수행법으로서 세존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종교나 철학체계에서도 제시하지 않은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체험적 인식으로서 수행방법론을 제시한다. 그것은 조작.왜곡이 안 된 ‘여실’을 보자면, 먼저 조작.왜곡이 안 된 ‘보는 눈’을 갖추는 행법이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반야지혜로 동치되는 말이다.
깨달음 전후 모두 위빠사나와 반야는 지속된다. 팔정도도 깨달음을 위한 실천 수행도이면서 동시에 이후 깨달은 자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이룬 전후는 지계의 삶이다. 그래서 계목은 ‘별해탈(別解脫)’이라 한다. 깨달음의 전후에 걸친 지계, 그 자체가 ‘또 다른 해탈’이란 의미이다. 다만 깨달음은 출발의 지계를 완성할 뿐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실천 수행법은 깨달음을 향한 수단이면서 그대로 목적이기도 하다. 길과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바로 조작 왜곡이 안 된 눈을 갖추지 못하고, 팔정도의 삶을 살지 못하고, 계율을 지키지 않고는 깨달음 또한 없다. 다시 반복하면, 지금 이 순간 깨달음적인 삶을 살아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조준호/ 동국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2054호/ 8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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