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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치36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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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여자 스크랩 백범일지 - 도진순 주해
라일락香 추천 0 조회 50 13.08.08 1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백범일지 - 도진순 주해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자서전 상권 하권을 집필하고 파란만장한 70평생을 살고 나라가 독립이 된다면 문지기가 되어도 좋겠다 라는 본인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역사적 자서전이다.

혼란의 세대였던 백범김구(1876.7.11~1949.6.26)의 삶을 대필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글은 그만큼 현실을 직시할 줄 알고 조선말 양반사회의 배타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멀리 세계정서의 문물을 볼 줄 알았으며 그것을 기탄없이 자주독립을 위해 이 나라에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선중기 양반가의 가정이었으나 선조 김자점의 반역으로 온가족이 몰락하여 황해도로 옮겨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해 양반문화를 접고 농사를 짓고 개척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영락없는 상놈이 되었다. 한때는 양반이었던 그들이 몰락이 되어 그 지방의 양반들의 천대를 받다 보니 독재 아닌 독재 세태의 부조리에 눈이 트였던 것 같다. 어린나이에도 학문을 좋아하고 온갖 책을 섭렵하다 보니 실권을 쥐고 있는 양반의 권위적인 행태와 노예처럼 일만 하면서도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하층민의 생활상의 조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그건 이 나라의 주권을 잡고 있는 왕권의 무능함과 정권을 잡고 있는 양반들이 주변 나라들에게만 의존하면서 점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함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이에 탐관오리의 횡포와 외국세력의 침략을 몰아내고 신분제도를 없애며 왕이 정치를 잘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갑오농민전쟁에 가담하게 되고 이후 고능선 선생의 사랑을 받으며 그의 학문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망해가는 나라를 망하지 않을 방침을 배우려면 청나라와 연합이 필요하니 그 나라의 정세를 알아보고 오라는 말에 청국행로에 나서 김이언 의병을 만나고 중국의 원조를 지원 받게 된다. 진남포로 가는 길에 배가 빙산에 갖혀 얼음귀신이 될 위기에 있을때 빙산에 올라가 얼음을 깨면서 배를 이동시켜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머문 여관에 한복을 입고 위장한 일본 순사를 때려죽인 치하포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과연 남아다운 행동이었다고 치하하는 말도 있었지만 곧이어 체포장이 나와 해주옥이 갖히게 되었다.

 

다시 인천감리서로 옮겨지면서 부모님은 집을 다 팔고 자식을 위한 옥바라지를 위해 날품을 팔면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며 무한 신뢰하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사형 집행 날 대 군주 고종의 치하를 받고 사형을 면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이변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탈옥을 감행한다. 잡히지 않기 위해 삼남을 유랑하면서 각 지방의 관료 행태와 고장의 특색들을 몸으로 보고 느끼다 홀연히 당도한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기로 작정하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나라를 향한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지라 승려의 행색을 가장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부모님과 재회하고 다시 부친이 사망하고 결혼을 약속한 미혼처가 죽고 또다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강압적 체결 조항을 반대하는 을사늑약 운동의 주동자가 되었고 식민지의 노예가 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자손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썼고 나라를 찾기 위해 국내 국외를 통한 정치적 비밀결사대 신민회를 창설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다시 감옥에 투옥되고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7년을 살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히 다짐했으며 강도의 전술이든 각 사람들의 장점을 배우고 가르치며 세상에 나가 나라를 위해 활동할 신념을 굳혔다.

출옥 후에도 흥겨운 오락에 흔들리지 않고 본이 되는 몸가짐에 각별했으며 소작농의 나태함을 꾸짖고 열심히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고 부조리한 지주자의 행태를 꾸짖었다.

 

 

1919.3.1 독립만세가 방방곡곡에 울렸지만 제대로 된 국가의 계획과 진행이 미비함에 옛 독립투사들과 의기투합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경무국장에서 다시 내무총장으로 집무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사상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독립 사업에 헌신하겠다는 이봉창의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수류탄 투하 사건은 미수로 그치고 윤봉길의 홍구공원 일본천황 생일축하연의 도시락 폭탄의 쾌거를 이뤘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김구로 지목되고 왜경을 피해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상해를 탈출하여 지인들의 도움으로 중국등지로 피신과 유랑의 나날을 보냈다.

 

중국의 원조와 해외 동포의 지원을 받으며 중경에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한국광복군 사령부를 두게 되었다. 유명무실한 광복군에 왜군 부대를 탈주한 한인 학병 청년들이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겠다는 열의로 비밀훈련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기반이 확고히 다져지게 되었다. 그러나 잘 단련된 훈련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왜적의 조기항복으로 인하여 혼란한 중경생활을 마치고 상해를 들러 다시 조국으로 감격의 귀환을 하게 되었다.

 

 

이 나라가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 독립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진정한 평화와 복락이 이뤄지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없어야 하며 종교의 자유와 독제계급을 타파하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기를 간절한 바램이었다. 실로 이 나라가 ‘30년이 못하여 괄목상대 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 한다’는 문구는 후세대 자손의 눈으로 확인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조국 사랑에 온몸을 다한 그 바램처럼 엄청난 속도의 발전으로 감히 그 당시 원조를 받던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았는가. 끊임없는 조국의 자유 독립과 민족애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익히고 가르치는 학구열이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을 일들을 우리 후손들은 그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자서전의 내용은 이것으로 마치지만 이 글이 공포된지 2년 만에 안두회의 총에 맞아 살해당하게 된다. 주석을 살해하고도 처벌대신 보호를 받은걸 보면 그토록 바라던 남북의 완전한 자유 독립국가의 의지를 가진 김구가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에게는 걸림돌로 되어졌던 모양이다.

 

 

김구 그에겐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하고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예지력이 있었으며 확고한 신념과 정의에 굴하지 않는 인간적인 면이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큰일을 하는데 한 몫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분히 써내려간 그분의 일대기가 그동안 역사라면 귀부터 닫아버리던 나의 무지함을 찬찬히 일깨워주던 시간이었다. 꽤 두꺼운 책을 선정하고 읽도록 격려했던 건 하늘빛교회의 응원이 컸던 시간이었다. ^^*

 

201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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