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을 가다 -9
2014년10월8일
공자(孔子) . 곡부(曲阜)
우리는 태산 구석구석의 전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채 이번 여행의 두번째
목적인 "공자의 고향을 찾아서" 곡부를 향해 고속도로로 1시간여 달려 오후 2시 좀 넘어 곡부
에 도착하였다.
고풍스럽고 옛정취가 풍기며 기와로 지어진 곡부에서 제일 좋다는 "궐리빈사(闕里賓舍)"호텔에
여장를 풀었다. 호텔은 아늑한 편이었으나 겉보기도, 내부도 좀 오래된것 같았다.
우리는 대강의 가방을 방에 풀고 바로 모여 공자의 사당이있는 공묘, 공자 후손이 거주한 공부,
공자의 묘가있는 공림을 오늘 다 보기로하였다. 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이동 수단이
용이하여으며 내일의 일정이 바빠 오늘 보지 않으면 일정에 차질이 나기 때문이다.
곡부는 제남에서 남쪽으로 156km에 위치하고있으며 800여년간 노나라의 수도이기도하다.
인구는 100만명이 안된다고한다.
곡부는 역사적인 도시 뿐 아니라 동양사상의 발원지로 공자, 맹자, 순자, 증자 등 춘추전국시대
의 많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던 곳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공자의 사당인 孔廟, 공자의 후손이 거주하던 孔府, 공자와 그의 아들 손자
그리고 후손의 무덤이있는 孔林, 공자 문화연구원, 공자문화원 등 공자의 발 자취가 고스란히
남겨진 도시로서 동서양 유학자들의 성지로서 일반인의 관광지로서 특히 우리나라 사람의
방문이 많은 곳이기도하다. 모택동시대에는 봉건주의 상징의 장소로 매도되어 홍위병들이
많은 문화를 파괴하였으나 지금은 파괴된 문화를 복구하고있는 중이다.
우린 공자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는 편이나 그래도 이해를 돕기위해 공자에 대해서 간단히 적어
본다.
공자(孔子)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교육자, 철학자, 사상가. 정치가로서 중국 역사 2,500여년 전
부터 지금까지 제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역사안에 정치와 사상, 그리고 생활
속 깊히 뿌리내리고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채택한 숭유배불(崇儒排佛)주의에 따라서 모든 정치
나 법, 생활규범, 도덕적 기준, 가치관, 생활방법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친것을 넘어 공자
의 사상자체가 우리의 삶이고 생활이였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춘추시대 노나라 창평향 추흡(노 양공22년)에서 지방장군이며 힘이 장사
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나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아버지 숙
량흘은 첫째 부인 서씨 사이에 자식 9명을 두었는데 모두 딸이었고 두째부인 한테서 아들을 낳
았으나 불구자였다. 그래서 그의 나이 72세때 친구의 셋째딸인 18세의 안징재에게서 공자를
낳았다.
공자는 너무 못생겼다고한다. 눈동자는 희고 코는 들창코, 입은 덫니가 나와 입을 못 다물고
귀는 들려져있어 귀 구멍이 훤히 보일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버렸는데 어머니가
다시 데려와 키웠다고한다.
야사(野史)니까 어디까지 믿어야 될런지 모르지만 못생긴것은 틀림없었는 모양이다.
공자는 3살때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의 첫 부인 한테 쫓겨나 곡부로 왔다고한다. 마을의 나이많
은 선생한테서 공부를하여 17세때 말단 관리가 된 후 열심히 시경과 서경을 배웠다.
그래서 시경, 서경을 쓴 주공(周公)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된다. 공자는 노나라 왕 昭公이
신하의 반역으로 쫓겨나 제나라로 피신할 때 공자도 따라간다. 제나라에서 많은 신하들을 가르
치고 자리를 잡을려는 즈음 제나라 莊公이 신하에게서 피살되면서 기원전 509년 노나라로
돌아온다. 공자는 "중도의 재(中都宰)"를 거쳐 기원전 499년 최고의 재판관인 대사구(大司寇)
에 오른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고 昭公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계씨를 타도하려했으나
실패하여 기원전 496년 제자인 자로, 안회, 자공 등과 함께 노나라를 떠나 14년간 방랑 생활을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주유천하"이다.
그 후 교육자로서 제자들을 가르친다. 공식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제자는 77여명이며 수천명이
스스로 공자의 제자라고하였다고한다. 그 중 안회, 자하, 자로, 자공, 증자 등이 수제자이다.
아들 孔鯉, 제자 안회, 자로가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는 아픔을 겪고 살다가 기원전 479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사후 3년상을 치루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며 공자사상을
게승 발전시킨다.
증자는 공자 친손자인 子思로 이어져 유학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善하므로 교육등을 통하여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데 힘써야한다는 性善說의 맹자학파로 이어지고, 자공은 인간의 본성은
惡하므로 禮로써 악한 본성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는 性惡說의 순자학파로 이어진다.
대표 저서는 노나라의 연대기인 역사서를 다시 책으로 편찬한 "春秋", 공자 사후 제자들이 스승
이 남긴 어록(공자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편찬한 "論語"등이있다.
논어는 유교로서 2000여년 중국 사회 정치 윤리도덕의 규범이되었다.
공자의 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제도와 형벌을 중시하는 법보다 도덕적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군주는 백성에게 도덕적인 좌표를 제시하는 역활을 하여야한다고함. 공자는 인간이 갗추어야
할 덕목으로 仁, 義, 禮, 智를 제시하였으며 그 중 仁을 가장 큰 덕목으로 강조하였다.
공자사상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나 황제에게는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 할 뿐더러
권력을 이어갈 수있는 명분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공자는 성인(聖人)으로 받들어져 중국 역사
대대로 왕으로 부터 제사를 받고, 공씨 가문은 황실의 보호아래 많은 특권아래 권력과 재산을
모으게된다.
중국의 공자사상은 모택동 정권인 共産主義 사상과 위배되어 많은 핍박을 받다가 이윽고 홍위
병 때 공묘의 전각과 비석이 무수히 파괴 당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대신 맹자사상은 군주가 잘못할 때는 백성이 군주를 바꿀 수있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어
맹자가 추앙을 받기도한다.
그러나 내가 본 공자의 유적지나. 맹자의 유적지 등은 사상의 발상지 또는 사상의 가치보다
관광 상품으로 전락한 기분이 들어 씁쓸할 뿐더러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연구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더 많이 이곳 곡부를 찾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곡부에서 여장을 푼 호텔 현관 명판
호텔 앞면 전경
곡부거리
곡부거리 모택동의 초상화도 팔고있다
한_오백년-이석화.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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