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테의 본고장인 해상왕국 류큐, 즉 오키나와를 1609년 일본에 병합시킨 세력은 사쓰마라는 번입니다. 사쓰마는 현재 가고시마현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사쓰마는 일본의 주요 격동기마다 등장하는 지역으로 일본의 수많은 번 중에서도 강력한 무(武)를 자랑하던 곳으로 지겐류(示現流)라는 검술을 공식적으로 사용합니다. 지겐류는 일격필살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유파로 과감한 첫 공격을 위주로 합니다. 적이 막던 막지 않던 무조건 칼을 내려치는 것이지요. 한번 공격에 상대를 끝내지 못하면 곧 죽음. 지겐류에서는 이를 “검을 내리칠 때 삼천지옥의 끝까지 쳐내린다”고 표현합니다.

<지겐류>
또한 사쓰마는 포르투갈인에 의해 처음으로 일본에 조총이 전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에 고구마를 처음 전한 곳도 이곳이고요. 시마즈(島津) 가문은 무려 800년간 사쓰마를 통치했는데 무사들의 규율을 아주 엄격하게 세운 것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다섯 명을 한 조로 하는 오(伍)를 기본단위로 군대를 편성했는데, 전투에서 한 오는 반드시 다섯 명의 적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원 할복. 이러한 엄격한 군율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는 사쓰마군을 ‘귀신 시마즈’라고 부르며 가장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사천 전투에서 명나라 4만 대군이 사쓰마 7000 명에게 패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 전투에서 사쓰마군은 명나라군 수급 3만 이상을 베었다고 합니다. 사쓰마는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인의 코와 귀를 가장 많이 베어간 지역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유명한 도예가 심수관 일가가 끌려간 지역도 이곳이지요.

<임진왜란 사천전투의 일부를 그린 그림. 일본군이 성에서 조총을 쏘고 있다>
도요토미의 서군과 도쿠가와의 동군이 전면전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쓰마는 히데요시의 서군에 가담합니다. 사쓰마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번의 일족이 3000명의 병사와 함께 류큐로 피신하면서 자연스레 이 섬을 정복해버린 것지요.
에도 막부 말기 가장 강력한 무예를 자랑하던 번으로 흔히들 두 곳을 듭니다. 하나는 사쓰마이고 하나는 아이즈번입니다. 막부 편에 섰던 아이즈번과 달리 사쓰마는 막부 타도를 내세운 도막파에 속합니다.
사쓰마번은 강력한 무력으로 1867년 에도막부를 몰락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지만 이는 오히려 사무라이들의 몰락을 재촉하게 됩니다. 메이지 정부가 근대 국가로 개혁을 단행하면서 사무라이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심지어 사무라이의 상징인 일본도의 패용까지 금지시킨 것이지요.

<지겐류의 목검 수련 모습>
이에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자, 당시 사무라이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사쓰마의 번주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즉 조선을 정벌하자는 것이지요. 마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시킨 뒤 무사세력의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자 조선 침략을 단행한 것처럼, 사이고도 무사들의 불만을 조선 정벌이라는 전쟁으로 소진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성급한 전쟁에 반대를 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전국의 사무라이들이 사쓰마번으로 몰려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듭니다. 이것이 서남(西南)전쟁입니다. 이때 사쓰마의 지겐류 발도대(拔刀隊)는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하지만 결국에는 정부군에 패하고 사이고는 자결하고 맙니다.
사쓰마의 지겐류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한번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