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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물의 뜻 / 민 7:12-89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각 지파를 대표하는 12명의 지휘관들이 12일 동안 제단의 봉헌을 위한 헌물과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지파가 회막을 중심으로 진을 쳤습니다. 그 배진한 순서에 따라서 유다지파로부터 납달리 지파에 이르기까지 질서 있게 예물을 바쳤습니다. 헌물과 제물의 내용 및 봉헌 방법이 동일합니다.
우리 생각에 12지파의 지휘관들이 각각 동일하게 이런 것들을 다 바쳤다고 한꺼번에 기록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한 지파씩 자세하게 기록하였을까요? 아마 여러분도 성경을 읽을 때 7장을 지루하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12지파의 지휘관들의 행위의 단순한 사실에 관한 반복기사가 아니고 그 예물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후대에 남기는 모범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일한 종류와 동일한 분량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누구든지 평등한 자격으로 경배하며 주신 은혜를 함께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적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의문이 가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루에 한 사람씩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을까요? 물론 예물을 한꺼번에 다 가지고 오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성경책에 한 두 줄이면 되는 것을 길게 반복해서 기록하였을까요? 성경 원본은 파피루스에 기록하였기에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럼에도 일일이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물의 종류가 다양합니다. 이 예물의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물은 계속하여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합니다.
성막이 봉헌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그려서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계속 드려야 합니다. ‘드린다’는 이 말 자체가 계속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단을 만드시고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시고 제사장은 불을 끄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계속성을 의미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여기에서 ‘드리라’는 원문의 뜻에 반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계속 드리는 것입니다. 똑같은 행위입니다. 12일간 똑같이 지휘관들이 제물과 예물을 드렸습니다.드리는 것은 내게 없는 것입니다. 바치는 것입니다.
드렸다가 다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드림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하나님께 바치고 도로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치고 몇 배로 하나님이 주실 것을 생각하고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일조 냈는데 왜 갑절로 주시지 않느냐 원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응답이 없어도, 축복이 없어도, 계속해서 바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몸을 드리라는 것은 너희 생이, 삶이 곧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숨 쉬는 동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드리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가 이렇게 기쁨으로 드릴 힘이 있게 하신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 감사해야 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목사님, 헌금얘기 하신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바치라.’ 이 소리를 매일 들으면 어떻습니까? 이 이상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당 짓고 교육관 짓고 선교관 지어야 합니까? 요즘같이 불황 가운데 있는데 무슨 돈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서쓰기 공동체’라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한 자리에 앉아서 많은 시간 기도하고 유서를 씁니다. 유서를 봉하고 변호사에게 맡깁니다.
1년이 지나면 다시 모여서 지난 번 유서는 찢어버리고 새로운 유서를 씁니다. 왜냐하면 지난 1년 동안 재산이 증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매년 반복합니다. 주로 재산처리, 유산 물림에 관하여 기록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대학을 졸업한 자녀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소요되는 유산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자녀들의 자세가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서를 써서 변호사에게 맡겨놓았는데 나에게는 한 푼도 없다. 이렇게 결정되니 자녀들이 훨씬 열심히 살더라는 것입니다.
또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 마음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이 재산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다만 빌려 쓰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돈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현장에서 살아갑니다. 이 우주의 종말이 있고, 나의 종말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말세의 징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태학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정치 경제적으로 보나 그야말로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을 예언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라.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하라. 은혜를 받은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말씀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다 계속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주님께 헌신하고 봉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2. 예물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바친 그릇들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필요한 제사용이고, 모든 가축들은 정결한 제사를 위한 제물입니다. 예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되고 성별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표현하였습니다.
저들이 바친 것을 보면 먼저 고운 가루를 소제물로 바쳤습니다. 소제는 유일하게 피가 없는 곡물의 제사입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넣어 유향과 함께 불사르게 될 때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소제는 하나님과 교제를 뜻하고 있습니다. 소제에서 중요한 것은 고운 가루입니다. 덩어리가 있으면 안 됩니다. 부서져야 되고,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몸을 드려 봉사하거나 물질이나 시간을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교제할 때 그냥 하는 것보다 서로 빵이나 차를 먹고 마시며 교제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운 가루로 빵을 만들어 화덕에 굽든지 번철에 부치든지 하여 빵 냄새를 나게 하여 하나님이 함께 참여하시도록 하였습니다. 예물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번제물을 위하여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 년 된 어린 수양 하나입니다. 번제물은 피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불에 태워 드렸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예물입니다.
드렸다는 것은 나에게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드림으로 끝나는 것이 번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몇 배 다시 돌려받겠다고 바치는 자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바치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것으로 끝나고 기대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 하시는 것이지 축복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봉사한 것, 잘하였든지 못하였든지 이미 바쳐진 것입니다. 결과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고, 알아주기를 바랄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고, 누가 이야기 한다고 시험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불에 타 버린 것 아닙니까? 연기되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습니다. 제물 타는 냄새, 쉽게 설명 드리면 양념하지 않은 짐승이 타는 것입니다. 그 냄새가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향기롭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헌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드리는 자체를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속죄 제물로는 숫염소 하나를 드렸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죄에 대하여 용서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화목 제물로는 소 둘에, 수양 다섯에 숫염소 다섯, 1년 된 어린 숫양 다섯을 드렸습니다. 화목 제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이는 자원해서 드리기 때문에 자원제라고 합니다.
12지파의 지휘관들이 드린 예물은 하나님께 복을 받겠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시내 광야에서 그 많은 예물을 드린 것은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이 되겠다고 하는 표시였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차음으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왕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집에서 양치던 목자 318명을 데리고 나가서 연합군과 싸워 이긴 것이 너무 이상하고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 나와서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하나님이 축복하여 전쟁에서 이겼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기도를 해줍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십의 일을 드립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사인으로 드렸습니다.
여러분,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 이전에 있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겠습니다.’하는 표시가 십일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연보나 헌금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마태 26:26절에서 주님이 마지막 성만찬을 거행하시면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주며 ‘이것은 나의 몸이다.’ 잔을 가지고 나누어 주며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축복이라는 말이 연보와 관련이 있습니다. 연보는 주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가 헌금합니까? 누가 몸 바쳐 헌신합니까?
주님의 죽으심, 대속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 합니다. 교회 오래 나와도, 직분 받았어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지 못하면 못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분명하게 믿는 자가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누가 24:50절에 보면 주님이 승천하실 때 모인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축복이라는 말이 연보의 뜻이 있습니다. 연보는 천국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누가 헌금합니까? 누가 시간과 몸을 바쳐 봉사합니까? 내세 신앙, 부활신앙, 천국에 확신이 있을 때 바치게 됩니다. 내세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은 헌금하기 힘이 듭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헌금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남이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물질로 표현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무엇보다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면 안 되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3. 예물은 다 기록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왜 이렇게 똑같은 내용을 12번이나 반복하였을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메튜 헨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하나님께 꾸어 준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록하였다가 다시 갚아 주기 위함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좋은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우린의 작은 봉사라도 낱낱이 기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이라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히 6:10절 말씀에 보니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섬긴 것,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12지파의 지휘관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서 먼 후일 갈보리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읽어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모든 내용을 오늘 우리가 잃어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지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이름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다 기억하시고, 우리의 행위를 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삼하 23장에는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과 그의 행적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8절) 하는 식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바울의 친구들의 이름, 복음 전파자와 협력자들의 이름이 24명 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뵈뵈는 여자입니다. 바울의 보호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느 부부입니다. ‘저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내 놓은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딤후 1:16절에는 오네시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딤후 4:14절에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 바울을 도와주거나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성경책에 기록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의해서 읽어야 할 말씀입니다. 말 3:16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정한 날에 특별한 소유를 삼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롬 16:12절에 보면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와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버시는 두 사람과 비교하여 따로 기록하였습니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주안에서 수고한 사람이고, 버시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실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행위의 실체, 양상, 스타일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와 봉사에 대해서 어떻게 수고하였는지, 그 양상도 평가하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성도를 위하여, 봉사하고 바친 모든 것도 기록이 되고, 어떻게 수고하였느냐? 억지로 하였느냐? 체면 때문에 하였느냐?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였느냐? 하는 것이 다 기록이 됩니다.
여러분, 통계청을 아시지요? 매일 매순간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컴퓨터에 기록합니다. 오늘 어린아이가 몇 명이 태어나고, 몇 명이 죽었다. 몇 건의 교통사고가 있었고, 몇 쌍이 결혼하였고, 몇 쌍이 이혼하였다 등등입니다.
세상의 일도 다 기록이 되는데,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바친 모든 것이 기록이 없겠습니까? 바울 사도나 십자가상에서 구원 받은 강도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상을 받겠습니까?
쓰지 않고 절약하여 성전 건축하고, 교육관 건축하고 선교관 건축하려는 성도와 그냥 주일에 왔다 갔다 하다가 하늘나라에 간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상이 같겠습니까?
냉수 한 컵이라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연보궤에 넣는 것을 주시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적은 것이지만 다 기록이 되어 의인의 부활 때 상 주실 것입니다.
계 22:11-12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땅에 기록화지 말기 바랍니다. 여호와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 자는 흙에 기록한다고 예레미야 17장에서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늘에 있는 책에 기록되어야지 땅에 있는 책에 기록되면 헛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셔서 보다 철저한 헌신과 봉사를 기쁨과 감격 속에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2지파의 봉헌 예물이 바쳐지고 그것이 합계된 후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말씀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일일이 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백성들이 드린 예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50: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힘껏 충성하여 영화로운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