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이 동 모(6회, 농업과 졸)
․전 서산시 농업기술센타
․현 서산향토연구회원
6·25때의 학교사정은 어떠하였는가? 6·25한국동란은 대한민국의 모든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 7월 12일에 휴교령이 내려졌다고 하나 이미 그 이전에 학교의 모든 기능은 마비상태와 다름 없었다. 교사와 학생은 뿔뿔이 흩어졌다. 언제 다시 등교하라는 지시도 못 받고 각자 흩어져 갔다.
필자가 농림중 3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할 일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한편 눈이 씨뻘겋게 충혈된 좌익분자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위축감을 느꼈다. 고삐 풀린 환경에서 난생 처음 담배를 피웠고 술도 마셔봤다. 방향 없는 나날이었다. 아마 이 때 학생의 본분을 잃고 나쁜 길로 빠진 학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50년 7월 하순 경에 모든 학생은 등교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제야 정식으로 학교수업이 되는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등교하였다. 그러나, 학교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수업은커녕 선생님도 몇 분 안 계시고 고학년의 좌익학생들만이 설쳐대는데 강압적인 자세로 북한국가도 가르치고 “영용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진출하였고 부산 함락도 시간문제”라고 자랑을 늘어놓으며, 우리 학생도 영광스런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하여야 한다며 의용군에 갈 것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일장 연설을 마친 좌익학생은 “지금부터 의용군 지원자를 선발하겠다.”는 것이었다. 본 교사 좌측 끝에 있는 대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어리둥절하여 좌우로 서로 쳐다볼 뿐 지원자가 없었다. 그러자 강당 마루 한 복판에 백묵으로 금을 긋고 “의용군에 갈 사람은 내가 있는 선 안으로 들어오고 의용군에 가기 싫은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 있으라”고 하자 거의 모든 학생이 좌익학생 있는 쪽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누가 감히 거역할 것이며, 그 후환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이렇게 해서 선발된 의용군 지원자는, 지금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일주일쯤 후에 서산 동문동 소재 천주교회로 몇 시까지 나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발된 필자는 귀가하여 부모님께 의용군 지원 사실을 알리고 온 가족의 걱정 속에 입대일을 맞아 천주교회를 향하여 집을 나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공산당원의 전송도 받았다. 아무 의식도 없이 대고개(서산에서 3km)를 넘어 내려가는데 마침 서산읍내에서 양대동 집으로 돌아오던 같은 동네에 사는 선배 N형(당시 농림중 5학년)을 만나게 되었다.
“너 이른 아침에 어디 가니?” “의용군에 입대하기 위하여 갑니다.” “이런 순진하긴. 야, 너 이름을 적었니, 지원서를 냈니? 아무 근거 없으니 이 길로 빨리 피해라.”는 것이었다.
그때야 정신이 퍼뜩 들어 개울 가 논뚝 밑으로 해서 양대 염전을 지나 장동 산 속 억새밭 속에 온종일 숨었다가 밤에 귀가하였다. N형이 아니었더라면 큰일날 뻔했다. 고맙고 감사한 분이다. 이렇게 해서 의용군을 모면하였지만 필자와 같은 경우는 아주 초기의 일이었고 그 후에는 의용군 선발기준도 어느 정도 틀이 잡혔던 것 같다. 신체 조건을 따져 허약 체질이라든지 키 150cm이하의 사람은 선발 대상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선발 방법에 있어서도 정문에 보초를 세우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나마 지원서를 나누어 주고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동의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멀리 도망하거나 감쪽같이 피신하기 전에는 집에 있으면서 의용군을 모면하기는 어려운 분위기였다. 동창인 Y는 부득이 의용군에 모집되어 천안 목천까지 끌려갔다가 음력 8월 그믐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간신히 대열에서 이탈, 언덕 밑으로 굴러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소식 없는 필자의 동기생도 꽤 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당시 나이 17~8세의 앳된 청소년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학교운영은 될 수 없었고 초조와 불안, 전도된 가치와 질서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생활이었다. 그러던 중 9·28 수복으로 다소 안정을 찾는 듯 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1·4후퇴를 맞이하게 되어 남자들은 거의 정처없이 남쪽을 향하여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필자도 공주까지 피난 갔었다.
이러한 혼돈과 격변의 시기를 보낸 후 1951년 9월 1일부로 새 교육법이 시행되면서 학제가 6·3·3·4년제로 개편되어 서산농림중은 3년제 서산농림고등학교로, 서산중학교는 3년제 중학교로 개편 인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 농림중 3·4·5학년은 자동적으로 서산농고 1·2·3학년으로, 그리고 농림중 1·2학년은 서산중 2·3학년으로 옮기게 되었다. 또한 서산중 3·4·5학년도 서산농고 1·2·3학년에 편입되는 일대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6·25동란이후의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이 학제 개편 이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6·25동란으로 객지에서 살던 많은 고향분들이 귀향하여 있었는데 그 바람에 서산농고는 아주 훌륭한 선생님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대 재직했던 선생님으로 피난 온 유학수(화학), 이희균(교육학), 전용신(물리)선생님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훌륭한 선생님이 많이 계셨던 걸로 기억된다. 앞의 세 선생님은 나중에 모두 상경하여 유수한 대학 교수가 되셨다. 그런데 이희균 선생님의 교육학 강의로 이 과목을 이수한 학생들에게 중등교사 자격증을 주었는데 이 자격증을 기반으로 초등학교 교사직에 많이 진출하게 되었고 그래서 필자의 동기생 중에도 전·현직 교장이 다수 있다. 귀향했던 선생님은 아니지만 조재억 국어 선생님도 많은 학생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나중에 대학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집필활동을 활발히 하셨으며 좋은 책자도 발간하셨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고 또 당시에는 입시경쟁도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필자의 동기생 중에는 서울대학을 비롯한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하였고 그 외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데 큰 애로가 없었다. 그러므로, 과외공부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있음을 느낀다. 필자의 서산농고 재학 시절은 3학년 후반 정전될 때까지 내내 전쟁상태였다. 전시 체제하의 학교생활이었기 때문에 학교교육을 통해 학도호국단 훈련을 강화했다. 배속 장교가 부임하였고 또 정기적으로 관할 연대사령관의 임석하에 사열도 가졌다. 그래서, 제 4회 선배들이 졸업할 때는 본인의 희망에 의하여 장교로 갈 수 있고 사병으로 입대할 수도 있었다. 물론 장교를 희망하는 경우에는 14주 정도의 장교훈련을 별도로 받고 임관되었다. 필자의 1년 선배인 제 5회의 경우는 미리 사관(장교)임명장을 수여하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대학입학증명서를 가지고 병무청에 가서 사관임명을 말소하였고 비진학 학생은 장교로 선발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이 모두 6·25전쟁으로 생긴 비정상적인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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