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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
소논문 p2447
종교개혁의 설교 / 스티븐 로슨
모든 개혁과 영적 각성은 언제나 성경적 설교를 회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이런 원인과 결과는 바뀌지 않으며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16세기에 발생한 개신교 종교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년), 존 칼빈(1509∼1564년), 그리고 다른 종교개혁자들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셔서 그들이 이렇게 역사를 바꾸는 시대를 주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강해 설교를 회복하고 거기에 전념했는데, 이를 통해 유럽을 뒤흔들고 마침내 서구 문명을 뒤집어 놓은 이와 같은 종교 운동이 막을 올리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성경적 설교자들이 오직 성경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설교단이 예전 명성을 회복했고 사도들의 전통을 계승한 기독교를 부활시켰다.
수 세기 동안 중세의 서구 교회는 설교가 지니는 최고의 지위를 박탈했는데, 그 결과로 설교단은 부수적 역할만 수행했다. 미사, 예식, 의례가 설교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교회 전통과 교황이 내린 교령이었다. 종교개혁 시대가 막을 올리면서 성경적 설교가 중심적 지위를 되찾게 되었고, 침묵하기를 거부하던 다수의 설교자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중요 사건과 성취는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담대히 선포한 설교자들의 공적이었다. 설교와 교회 개혁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결속되어 있었다.
설교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 강해는 5세게 이래로 1천 년 이상이나 등한시되다가 16세기에 들어와 개신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제 정당한 최고의 지위를 되찾게 된 설교단은 성찬대보다 높은 곳에 자리했고 교회 안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종교개혁 시대에 이루어진 설교의 부활에서 특징이 될 만한 중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그것은 성경적 설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솔라 스크립투라’, 곧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에 주로 헌신하는 태도를 굳게 견지했다. 성경이 지니는 최고의 권위가 다시 한 번 교회를 지배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자들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권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목회자는 단순히 성경에 대해서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 자체를 풀어서 해설할 의무가 있었다. 목회자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역으로 국한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그 무엇도 완전히 허탄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단으로 나갈 때면 구체적 본문을 늘 자신 앞에 두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선택한 용어는 성경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의롭다고 하다, 선택하다, 구속하다, 죄, 회개, 은혜, 기도, 심판과 같은 일반어들은 적당한 설명을 곁들여서 자유롭게 구사되었다. 성경 자체에 충실한 강해,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전했던 설교의 확고한 기초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선포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굳게 믿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진술은 이처럼 진리에 새로운 활력을 웅대하게 불어넣는 설교에서 종교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 되었다.
둘째로, 그것은 순차적 설교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 두드러진 설교법은 성경에 수록된 책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설교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토타 스크립투라’(곧 모든 성경)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모든 진리를 반드시 설교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렇게 탁월한 강해 설교자들이 성경에 수록된 책들을 절별로 꾸준히 살피는 동안, 각 메시지는 앞선 설교들을 기반으로 삼아서 갈수록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각 개별 본문을 펼쳐서 풀어내는 동안, 성경의 진술이 발휘하는 힘은 증대되었고 신도들은 성경이 끼친ㄴ 구원과 성화의 능력에 노출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순차적으로 강해한 덕분에 모든 교리를 가르쳤고 모든 죄를 폭로했으며 모든 약속을 전했다.
주도적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중요 인물인 존 칼빈은 제네바에서 사역하던 시기에 순차적으로 강해하는 목회자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책들을 따라서 순차적으로 설교했다. 창세기(123회), 신명기(201회), 사사기(짧은 연속 설교), 사무엘상(107회), 사무엘하(87회), 열왕기상(여러 설교), 욥기(159회), 개별 시편(72회), 시 119편(22회), 이사야서(353회), 예레미야서(91회), 예레미야 애가(25회), 에스겔서(175회), 다니엘서(47회), 호세아서(65회), 요엘서(17회), 아모스서(43회), 오바댜서(5회), 요나서(6회), 미가서(28회), 나훔서(기록되지 않음), 스바냐서(17회), 공관복음서(65회, 칼빈이 죽으면서 종결됨), 요한복음과 로마서(스트라스부르에서), 사도행전(189회), 고린도전서(110회), 고린도후서(66회), 갈라디아서(43회), 에베소서(48회), 데살로니가전후서(46회), 디모데전서(55회), 디모데후서(31회), 디도서(17회). 이런 순차적 강해설교는 개혁주의 설교단의 특징이었다.
셋째로, 그것은 주해적 설교였다.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95개 논제를 게시하기 1년 전인 1516년, 당대의 대표적 인문주의자인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년)는 10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다양한 신약 성경 헬라어 사본들을 수집해서 대조하는 작업을 마쳤다. 그때까지 학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라틴어 본문뿐이었다. 에라스무스가 간행한 헬라어 신약 성경은 종교개혁 시기 동안 설교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에라스무스가 간행한 헬라어 신약 성경 덕분에, 종교개혁자들은 라틴어 번역을 넘어서 신약 성경이 기록된 원어의 정확한 의미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원천으로 나아가서 성경 본문의 일차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현대의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따랐는데, 문법적-역사적 주해는 성경 저자들도 여느 양식 있는 작가처럼 구체적 의도를 지니고 자신이 기록하는 각 문장마다 하나의 주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기록했음을 긍정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자에게 맡겨진 일차 임무가 설교의 본문을 기록한 성경 저자의 마음을 펼쳐 보이는 것이라고 믿었다.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작업을 할 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센수스 리테랄리스’)를 역설했다. 다시 말해, 성경이 지닌 참 의미는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다. 종교개혁자들은 특정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확정할 때, 신앙 유비(‘아날로기아 피데이’)를 굳게 견지했는데, 신앙 유비란 성경이 한 목소리로 말하며 결코 모순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acra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성경은 스스로에 대한 해석자다.
넷째로, 그것은 담대한 설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단에 서서 말씀을 선포할 때 대단히 직설적이고 솔직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생각했기 때문에, 확립된 교황의 지상권이나 공권력이나 교회 회의나 수 세기에 걸친 죽은 전통에 과감히 반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당대의 죽은 종교에 저항했으며, 갈수록 커져가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리를 용기 있게 설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심지어 순교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담대히 선포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할 때 직설적이고 용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의 일정 부분을 성도에게 알리지 않음으로써 인기에 영합하기를 거부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에 뚜렷이 목격되는 과오와 대면해서 전한 설교에는 선지자와 같은 신랄함이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보복을 두려워해서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어조를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받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목소리를 더 크게 높였다.
다섯째로, 그것은 열정적 설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히 진리에 동의하거나 교리적으로 옳은 것만으로는 복음이 효과적으로 영향을 발휘하는 데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성령의 능력은 진리에 동반하여 설교자와 청중의 내면에서 반드시 운동해야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펼쳐들고 청중 앞에 설 때마다 혼신을 다해 진리를 선포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록된 원고를 단조로운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읽어 내려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대신에 종교개혁자들은 깊은 확신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열정이 충만한 자연스러운 어조로 설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열의에 찬 어조로 설교했는데, 이런 전달 방식에는 구애됨이나 제약이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펼치고 그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이 굶주린 영혼들에게 생명의 떡을 먹이고 있다고 믿었다. 존 칼빈은 심지어 설교자를 “자녀들을 먹이기 위하여 떡을 잘게 나누는” 아버지처럼 생각했다. 그처럼 대단한 내적 확신은 종교개혁자들의 설교에서 커다란 열의를 불러일으켰다. 그토록 강렬한 신념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저항하기 어려운 감화를 자아냈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굳은 신념에 크게 감화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택하신 대언자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해서 설득력 있게 진리를 전했다.
여섯째로,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설교였다. 이처럼 훌륭한 목회자이자 학자인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한 어휘와 이해하기 쉬운 어법으로 설교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종교개혁자들이 설교단에서 추구한 일차 목표는 회중 앞에서 자신의 특월한 지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석에 앉아 있는 보통의 신자들과 교감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한 어휘는 언제나 이해하기 쉽고 친숙한 것이었으며 결코 현학적이거나 과시적이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 불가한 철학적 사변이 담긴 이야기가 아닌 개인적 문제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라틴어로 설교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종교개혁자들은 자국어로 설교를 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의 설교가 자신의 비범함을 드러내기보다 신도들에게 명확히 전달되고 똑똑히 이해될 수 있기를 항상 소원했다. 종교개혁자들의 마음속에는 설교를 위한 정돈된 사상 체계가 있었는데, 회중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사상 체계를 감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의 핵심 주제를 쉬운 표현으로 자세히 설명했는데, 잘 다음어진 사상을 간결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설교를 발전시킨 덕분에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일곱째로, 그것은 목회적 설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일상적 환경과 생생히 연결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애정 어린 태도로 권면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려는 의도로 설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들을 권면하면서 일인칭 복수 대명사(“우리에게”, “우리는”)를 종종 사용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에 대한 적용과 순종에 스스로를 포함하면서, 거들먹거리거나 엄격한 자세를 취하기보다 따뜻하고 포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신자들의 삶과 결부하면서 종종 신자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권고했다. 종교개혁자들은 특정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한 다음, 제시된 진리에 스스로 어떻게 부응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 마음을 부지런히 살필 것을 신자들에게 역설했다. 종교개혁자들의 설교에서는 단호한 목회적 권면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는데, 특히 교회 회원들이 죄행에 연루된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욱 그랬다. 이렇게 목회자요 교사였던 종교개혁자들은 악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거룩함을 끊임없이 이룰 것을 신자들에게 촉구했다.
여덟째로, 그것은 논쟁적 설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적 설교가 신앙에 대한 변호를 요구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거짓 가르침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진리를 지켜야 한다고 확신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히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에서 반쪽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체계적 강해는 온갖 비열한 형태로 감춰진 사탄의 거짓과 맞서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가 공격받을 때마다 복음을 지속적으로 변호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를 부정하는 온갖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설교단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스스로 두 음성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는데, 하나는 양들을 모으기 위한 음성이고 다른 하나는 굶주린 이리들을 쫒아내기 위한 음성이었다.
이런 논쟁적 자세는 종교개혁자들의 설교가 논쟁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음을 뜻했다. 하나님의 진리가 오류나 악과 맞서는 경우는 종교적 논쟁이 불가피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 오류에 격렬히 맞섰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오류를 타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진지하게 설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개혁자들의 손에서 좌우에 날이 선 예리한 검처럼 사용되어서 무너뜨리고 세우며 죽이고 살렸다. 영적 반역이 자행된 수 세기가 흐른 뒤에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설교하게 되자, 무기력하고 영적을 침체된 교회 안에 갈등이 발생하는 일은 불가피했다.
아홉째로, 그것은 복음적 설교였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참된 복음에 대한 회복을 특징으로 했다. 복음이 모호해진 상태로 방치된 지 수 세기가 흐른 뒤에, 이들 개신교 설교단은 ‘솔라 그라티아’, ‘솔라 피데’, ‘솔루스 크리스투스’, 곧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영원을 염두에 두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의 값없는 제안을 확대하여, 모든 남녀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얻도록 요청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지 않으면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것을 모든 사람에게 촉구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간절한 복음 전도의 열정에 감동되어서 복음의 진보에 아낌없이 헌신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정이라는 성경 교리는 믿었지만 그렇다고 복음을 전하려는 그들의 열정이 약화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종교개혁자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려는 간절한 소망에 크게 사로잡혔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에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확신했기 때문에, 담력을 얻어서 흔들림 없이 자신 있게 복음을 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자신이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열째로,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설교였다. 모든 종교개혁의 설교가 추구한 최고의 목표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솔리 데오 글로리아’, 곧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심원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설교 전체는 하나님의 대관식이요 하나님의 높으신 위엄에 대한 찬미였다. 설교단의 추진력은 듣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앉으신 영광스러운 보좌의 순진한 거룩함 앞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고상한 주제는 설교에 사용되는 모든 표현을 관통했으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이 목격되는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을 만들어 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늘 높였다. 개혁주의 설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사람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을 대단히 중요하게 선포했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경외심을 느끼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들어가고자 용기를 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들에게 당부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드러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지금껏 교회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주석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적 거장들은 설교자였다. 관주도적 종교개혁자들은 역사상 누구보다도 말씀을 강해하는 데 전념했다고 말해도 사실과 다르지 않다. 과거에 종교개혁자들이 걸었던 오래된 길, 곧 신뢰할만한 성경적 설교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성경적 강해 설교자들이 등장하는 새로운 날이 동트기를 희망한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어둠 뒤에는 또다시 빛이(‘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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