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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3편 1-6절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시편을 보면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을 부르짖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특히 어려움이라고 할 때 주의 뜻을 대적하는 자들이 주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런 어려움이 잠시 잠깐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어 거의 넘어진 자로 있는 것처럼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초반부에 보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데, 언제까지 이 일이 계속될 것인가에 대하여 탄식할 정도로 답답해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고 바라본다는 것이 시편이 내용이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바입니다.
시편 13편은 표제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제를 통해 배경을 알려주는 때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배경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바라본다는 것을 노래하였다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을 기록의 형태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고 있다고 할 때 우리 역시 어려움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바라봐야 하며, 그리고 그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보시면 1절과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다윗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1절을 통해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그리고 2절을 통해서는 “...어느 때까지 하오며...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렇게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어려움과 그 어려움에 대한 고통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요, 나아가 오랜 시간 어려움과 고통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인내하는 데 한계가 온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어려움 가운데 놓인다고 할 때 참고 견디는 것에 있어 한계를 맛볼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실상으로 보자면 오랜 시간 동안 인내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내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자체도 싫어합니다. 때문에 인내하기보다는 어려움만 있으면 원망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항상 기쁨과 즐거움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어려움도 주시고, 그런 어려움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를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을 통해 성도와 교회로 하여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약1:4 참조).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하여 고난의 때를 걷게 하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많은 부분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려움은 우리가 짓고 있는 죄의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주로 그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조차 자신의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죄의 결과로서의 어려움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따라 주시는 어려움이든 그 목적은 우리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까지니이까”란 표현과 관련해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보통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할 때는 불신앙적인 면에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원망 불평할 때 그들의 생각 가운데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먹을 음식이 없어 원망하고, 마실 물이 없어 불평할 때,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이 채워졌지만 더 좋은 것이 없음으로 원망 불평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에 애굽이 더 좋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출애굽을 통하여 자유를 주셨지만 그런 자유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도리어 애굽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은 그들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광야 40년을 말씀하셨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기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럼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도록 하시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죄의 결과로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어려움조차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때문에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배워나가야 했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원망 불평하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애굽이 더 좋았다는 것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신명기 8장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광야에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결과 광야로 나아갔지만, 그래서 40년 동안 고생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는 그런 사실을 거의 배우지 못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성도에게 이유 없는 어려움을 주시지 않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처럼, 그리고 섭리 역시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친히 창조하신 모든 것과 창조하지 않는 죄조차 다스리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주실 때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원망 불평 차원에서의 “언제까지입니까?”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럼 다윗의 고백이 이런 불신앙적인 면을 담고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시편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그 어려움의 지속성, 그리고 인내하는 데 있어 한계에 부딪힌 결과 다윗은 하나님조차 자신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1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영원히 잊으신 것은 아닌가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얼굴을 자신에게서 숨기신 것처럼 탄식하고 있습니다. 2절에 의하면 다윗의 원수 된 자가 자신을 치며 자랑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 일이 언제 끝날지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서 그 얼굴을 숨기신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다윗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고 또 잊으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잊으시는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그의 백성에게서 숨기시는 경우가 있는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없습니다. 제가 궁극적인 의미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때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서 그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인데, 그렇게 숨기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모른 척 하시겠다, 버리시겠다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그의 얼굴을 그의 백성에게서 숨기시지 않습니다. 그럼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 쪽에서 변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다윗 쪽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가 배워야 하는 사실은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때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아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아무리 큰 어려움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낙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아니 자주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고, 그래서 우리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우리로부터 그 얼굴을 돌리신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고 계십니다.
지금 다윗의 기도는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 내용 자체는 자신을 잊으신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그 얼굴을 돌리신 것처럼 고백하고 있지만, 이미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 편에서 그 얼굴을 우리에게로 향하시며,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고 할 때 상황 자체는 다윗의 기도와 같을 수 있습니다. 원수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수 있고, 원수의 교만함을 볼 수 있고, 그래서 내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잠시 잠깐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그런 일이 있으므로 마치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잊으신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억하고 계시며, 여러분으로부터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여러분을 향하여 그 얼굴을 보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증거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 결코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일의 결과가 지금 당장 나타나야 할 것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지금 다윗이 기도하고 있지만 이런 기도를 한번만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해서 이런 고백 이후에 곧바로 해결해 주시는가? 그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미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때까지인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이렇게 내버려두시듯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것은 맞지만 그 일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으로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과 더불어 기도하면서도 인내하되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셔야 합니다. 주께서 언제 해결해 주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생이 다하는 그때까지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생을 통해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 어떤 어려움이 해결되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나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방해를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다시 말해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면 속히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우선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어떻게 해서 다윗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다윗이 하나님을 먼저 찾아서가 아닙니다. 다윗이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님이란 분을 선택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와 은혜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 즉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는 약속을 동일하게 받는 자로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해 주십사 기도합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나를 생각하사’라고 되어 있고 의미상으로 보자면 그렇게 번역할 수 있지만 원문을 살리자면 ‘나를 바라보아 주사’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1절 마지막에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지 않고 숨어계시는 듯 말하였지만 이제는 자신을 보아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얼굴을 내게서 돌리지 마시고 다시금 바라봐 주십사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칼빈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준다는 말이나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생명을 주십사 간구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요나단이 사울 몰래 블레셋으로 쳐들어가 블레셋을 치게 될 때 사울은 그릇된 명령을 하게 됩니다.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칠 때까지 아무도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경우 그것을 몰랐고, 허기 져 힘이 없을 때 꿀을 먹게 됩니다. 그때 어떤 표현이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이렇게 언급합니다.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삼상14:27) 이 때 눈이 밝아진 것은 생기를 회복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허기 져 쓰러지기 전이었지만 먹고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칼빈은 눈을 밝혀 달라는 간구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물었지만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말을 통하여 죽어가는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원수 때문에 그 영혼과 마음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근심하고 있는 자신에게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믿음을 달라는 것이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주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달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보아 주십사, 그리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사, 심지어 자신의 눈을 밝혀 주십사 간구하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사망의 잠을 잘까 하여 두렵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간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고, 남은 것이라고는 죽음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자신을 보아 주십사,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사. 그리고 자신을 눈을 밝혀 주십사 간구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사망의 잠을 자는 자들은 누군가 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 자들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비춰주지 않는 대상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 사망의 잠이 아니라 사망의 잠에서 깨어난 자는 누군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비추시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윗의 이 기도를 통하여 다윗이 지금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 다윗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그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더 큰 두려움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비춰주고 계시다면 사실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생명을, 믿음을, 그리고 힘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려움 앞에서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얼굴빛을 비춰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 나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아뢰며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전혀 응답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눈을 밝혀 주를 보아야 하는데 결국 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사망의 깊은 잠을 자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더 큰 두려움으로 있는 겁니다.
더불어 다윗은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이렇게 기도한다기보다는 주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시면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얼핏 보면 자신이 원수에게 패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요동하게 될 때 원수가 승리하여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시편의 내용을 기록했다고 할 때 그것은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단지 원수가 승리하고 그 원수 앞에 패하는 자신의 어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는 곧 하나님의 문제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는 말이 그런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몸 된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지금 다윗은 자신의 패함과 원수들의 승리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저들이 마치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착각할까 두렵다고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원수들로 인하여 훼손되지나 않을까, 여호와란 이름의 하나님이면서도 자기 백성이 당하고 있는데 무슨 힘이 있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업신여기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문제 자체를 볼 때가 많습니다. 문제 자체를 본다는 것은 그 문제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초점이 어디 있느냐?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인생이 목적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내용은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광 때문에 자기 자신까지 부인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자리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부분은 좀 더 높은 차원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당하고 내가 패하는 것,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뜻하셔서 그 일이 실행되고 있다면 그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목적 아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는 것,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특히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맺어야 할 열매들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자세를 가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근원적으로는 우리의 어떤 행실이 하나님의 영광에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분명 너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그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문제든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열매가 아닌 방식으로 나타내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시고 또 살피셔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모습, 다시 말해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뜻하신 하나님, 그러나 모든 일에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인내로서 주님 앞에 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데, 어려움에 대하여 호소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 것에 대한 찬송이라기보다는 그가 두려워했던 것에 대하여 어떤 확신과 소망 때문에 찬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여러분, 다윗이 두려워한 것은 무엇입니까? 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해 주지 않는 것, 그래서 기도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자신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난 듯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처음에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잊으신 것처럼 생각했고 주의 얼굴을 자신에게서 숨기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시금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럼 사랑의 증거가 나타났는가? 소위 자기에게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편을 통해 보자면 지금 자기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시편 기자는 아직 자신이 기도를 통해서 어떤 유익을 보고 있는가를 느끼지는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그에게 품도록 한 구원의 소망을 의지하면서 이 소망을 방패로 삼아 그 많은 시험이 가져올지도 모를 공포를 물리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나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약속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속성을 붙들고 있습니다. 약속이라 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 은혜언약과 관련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속성이란 어떤 면에서 은혜언약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붙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은혜언약을 맺으셨는가? 우리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성으로 하자면 우리는 어떤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인 사랑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일방적으로 맺으신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 사랑을 의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라기서에 보면(말1:2) 맨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따져 묻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먼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시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렇게 묻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시지만 무엇을 보고 사랑을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물질도 없고, 건강도 없고, 이런 저런 것들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것으로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그제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가 아니란 것입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지만, 그리고 다윗과 같은 심정의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결코 버리시는 일은 없다는 것, 오히려 견인의 은총을 계속해서 베푸신다는 것, 그런 차원에서 그의 얼굴을 비춰주고 계시다는 것, 이것이 그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 때문에 다윗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하여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문제 앞에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향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때문에 변함없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그리고 고통 가운데 성도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아들까지 주셨는데 무엇을 더 아까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아들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 자신을 가장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아들보다 더 큰 것은 분명 없습니다. 때문에 아들을 주셨다면 다른 모든 것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이라고 할 때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들을 통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채우고자 하시는 것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가지니이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그 답답함이 마치 하나님이 돌아서신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지라도, 성도는 주의 은혜를 따라 주를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주의 약속의 말씀과 그분의 속성을 다시금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그분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