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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여행] 회연서원/청천서당/성밖숲
파워블로거 미미씨의 상주 여행기 입니다 :D
잠시 경북 성주에 다녀왔어요. 비가 그쳐서 바람이라도 쐴겸 갔던건데
가는 내내 고속도로에서는 폭우가 쏟아졌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고속도로는 정말 무섭더군요. 진심 긴장하고 운전했네요. -_-
다행이도 비와 함께하되 움직이는 동안만 비가 내리고 돌아다니는 기간동안은 좋은 날씨를 타고난 저의 운 덕에,
역시나 운전하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미친 비가 내려도, 그곳에 도착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쳐줬어요. :D
경북 성주
별 고을’ 성주(星州).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지세가 별 모양을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낙동강과 소백산맥의 명산인 가야산의 수려한 풍광이 조화를 이룬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성주를
“산천이 밝고 수려해 일찍이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서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
때문에 고향에 뿌리를 박고 사는 이들은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고 했다.
옛 성산가야의 터전이었던 성주. 성주읍의 동남쪽에 있는 성산(星山)에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능선을 따라 밀집돼 있다.
이 고분군은 가야시대 지배집단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성주와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커다란 고분들로 구성돼 있다.
현재까지는 129기가 확인돼 정비와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무덤은 장방형으로 석실을 만들어 시체를 안치하고
부장품을 함께 넣은 석실분의 구조를 갖고 있다. 석실의 벽은 막돌로 쌓았다.
위를 덮은 천장석(天障石)은 평평하고 큰 돌을 몇 개 덮어 만든 뒤 한쪽 입구를 쌓아 막은
횡구식(橫口式)석실묘와 주부곽식(主副槨式)의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등으로 확인됐다.
주부곽식의 묘들은 장방형의 주곽과, 주곽보다 작은 장방형의 부곽을 나란하게 놓아 당시 순장의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네이버 캐스트, 별고을 성주 글 참조)
경북 성주는 첨에는 참 낯선 지명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성주참외가 바로 여기 경북 성주를 말하는거였더라구요.
아하~~역시!!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대체 어딜까 싶었는데..
참외의 고장이기도 한 성주는 곳곳에서 참외하우스를 참 많이도 볼 수 있답니다.
우야둥둥 성주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회연서원엘 도착했습니다.
이곳 회연서원은 생각했던 곳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에요.
회연서원 [檜淵書院]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경북유형문화재 제51호.
조선시대. 조선 선조 때 문신이었던 한강 정구가 1583년에 회연초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627년 정구를 주향으로 건립하였으며 1690년 사액되었다.
1974년 12월 10일 경북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신정리 봉비암 아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정염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영남 5현(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가운데 1명인 정구가
1583년(선조 16)에 세워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檜淵草堂)이 1627년(인조 5)
지방사림의 여론에 따라 서원이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 사액을 받았다.
경내에는 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양현청은 없어졌다.
현판은 한호가 쓴 것으로 유명하며, 1977년 사당과 동·서무를 고쳐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정구의 문집판인 《심경발휘(心經發揮)》가 보관되어 있다.
[출처] 회연서원 [檜淵書院 ] | 네이버 백과사전
회연서원은 비교적 한산했는데 입구에서 문화해설 해주시는 분께서 나오셔서 여기 문을 통해 들어가자고 해주셨어요.
이 문은 정이품 이상에게 하사되는 문이라고 하셨던거 같은데, 굳이 문을 열지 말고 열려져 있는 옆문을 통해서 들어갔습니다.
거북이를 닮은 용의 모양을 한 위패??도 세워져 있었어요.
아름다운 회연서원. 여기 갔다가 갑자기 옛기억에 빠져버려서 좀 울적해져 버리고 말았지만
암튼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어서 다음에 다시 한번 꼭 가볼 생각이에요.
400년 된 보호수가 회연서원을 지켜주고 있답니다.
여기를 통해 회연서원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저희는 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들어갔는데, 아주 상세하게 얘길 해주시는데
이 죽일넘의 기억력은 그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질 못하니..ㅠㅠ
여기 가실분들은 문화해설사 분의 도움을 받으시면 좋을듯해요.
완전 친철하시더라는...저도 나이먹으면 그런거 했으면 좋겠더라구요.
요건 400년 전에 한강선생님이 계실때 심은 매화나무라고 했던거 같아요.
이곳 회연서원은 백매당(매화100그루)으로 유명하다고 해요.
봄에 가면 매화가 가득하다고해서, 봄에 꼭 갈라구요.
조선 선조 16년(1583)에 성리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이곳에 회연초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했는데,
훗날 문인과 유학자들이 선생의 높은 뜻과 학덕을 기리고자 초당을 헐고 세운 것이 이 서원이라고 합니다.
평탄한 대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인 강당을 중심으로 동·서재를 배치했다.
왼쪽 뒤에는 사당이, 앞뜰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가 있다고 해요. (네이버 캐스트 일부 참조)
불행이도 이번 비 때문에 여기 회연서원도 피해를 보고 말았네요. 현재 보수중..ㅠㅠ
마루에 걸려있는 까만 현판에 써진 글들은 제자들의 이름과 왕가의 제사나 생일날 등을 기록한거라고 하신거 같은데
왕가의 중요한 날짜를 적은글, 은 확실한데 나머지 한개는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_-;;;
이것은 송시열 선생님이 쓰신 시
景晦堂(경회당)
不愧寢(불괴침) - 부끄럼 없는 잠자리
부끄럼 없는 하루를 보내고 드는 잠자리는 꿈도 없으리라는 뜻.
원래 사당은 뒤쪽이나 오른쪽에 있는게 풍수지리로 맞는데, 여기 회연서원에서는 왼쪽에 사당이 있어서
사당을 가는 길목에 담장이 세워져 있거든요. 그게 아마도 경계를 짓기 위해 그렇게 한게 아닐까 싶다고 하셨어요.
崇慕閣 숭모각
이곳에 유품을 모아놓았는데 현재 분실이 되었다고 하네요.
문화재 훔쳐가는 분, 참 천복을 누리시겠네요. 자손대대..악담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이지...
그리고 놀라운 사실!!
저기 나무색이 위와 아래쪽이(하얗게 바랜) 다른 이유가 바로 사진 찍는 분들의 만행으로 색이 달라졌다고해요.
나무의 결에 따라서 보이는 모양이 봉황을 닮았다고 그 사진을 선명하게 찍겠다고
거기에 약칠을 해서 색이 바래져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
참 대단한 사진가 나셨다~그죠?
누가 찍었는지 진심으로 보고 싶네요.
요 나무는 바로 백일홍이라고 해요.
봄날의 회연서원은 정말이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봄에 꼭 다시!!!!
청천서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1호
청천서당(晴川書堂)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당
수량/면적 2동
지정(등록)일 - 1991.05.14
소 재 지 - 경북 성주군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김위
관리자(관리단체) - 김위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성주군 새마을과 054-930-6063
청천서당은 동강 김우옹을 봉향했던 청천서원의 후신으로 영조(英祖) 5년(1729)에 건립된 이래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함께 성주권의 2대서원으로 사림(士林)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정리때 한때 훼철(毁撤)되었으나 동강의 12대 주손(胄孫)인 김호림((金頀林)
심산의 부(心山의 父))에 의해 즉시 청천서당으로 중건되었다. 1910년에는 심산의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청천서원을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라는 간판을 걸고 교사(校舍)로 활용되기도 하고, 심산 김창숙 선생이 한때 거쳐하기도 한 건물이다.
불행이도 청천서당은 공개가 되어 있지 않아요. 굳게 닫힌 문!! ㅠㅠ
근데, 미리 이곳에 방문할때 군청에 연락을 하면 담당자분이 오셔서 문을 열어준다고 하더라구요.
그치만 참 그것도 민망한 노릇이네요.
어찌하여 우리나라는 문화재를 이렇게나 허술하게 보호를 하고 있는걸까요?
분명 예산탓을 하고, 인원탓을 하고...참 가난한 나라에요.
문화적으로는 참 후진국중에서도 이런 후진국이 있을까 싶네요.
동네도 참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데 개 한마리가 따라다니면서 짖어대서 사진도 제대로 못찍고;;;
할머니 한분 딱 만났는데 쳐다도 안보시고..ㅋㅋ
밭에 아줌마는 일하시는라 바쁘고, 시골풍경은 그런거에요. ㅎㅎ
회연서원에서 들은 이야긴데 원래 회연서원은 양강을 모시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파를 나눠 결국 동강선생을 모시고
이곳 청천서당을 세운거라고 하시더라구요. 예나 지금이나 그넘의 파가 문제로군요;;;
청천서당 /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경북유형문화재 제261호. 조선시대.
1622년에 회연서원을 짓고 한강 정구선생을 향사해오다 1628년에 동강 김우옹선생을 추향하였다.
1729년 동강 김우용의 위패를 이봉하여 청천서원을 건립 성주목의 2대서원으로 사림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청천서당으로 개칭하였다.
[출처] 청천서당 [晴川書堂 ] | 네이버 백과사전
회연서원도 그렇고, 청천서당도 그렇고 백일홍이 피어 서당의 모습을 더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네요.
이곳 청천서당은 대중교통을 타고 가보기엔 조금 불편할거 같아요.
저도 차를 가지고 갔지만 기왕이면 대중교통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 곳은 문화재여도, 나라에서 보호를 하고 있어도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는듯.
뭔가 국회로 나가서 이런 부분은 다 뜯어 고쳐버리고 싶어진달까...
점심으로 시골밥상 정식을 주문했는데, 참 경상도 음식은 전라도 음식만큼 짜네요. -_-;;
뭔가 김치찌개든 된장찌개를 시켰어야 했는지도 몰라요. 꾸역꾸역 배만 채웠네요.
사실 때가 너무 지나서 아무곳이나 들어간 제 탓이지요;; ㅋㅋ
성밖숲
마지막으로 들른 성밖숲. 여기 도착하니 비님께서 또 쏟아지기 시작...ㅠㅠ
진짜로 잠깐 둘러볼 수 밖에 없었네요. 지겨운 비..
성주 경산리 성밖숲 [星州京山里城ㅡ ]
성주 경산리의 성밖숲 /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천연기념물 제403호. 왕버들로 이루어진 숲.
1999년 4월 6일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1380년대에 성주읍의 지세를 흥성하게 한다는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조성된 숲이다.
300년~500년생 왕버들 59주가 자라고 있다.
《경산지(京山誌)》 및《성산지(星山誌)》에는 조선 중엽에 서문밖 마을의 소년들이 아무 까닭 없이 죽는 등
흉사가 이어지는 이유가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라 하여
중간 지점에 숲을 조성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지관(地官)의 말에 따라 토성으로 된 성주읍성의 서문밖 이천변에 밤나무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하였다.
성밖숲은 거대한 왕버들로 이루어진 단순림으로 마을의 역사, 문화, 신앙 및
풍수지리에 따라 조성되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과 토착적인 정신문화의 생활터이다.
마을의 풍치와 보호를 위한 선조의 전통적 자연관을 보여주는 전통적 마을 비보림(裨補林)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천연기념물 제403호
성주 경산리 성밖숲(星州 京山里 城밖숲)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민속
수량/면적 - 59주/38,944㎡(지정구역)
지정(등록)일 - 1999.04.06
소 재 지 -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446-1번지등
관리자(관리단체) - 경북 성주군
여기저기 들러보고 싶었는데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결국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경북 성주 탐방은 여기서 끝이 나버리고 말았네요. -_-;;
정말이지 비 지겨워 죽겠는데 낼부터 또 비온다고...ㅠ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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