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이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차례를 지낼 때 올릴 지방(紙榜)을 컴퓨터에서 출력을 했다. 지난 명절 때까지만 해도 직접 썼는데 한자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컴퓨터에서 출력을 했던 것이다. 고조부와 고조모는 각각 현고조고학생부군신위와 현고조비유인0000신위(顯高祖考學生府君神位, 顯高祖妣儒人0000神位), 증조부와 증조모는 각각 현증조고학생부군신위와 현증조비유인 신위(顯曾祖考學生府君神位, 顯曾祖妣儒人0000神位), 조부와 조모는 각각 현조고학생부군신위와 현조비유인0000신위(顯祖考學生府君神, 顯祖妣儒人0000神位),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현고학생부군신위와 현비유인0000신위(顯考學生府君神, 顯妣儒人0000神位)라고 적힌 지방이었다. 남자들에게는 여자들과는 달리 마지막에 학생부군신위라는 말이 들어간다. 여자에게 학생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남존여비 사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말속에는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배우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이 숙연했다.
지방을 준비하고 나니 큰 짐을 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나를 찝찝하게 하는 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얼마를 줘야할 것인지와 다른 하나는 차례가 끝나고 큰집을 나설 때까지 아내를 포함해서 형수님들의 눈치를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세뱃돈이야 형편에 맞게 주면 될 것이고 여성들에게는 가사분담을 덜어주면 되는데 무슨 고민이 필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딪히고 보면 은근슬쩍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일단 세뱃돈부터 생각해보자. 차례를 지내고 식사가 끝나면 조카들로부터 세배를 받는다. 그런데 세뱃돈이 여간 맹랑한 게 아니다. 취업포털 잡 코리아란 곳에서 조사를 했는데 직장인들은 설날 세뱃돈으로 평균 20만원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기혼 직장인(36.8%·268명)은 평균 24만932원을, 미혼 직장인(63.2%·460명)은 평균 16만1021원을 지출하겠다고 밝혀 기혼자가 미혼자보다 세뱃돈 지출 금액이 약 8만원 많았다고 한다. 직장인이 가장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연령별 세뱃돈 액수는 대학생·취업준비생 5만원, 중˙고등학생 3만원, 미취학아동·초등학생 1만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형님들이나 형수님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를 주느냐에 따라 내가 조카들에게 줘야 할 액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래 세뱃돈은 '복을 불러오는 돈'이라는 의미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부담을 느끼지 않아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특히 올해처럼 유례없는 불경기에는 세뱃돈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물론 나처럼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가 있으면 손해 보는 일은 별로 없다. 아니 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조카들이 대부분 장성을 해서 용돈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이 쓰인다. 형님들 형편이 넉넉하면 괜찮은데 다들 살기가 빠듯하기 때문이다. 특히 큰형수님은 혼자 사시기 때문에 세뱃돈 받기가 민망할 정도다.
명절에는 여성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 남자들이야 가만히 앉아서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하면 되지만 여성들은 온종일 부엌에서 일을 해야한다. 가끔씩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에, 동서들 간에 싸움이 나고 그것이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이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나는 이혼을 담당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경우를 종종 보았다. 통계를 보더라도 명절 다음날 접수된 이혼소송이 다른 날보다 24.4%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폭력 건수 역시 평소보다 20~40% 늘었다. 이런 현상을 명절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남자들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이런 악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쪼록 남성들도 명절에 놀지만 말고 여성들을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와는 별도로 가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해서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떨어져 살던 형제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보면 별의별 얘기가 다 오가게 마련이다. 무의식중에 던진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어느 대학에 들어갔느냐, 취직은 했느냐, 결혼은 안 할 거냐… 가끔은 이런 말들이 문제가 되어서 형제간에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 말이 듣기 싫어서 명절에 오지 않는 조카들도 있다고 할 정도이니 각별히 언행에 유념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신문에 실린 명절에 스트레스를 날리는 가족 간 배려수칙 5가지는 새겨들을 만하다.
1. 곤란한 질문과 비교는 삼가자.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피해야 하며, '결혼은 언제 할래? 애는 언제 가질래? 취업은 언제 할래?' 와 같은 물음은 잔소리가 될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덕담을 통해 서로 힘이 되는 명절이 되도록 한다.
2. 운전, 가사 부담 등을 분담한다.
명절에는 많은 가족이 모이는 만큼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다. 한 사람에게만 편중된 육체노동은 불만을 쌓이게 하고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가족 간 분담과 협조가 필요하다.
3. 긍정적이고 편안한 마음을 가진다.
명절 때 받을 질문을 미리 생각해서 답변을 그려 보거나 생각의 전환을 통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은 스트레스를 줄이는 도움이 된다.
4. 대화를 통해 자신이 느낀 것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명절이 되면 자주 발생하는 홧병 환자의 90% 이상이 중년 여성주부로, 홧병은 10년 이상 감정표현을 못 하다가 나이가 들어 감정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가족 간 이해관계가 있을 때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 된다.
5. 연휴가 끝나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반복적이고 무리한 가사노동으로 손목에 염증이 생기거나 인대가 붓는 '송목터널증후군'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 손목에 온찜질을 해주는 등 육체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충분한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연휴 동안 생체리듬을 찾기 위해 일찍 잠드는 것이 생체 리듬을 돌리는 데 도움을 준다.
조금 있으면 큰집에 차례를 지내러 가야 한다. 아내는 밤새 끙끙 앓았다. 어제 큰집에 가서 종일 차례 상에 올릴 음식을 만들고 와서다. 어디 몸뿐이겠는가. 마음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큰집 며느리는 물론 다른 형수들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자기만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레 아내를 깨웠고 아내는 용수철처럼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 집안에 시집온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군기(?)가 들어 있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