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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동시는 문학적인 것인가?
신지영(시인·평론가)
예술의 규준
대중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난 이십여 년에 걸쳐 현재까지 진행중인 흥미로운 논쟁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거대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케이팝 스타(K-Pop Star)’들, 이른바 ‘아이돌(Idol)’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뮤지션(Musician), 또는 아티스트(Artist)인가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엔터테이너(Entertainer)로서 기획사가 제작한 문화상품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논쟁이 바로 그 것이다.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라는 지칭이 담고 있는 함의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다루기로 하고) 어쨌든 아이돌이나 뮤지션을 가르는 객관적인 기준이나, 누군가를 공식적으로 아티스트로 명명하는 명시적인 자격증이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닌 만큼, 이 논쟁은 자신이 지지하는 아이돌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평가를 받기를 원하는 팬덤과 아이돌문화와 팬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긴 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각자가 논쟁에 투자한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해당 논쟁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언론의 문화면이나 웹 커뮤니티의 구석진 곳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국지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아이돌이 뮤지션 또는 아티스트라고 이야기하는 측은 아이돌이 행하는 모든 퍼포먼스, 예컨대 이른바 칼군무로 대변되는 신체동작, 고음과 저음을 넘나드는 보컬, 연주, 작사, 작곡 등 그들이 행하는 행위가 이른바 뮤지션이라 불리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행위와 객관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며, 오히려 오랜 기간의 연습생시절 겪은 훈련으로 더 나은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것을 주장의 논거로 삼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인습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스놉(snob)’으로 지칭하며 비난한다.
반면 그들의 반대편에서 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이돌과 뮤지션을 가르는 기준은 외부로 보이는 퍼포먼스의 형식이나 수준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음악에 대한 태도이며, 또한 뮤지션은 상업적 성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획사에 소속되어 기획사나 팬덤이 원하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 자신이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표현을 하는 지점에서 구분된다며 아이돌을 지지하는 팬덤을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고 거짓되고 속된 가치에 열광하는 ‘키치(Kitsch)’로 조롱한다.
이처럼 아이돌에 대한 각자의 태도와,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를 규준하는 각자의 주장에 대한 거리만큼이나 격렬한 서로에 대한 증오의 교환은 아이돌과 뮤지션, 엔터테이너와 예술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심도깊은 논의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아이돌이라는 문화적 형식에 대한 옹호와 반대라는 단순하게 이분화된 지점에서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논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이들의 논쟁이 도대체 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에 있다. 사실 뮤지션이란 표현은 사전적으로 음악을 창작하거나 창작된 음악을 실연하는 공연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전적 의미에서 아이돌은 뮤지션이라는 개념이 가진 외연에 포함되는 것은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벌어지는 까닭은 이는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라는 지칭이 사전적 정의 이외에 그 안에 담고 있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는 단순히 음악이나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들의 논쟁에서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사실 해당 논쟁의 주요 논점들이 최근의 아이돌 문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대중과 본격, 상업과 순수, 수단과 자기목적적 등으로 구분되는 거의 모든 분야의 문화형식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해당 논쟁은 매우 유서깊은 것으로써 근대 이후 예술의 정체성을 가리는 가장 핵심되는 요소인 예술의 자율성에 기반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 또한 그 개념이 내포하는 바는,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언어로 표현한 모든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분명히 구분되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장의 한 켠에서 (출판)기획자와 작가가 협의하거나 또는 작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정한 주제나 특정한 형식을 선별하여 집필한 후 출판하는 이른바 기획출판, 그중에서도 특히 자율성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받는 (동)시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기인한다.
자율성
아이돌이 아티스트인지 여부와 마찬가지로 기획동시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오늘날 예술을 예술로 성립시키는 가장 주요한 요인중 하나인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성된 우연적인 관념이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이전까지 사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역에서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무척 낯선 개념이었다. 그 이전의 예술은 램브란트의 공방에서 보듯이 누군가의 주문이 들어오면 화가와 도제들이 제작과정을 분담하여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보편적인 풍경이었다. 이처럼 이전의 예술시스템은 사람들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닌 생활과 밀착한 것으로써 특정한 기술(techne)을 가진 장인이 기술을 필요로 하던 사람에게 대가를 받고 소유권을 이전하는 도구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이러한 풍경에 대한 저항에서 기원된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라는 구호로 대변되는 프랑스 낭만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된 예술의 자율성은 이전의 예술 시스템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의 활동을 경험적 현실과 유리된 것을 주된 소재로 다루며 또한 그 활동이 예술 이외의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이러한 활동을 통해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을 사회체제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이른바 '순수예술(fine art)'이라고 불리는 이 태도는 곧 아도르노를 비롯한 아카데미와 평론가 집단에 의해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이후 근대미학과 이전의 미학을 가르는 핵심요소로 자리하며 오늘날의 주류적인 예술 시스템을 구성한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분과학문과 달리 사회 체제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이러한 태도로 인해 예술이 사회에서 특수한 지위를 점유하는 데 있다. ‘문학은 그 쓸모없음으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그럼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요지의 문학평론가 김현의 언명은 오늘날의 예술이 자리하는 곳이 어딘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아이돌이 자신의 태도를 기획사나 팬덤에 영합하여 상업적인 성공에 두고 있는 이상 뮤지션이나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다는 완강한 주장 또한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기획동시가 오늘날 문학의 영역에 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 또한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기획이란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을 마련하는 일련의 행동양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문학을 문학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획동시는 여타의 동시들과 달리 문학의 자율성을 중대하게 위반함으로써 문학의 영역에 속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동시대성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위와 같은 판단의 기준이 된 예술 또는 문학의 자율성이란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필연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원래 순수한 것이다라는 절대적인 기준은 애초부터 부재하는 것이며 문학이 삶과 유리되어야한다는 관념 또한 후천적으로 부착된 것이다. 요컨대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문학이 무목적적이어야 한다는 기준 또한 절대적인 필연성을 가진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시대적, 역사적 사정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율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문제들 또한 외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하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한 것이다.
예술과 삶의 융합을 주장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의 다양한 갈래들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들에게 예술과 삶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만의 구역에서 고립된 예술을 거리로 이끌어 삶과 예술을 결합시켜 이전까지의 삶을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키는 모든 과정 자체를 예술로 보았다.
그리고 예술활동에 대한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예술활동을 수행하는 주체에 대한 관념 또한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삶의 모든 활동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 삶을 영위하는 사람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이로써 예술활동은 어떤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만이 행할 수 있는 특권적인 행동이 아니라 모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태도에서는 예술은 자기만의 자족적인 논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자신이 서 있는 삶과 현실의 고유한 문제인식을 반영하는 데 있다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삶과 예술을 결합하는 이러한 태도가 예술의 자율성 이전 시대로의 단순한 회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방가르드가 지향하는 것은 예술과 삶의 결합이지 생존의 도구로써 일종의 임노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이돌이 뮤지션이자 아티스트라는 것을 강력하게 긍정하는 사람들조차 마음의 어느 한 측면에서는 무언가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논리에 기초한다. 기획(동)시 또한 이와 유사하다.
문학적인 것
오늘날 한국의 (어린이-청소년)문학장은 크게 이 두 가지의 문학적 태도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장에 소속된 사람들이 모두 어느 하나의 태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어느 한 가지의 태도를 중심으로 다른 태도를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다. 예컨대 동시의 주된 미덕을 서정성으로 정의하면서도 세월호 참사등 이슈가 되는 사회문제를 놓치지 않고 언급하거나, 동시의 본령을 동시대성으로 생각하며 지금 여기의 어린이들이 겪는 문제적 상황에 집중하면서도 실험성이나 서정성을 소홀히 하지 않는 창작의 경향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문학으로 승인받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는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 문학장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합의한 문학적인 것, 예컨대 동시를 통해 정서적인 감응을 이끌어내는 서정성이나, 평상시 우리의 시야에 쉽게 확보되지 않는 소수자와 약자의 현실을 다루는 윤리적인 것들이 이러한 동시들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문학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기획동시이다. 명칭부터 조금은 논쟁적인 이 기획동시는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두 가지 문학적 태도에 조금은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획동시가 다루는 주제들이 ‘속담’이나 ‘고사성어’와 같은 언어학습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역사’나 ‘신화’ 등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을 습득하는 것과 같이 학습이라는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그렇다. 이는 예술이 무언가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자율성이 아니라 타율성을 가지는 것은 물론, 기획동시를 쓰도록 강제한 외부의 요인이 창작활동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혐의를 쉽게 떨쳐버릴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 단독의 기획이 아닌 저자와 기획자가 협의를 거친 기획동시의 경우는 창작 과정에서 기획자라는 저자 이외의 다른 사람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과연 문학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동시를 포함한 문학텍스트는 저자가 자신이 확립한 관념이나 사상을 언어 텍스트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기획동시의 경우 저자의 관념만이 아닌 기획자의 관념이 포함된 것으로써 이런 믿음에 균열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획동시
이런 우려와는 달리 오늘날 출간되는 기획동시는 그 상당수가 문학적인 것이라 부르기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각각의 꽃에 대한 전설과 정보를 담은 이상교나, 겨레의 영산으로서 누구나 가보고 싶지만 가보기 어려운 백두산에 자연을 전달한 전병호, 급격한 개발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에게 보내는 반성문’으로 환경의 소중함을 담은 박혜선,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상식과 특징을 표현’한 같은 강지인의 기획동시집들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겹겹 그리움으로/백일을 종일 피는 꽃”이라는 표현을 보자. 이 시는 백일홍의 이름과 외양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정보를 전달하는 그 서정성은 다른 어떤 무목적성을 가진 동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반면 “할아버지는 다짐했다지요./ 언젠가 돌아가리라 내 고향!” 과 같이 백두산의 풍경을 다루면서도 동시대인이 겪는 분단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지나치지 않은 표현 또한 문학적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발 지구의 물이 줄어들지 말게 해 달라고/찰랑찰랑 지구의 물그릇 위로”라는 표현에서처럼 지구를 물그릇으로 인식하는 참신한 비유나, “큰 소리로 짖으면/큰일 나니까//살랑살랑 꼬리로/말을 해야 하거든요”처럼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개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윤리적인 태도 또한 동시대의 문학적인 것으로 승인받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창작의 과정에 기획자가 개입하는 문제 또한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문학장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저자라는 단일한 종의 집단이 살아가는 좁은 의미의 문단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 편집자, 비평가를 포함한 아카데미, 미디어가 상호작용하며 공생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에 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받으며 각자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요소로 기능하는 것이 오늘날 문학장에 대한 인식이다. 기획자와 저자 또한 마찬가지다. 저자는 창작의 주체이고, 기획자나 편집자는 저자의 의도를 보충하거나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기획동시의 목적이 생존을 위한 임노동의 성격을 가지는 것 또한 비판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문학이 노동이 요소를 강조할수록 체제의 외부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예술의 성격이 옅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창작행위에서 생존으로서의 노동을 전부 배제한다면 현실적으로 문학의 존립근거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기획동시 중의 어떤 것들은 아무리 양보해도 문학적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그러한 것들이 가지는 문학적 태도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애초에 문학 이전의 언어 텍스트 자체의 기본이 되지 않는 것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선별할 수 있다면 기획동시는 지속성을 가지고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푸른 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푸른 문학상 새로운 평론가상, 창비 좋은 어린이 책 등을 받았다. 동시집 『지구영웅 패트병의 달인』, 청소년 시집 『넌 아직 몰라도 돼』, 동화집 『짜구할매 손녀가 왔다』, 『퍼펙트 아이돌 클럽』, 『배려의 여왕이 할 말이 있대』, 청소년 소설집 『프렌즈』, 『내 친구는 슈퍼스타』 등을 펴냈다.
* 출처: 계간 <<동시 먹는 달팽이>>(2018 여름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