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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령산의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정곡리와 무안리의 앞산을 이루고, 또 화악산의 지맥이 서남으로 뻗어 그 한 줄기의 끝이 대불산을 이루고 더 뻗어 내려가서 배산을 이루는데, 그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이 정곡리이다. 동북쪽으로는 운정리와 인접하였고, 동남으로는 앞 산을 경계로 하여 초동면 봉황리와 경계를 이루었고, 남으로는 청도천을 경계로 하여 신법리, 서북쪽으로는 삼태리, 북으로는 뒷산을 경계로 하여 판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을 정곡이라 한 것은, 정곡 본동인 솥질에서 보면 3개 방향의 산이 솥발처럼 모였다고 하여 솥질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음으로 바꾸면서 정곡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원래 밀양군 하서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신화리와 합쳐 정곡리라고 하였으며, 1933년에 무안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동명은 정곡리이며, 자연 부락으로는 솥질, 나무골, 무덤실, 신화, 조무실, 단장 등이 있다.
밀주승람(密州勝覽)에 의하면 만호(萬戶) 박원곤(朴元坤), 참군(參軍) 박충헌(朴忠憲), 만호(萬戶) 박인헌(朴仁憲), 박종서(朴宗緖), 박종휘(朴宗徽), 무장(武壯) 박기종(朴起宗), 박양부(朴陽復), 현감(縣監) 박태승(朴兌升)이 세거하였고, 진사(進士) 주덕형(朱德馨), 생원(生員) 주덕원(朱德源), 생원(生員) 주양(朱兩)이 구거(舊居)하였다고 한다.
재사로는 문송(聞松) 안수관(安守寬) 묘하재숙소(墓下齋宿所)인 문송정(聞松亭)과 정국군(靖國君) 박위 장군과 문신소총재 박시(朴蓍) 부자를 향사하는 신남서원(莘南書院)이 있다.
이 마을 앞 들에도 1988년 경지 정리 때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구가 다 들이 되어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판곡리, 운정리, 신법리, 삼태리 일대의 유적과 연관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1) 솥질(鼎谷)
솥실, 혹은 솥질이라고 하며, 정곡리의 본 마을로 밀성 박씨의 세거지이다. 대불산에서 남으로 뻗어 내려온 한 줄기가 배산을 이루고, 그 아래 동쪽을 향해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을 향한 세 방향의 산 줄기가 마치 솥발과 같은 형국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배산(舟山)
솥질 마을 뒷산을 말하는데, 산세가 마치 배가 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붙인 산명이다. 광주 안씨의 선산으로, 이 문중에서는 이 산에 있는 바위를 깨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하여 바위 하나라도 깨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 시묘산(侍墓山)
운정리 안지말 마을의 맞은 편에 있는 산이며, 지정 마을 뒷산으로 정곡 마을 앞산이 되는데 옛날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익기소(溺妓沼, 역기소-逆妓沼)
정곡 마을 앞을 흐르는 정곡천에 있었던 소로, 지금의 솥질 마을 앞 정자나무숲 부근이라고 한다. 옛날 이 곳에 깊은 소가 있었는데, 기생이 빠져 죽은 소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시대 부사를 지낸 김일준(金逸駿)이란 선비가 있었는데, 소시에 경관이 좋은 이 곳에서 밀양 고을 주최로 개최된 백일장 대회에 참여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장원으로 뽑혔고, 곧 이어 축하연이 열렸는데 전례에 따라 수기생(首技生)이 장원자(壯元者)를 업고 춤을 추며 풍악을 울리라고 밀양부사가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 기생은 키가 작고 볼품없는 김일준에게 접근도 하려 하지 않았다. 축배를 올리라는 부사의 명에 그 수기생은 오히려 부사의 명을 거역하고 김일준의 얼굴에 침까지 뱉았다. 좌중의 많은 사람들은 기생의 그런 행동에 오히려 웃음을 터뜨릴 뿐 기생의 무엄한 일을 불문에 붙여 버렸다.
그 후 김일준은 학업에만 전념하여 명종 19년(1564년) 갑자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랑장령(正郞掌令), 경상도사(慶尙都事)를 거쳐 흥해, 순창, 담양 등의 수령을 지냈다.
그가 이 곳을 다시 찾았을 때 정곡리 앞 소에서 또 백일장 대회가 열리었다. 김일준도 여러 선비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고, 지난 날 자신에게 치욕을 준 그 기생도 있었다. 김일준은 그 기생을 보는 순간 지난 날의 수모를 되새기며 벌을 내렸다. 참나무숯불이 벌겋에 타오르는 놋쇠 화로를 머리에 이고, 소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그 기생은 어쩔 수 없이 화로를 머리에 이고 소를 돌긴 했지만 자신을 죽이기 위한 벌이라 생각했을 뿐 아니라 과거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살아 남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알고 소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 기생이 빠져 죽은 소라고 하여 익기소(溺妓沼)라 하고, 또 김일준이 백일장 대회에서 장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풍악을 울리라는 부사의 명을 거역하였다고 하여 역기소(逆妓沼)라 부르기도 한다.
일설에는 밀양 영남루에서 개최된 백일장 대회에서 김일준이 장원을 하였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수기생에게 김일준을 등에 업고 춤을 추라고 부사가 명하였으나 명을 거역하고 시골뜨기로 보인 김일준의 얼굴에 침을 뱉았고, 그 후 김일준의 명에 의해 화로를 이고 무안까지 갔다 오라는 벌을 받고 이 곳까지 왔으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데다가 자신이 지은 죄를 후회하며 이 소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상(河床)이 높아 그 흔적만 남아 있다.
■ 뒷산등(後山嶝)
솥질 마을 뒷산에 있는 등성이로, 마을 뒤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보통새미
솥질 마을 앞들에 있는 샘인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이 솟는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 앞들
솥질 마을 앞 들을 말하는데, 마을 앞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지금은 경지 정리로 운정 앞들과 구분없이 통해져 있다.
(2) 나뭇골(木洞)
솥질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 지명은 적촌(赤村), 복을(伏乙) 또는 복걸(伏乞)이라 했다. 마을 안쪽 골짜기에 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나뭇골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하며, 복을, 복걸이란 말은 이 마을 안쪽에 복을촌제(伏乙村堤)가 있었다고 하여 보살리라고 하다가 한자음으로 차음된 것이라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곳에 천부락지혈(天釜落地穴)이 있다고 하여 지관들이 가끔 다녀 가는 곳이기도 하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중랑장(中郞將) 손중견(孫中堅), 문장(文壯) 손약수(孫若水), 감찰(監察) 손억(孫億), 우후(虞侯) 손수종(孫壽宗) 등 4대가 소거하였다고 한다. 또한 안의현감(安義縣監)이었던 류종귀(柳宗貴)가 안의(安義)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하며, 지금 그 후손들은 주로 운정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 복을촌제(伏乙村堤)
나뭇골에 있었던 저수지인데, 둘레가 595척, 깊이가 7척이나 된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공철산(孔哲亭)
나뭇골과 새터 사이에 있는 산 이름이다. 공철이란 자가 손수 심은 정자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공철정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자나무가 없어지고 그 산을 공철산 또는 공철정이라 부른다. 이 산은 진주 류씨의 선산으로 류씨종산이라 칭하기도 한다.
■ 당산등(堂山嶝)
나뭇골에서 노루실로 넘어 가는 고개 위에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판곡리와 경계 지점을 이루고, 그 고개에서 남으로 뻗은 등성이를 당산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하여 당산등이라 한다.
(3) 신화(新化)
솥질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지명은 신화리라 하였다. 옛날 이 마을에 자주 화가 일어났는데 주민들이 이를 귀신의 조화라고 여겨 신화(神化)라고 했다가 신화(新化)로 고쳤다고 하며, 이 音이 변하여 시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시내고개(新化峴)
신화 마을에서 초동면 봉황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 중봇들(中洑野)
신화 마을 정곡천에 있는 보를 중보라 하고, 여기에서 물을 끌어 대는 조무실, 신화 앞의 들을 중봇들이라 한다.
■ 차반나들
신화 마을 앞, 즉 배산 뒤로 흐르는 청도천과 정곡천이 합류하는 사이에 있는 삼각주 들이다. 배산 뒤의 보에서 물을 끌어 대는데 이 보를 차반나들보라고 한다.
(4) 단장(短墻)
신화의 동쪽 산록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 이 곳에 살았던 부자가 그 집 주위에 큰 담장을 쌓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지금도 그 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5) 조무실(鳥舞谷)
신화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뒷산의 산세가 새가 춤추는 형국이라고 하여 조무실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6) 무덤실(墓谷)
단장 마을 동편 골짜기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진주 류씨의 선조묘를 비롯하여 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7) 새터
솥질 마을에서 판곡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서당골(書堂谷)
새터 마을의 북쪽 골짜기 아래에 2,3호의 인가가 있었는데, 옛날 이 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농토로 바뀌어 그 흔적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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