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당(蓼堂) 제병근(諸炳根) 선생 비문
요당(蓼堂) 선생은 성은 제(諸), 이름은 병근(炳根), 자는 도견(道見) 1888년 음력 10월 13일 아버지 동식공(東寔公)과 어머니 최씨의 외아들로 경남 함만군 칠원면 척곡리에서 났다. 제씨(諸氏)는 한(漢)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후예로, 그의 증손 충(忠)이 신라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옴으로써 그 가문이 비롯됐다. 고려 현종(顯宗) 때 왕명(王名)으로 성을 갈라, 갈(葛)을 버리고 제(諸)를 쓰게하여 남양군(南陽君)을 봉함으로 부터 제씨라 부르게 되었다. 대대로 유교 선비 집안으로 내려오며 이조 끝에 이르기까지 문(文)ㆍ무(武)ㆍ잡(雜)편으로 벼슬한 이들이 많을 뿐 아니라 학문과 덕행에 두드러진 선비를 많이 낸 이름난 가문이다.
선생의 할아버지 한택공(漢澤公)은 덕행으로 이름이 있었고 아버지 동식공(東寔公)은 젊어서 이미 학문에 두드러진 것이 있었다. 불행히 명이 길지 못해 선생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므로, 선생의 자라남과 교육은 어머니와 백부 운오공(雲塢公)의 힘으로 되었다. 최씨는 특별한 천품을 가지고 났던 이로, 억센 의지로 슬픈 운명을 극복해 가운(家運)을 붙들 어 갔을 뿐 아니라 엄격한 법도로 아들에게 “사람되는 길”을 가르치기에 심혈을 기울여 삼십이 넘은 후에도 체벌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아들도 거기 잘 순종했으므로 마을이 일컬어 “엄모출효자(嚴母出孝子)”라 했다. 또 운오공은 벌써부터 이름났던 선비인데 조카의 어려서 외롭게 된 정경을 불쌍히 여겨 친자식 같이 훈도했고 선생도 거기 잘 복종해 밤낮으로 모시고 게으르지 않고 학업을 힘썼으므로 일찍부터 그 소문이 근방 여러 선비들 사이에 높아 마침내 학문과 인격을 대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다 대대로 유교 정신에 따라 쌓아온 가풍, 유덕(遺德)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받지 않는 그릇에 어찌 담기는 것이 있을까. 선생 스스로가 어려서부터 깨달아 힘씀이 있었으므로야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선생에게서 세 가지를 보는 것이 있으니, 하나 그 지극한 효도요, 둘째는 그 온후, 염결(廉潔)한 군자풍의 인격이요, 셋째는 그 진지한 탐구 정신이다. 역경에 반발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귀한 점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보지 못한 것이 하늘에 사무친 한이었다. 이것은 선생의 일생의 기폭제였다. 선생은 “효위백행지본(孝爲百行之本)” “군자 무본본입이도생(君子務本 本立而道生)”을 실생활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첫째 것이 있었으면 둘째 것은 저절로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주자학 일색으로 여러 백 년을 내려온 우리나라에 “노오노 유오유(老吾老 幼吾幼)” 할 줄은 알아도 “이급인지노 이급인지유(以及人之老 以及人之幼)”할 줄은 몰랐던 선비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 점에서도 선생은 뛰어났다. 선생이야말로 “추기급인(推己及人)” 을 하려고 애썼던 선비였다. 사세(四世) 선조에 다 묘전(墓田)을 두고, 언제나 곡식을 저축해 두었다가 봄철 양식이 부족할 때에 친척 이웃 간에 어려운 이에게 돌려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더 머리 수그려지는 것은 선생의 구도 정신이었다. 벌써 젊어서도 당시의 대가들과 사귀며 토론하고 연구하여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것은 늙을수록 더한 것 같다. 선생은 임오(千午), 곧 1942년 여름에 족제(族弟)되는 경남 고성군 대가면 동지동에서 동곡서당을 운영하던 제 영근 ( 호는 함재涵齋, 자는 경집敬執 씨와 함께 용인(龍仁)의 큰선비 현산(玄山) 이현규(李玄圭)선생을 방문했고, 거기에 대해 현산이 시(詩)와 서(序)를 써준 것이 있는데, 거기 보면 그전에도 방문했던 일이 있는 것 같고, 또 무자(戊子), 곧 1948년에 역시 같은 교의(交誼)를 가지는 조영래(趙永來) 씨가 제 영근 ( 호는 함재, 자는 경집敬執 씨에게 써 보낸「요당지십일수서」(赛堂之十一壽序)가 있는데, 그 글들을 보면 그들의 서로 오고가는 목적이 순전히 다른 것 아니고 순전히 유교 이치 토론을 위한 것이며, 그 토론과 사귐의 태도가 얼마나 진지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생이 나신 1888년은 갑신정변이 있은 지 4년 후다. 그러니 한일합병이 되어 나라가 망하던 것은 선생의 23세 때요, 3.1운동은 33세 때다. 그러는 데에 따라 종래의 생활을 구습이라 하고 낯선 새것을 보고는 문명이라 하며, 양구자가 온다고 하다가 왜놈의 세상이 됐고, 공자, 맹자 대신 하나님, 예수를 가르친다. 그러니 이날까지 인륜, 도덕이라면 도맡아서 지도하고 있는 줄 자부해왔던 그들의 당하는 소외감이 얼마나 했을까.
선생이 위대한 선배로 존경하는 이현규 선생을 찾아갈 때에 심정이 어떠했을까는 그때의 세상 형편을 생각하면서 상상해 보아야 알 일이다. 1942년이라면 일본의 황국신민 정책이 한창이던 때다. 이때에 민간에 있으면서 사회의 기반으로 자부하던 이들의 선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현산의 아생비목석(我生非木石) 번우전심격(煩憂填心 隔), 행음부빙궤(行吟復凭几) 노발투한책(露髮投汗幢) 추필기소사(抽筆寄所思), 앙참운간핵(仰慚雲間翮)의 비통한 시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요, 그 뜻을 아는 것이 요당의 심경을 이해하는 일이다.
천릿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가서 밤을 밝혀가며 토론한 것이 무엇일까. 말이 아닌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건지느냐 하는 것 아니었을까. 생각할수록 숙연해짐을 금치 못한다. 두 번다 경전을 더 깊이파고, 이해하기를 강조함을 반복했을 뿐, 나도 나아가지 못하기는 더한 사람이라고 안타까워 한 것이 어찌 현산 한 사람의 마음만일까. 유교 선비 전체의 일 아닐까.
그러나 그렇듯 가이행즉행(可以行則行), 가이지즉지(可以止則止)하여 능히 여민유지(與民由之)하는 활달은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늘같이 한 무더기로 썩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은 것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독행기도(獨行其道)해 지키는 것은 있다. 이랬기 때문에 그 답답한 6.25 전후의 참혹 속에서 세상을 떠나면서도 조용히 자(子) 여질(與侄)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며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여 여기 이르면 “성패이둔(成敗利純)은 제가 알 바 아니고 그저 국궁진췌(鞠躬盡瘁) 하여 사이후이(死而後已)”라는 공명(公明)의 옛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다. 1955년 을미(乙未) 8월 10일에 조용히 운명하시니 향년 69세, 4남 3녀를 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