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숭배문화.
방파제의 왜놈들이 구한말 쯤에 결혼을 통해 인종개량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워낙 서양을 동경했기에 종자개량까지 시도했었다. 그들은 당연히 왜놈 남자와 서양 여인이 결혼하는 것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뜻과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왜여인들이 덩치크고 키가 큰 서양남자를 더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왜놈들은 이번에는 조선을 왜놈화하려는 목적으로 왜놈 남자와 조선 여인의 결혼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이 지나자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서 왜놈들의 지휘부였던 조선총독부를 당황시켰다. 헌데 왜놈들의 영향 때문인가? 현재에도 서양숭배가 우리의 정서 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자주 보인다. 귀한 자리나 고품격을 표현할 때 와인과 스테이크가 등장한다. 칼로 썰어서 포크로 찍어 먹으며 고상하게 와인을 마신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줄만하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명품 시계, 명품 가방, 옷 등등 서양의 것들을 걸치고 차고 타야만 귀족이나 부자의 이미지가 되는 모양이다. 거기에다 우아하게 양산을 쓰면 화려함의 극치를 자아낸다.
모든 귀족적인 이미지를 서양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웃기는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그 우아하게 햇빛을 차단하려는 양산은 바로 똥막이 우산이었다. 서양은 우리처럼 화장실이 없었다. 양동이 비슷한 그릇에 볼일을 보고 그것을 창밖에 버렸다. 그러다보니 길을 지나다가 재수가 없으면 똥벼락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창문에서 난데없이 덮치는 오줌섞인 똥덩어리를 막고자 양산을 쓰고 다녔던 것이다.
고급 음식의 이미지와도 같은 스테이크도 마찬가지다. 칼로 썰어서 푹 찍어 먹다가 가끔 입술이나 혀를 다치게 되니 포크가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언제 칼로 음식을 먹었던가? 아님 쇠스랑으로 먹었던가? 저들보다 몇 단계나 진보한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기 한쪽을 썰어도 무식한 칼을 쓰지 않는다. 바로 집개로 집어서 가위로 품격 있게 썬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고기를 구워서 먹는 문화가 거의 없었다. 요즘은 숯불구이가 흔하지만 예전에 우리는 수육과 탕을 즐겼다. 고기도 삶아서 기름기를 쏙 뺀 단백한 맛을 즐겼다. 특히 보양음식 대부분은 바로 탕이었다. 야만스럽게 통구이나 직화구이로 먹지를 않았다. 이 또한 서양보다 몇 단계나 진보한 우리의 음식문화다.
헌데 이제는 굽거나 썰어야 품격이 있어보이는 모양이다.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서양문화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양복을 입지 않으면 안되고 야만적인 칼질과 포도주를 입에 넣어야 폼이 나보인다. 이러니 저 밖에 모르는 개인이기주의자 서양 잡것들에게서 백인우월주의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인디언, 인디오들은 거의 멸족에 가까운 학살을 당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순수한 인디언이나 인디오의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잔인하고 악랄한 저들에게서 무엇이 배울 것이 있다고 따라하고 있단 말인가?
의학이나 의술도 마찬가지다. 동양은 대체로 의학이었다. 전해내려오는 학문 즉 의서를 기초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서양은 의술이 기초의 밑바탕이 되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없었으며 지금으로치면 이발사의 기술 중에 한 분야가 바로 의술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동양은 학문적인 지식으로 시험도 봤으며 의원을 뽑았다.
때문에 마구잡이 칼질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의술은 기초적인 학문이 아닌 기술이었기에 거리낌없이 사람의 몸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동양은 기를 보하고 정을 돕고 침을 꽂아서 혈맥의 순환을 돕는 학문이었던 반면 서양은 가르고 잘라내고 이어 붙이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가르고 이어붙이는 기술이 훨씬 환영을 받는다.
주변에 보면 배나 등을 갈랐던 사람이 많이 보인다. 또 그 상처의 흔적을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무용담처럼 들려준다. 배를 가르고 오장육부를 건드리면 인체의 면역력저하로 이어진다. 때문에 수술을 받은 사람은 종양의 전이속도가 빠르다. 천천히 진행되던 종양덩어리가 급속도로 번지게 된다. 또한 정상적인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다.
약봉지를 달고 살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큰 병원일수록 문전성시를 이룬다. 칼질을 잘하는 병원일수록 환자도 많고 돈도 잘 번다. 아무리 침을 잘 놓고 뜸을 잘 놓아도 칼질을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탕을 잘 끓여도 스테이크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무더운 삼복더위에 우리는 따끈한 국물을 찾았고 이열치열로 무더위를 이겨냈다. 땀을 많이 흘려서 허해진 기운을 뜨거운 탕이라는 보양식으로 견뎌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이런 개념이 없다. 가끔 칵테일바 같은 장소가 나오면 바텐더는 끝없이 그릇이나 잔을 헝겁으로 닦는다. 모르고 보면 굉장히 깔끔하고 위생적으로 보이지만 기실은 석회가루를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과는 다르게 저들이 사는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물도 함부로 마실 수가 없다. 그릇을 물로 씻고 나면 하얗게 석회질이 보여서 그것을 헝겊으로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에 흙이 많아서 누런 강 황하가 되고 함부로 마실 수 없기에 끓여서 마셨는데 그도 여의치 않아서 차를 만들어 마신 짜장들을 동경하더니 이제는 칼질을 동경한다.
누군가 말한다. 당신들은 물이 좋은데 왜 차를 마시며 뛰어난 의학이 있는데 왜 칼질을 동경하는가. 훨씬 진보적인 수육과 탕이 있는데 다 익히지도 않은 송아지 엉덩이살이 그리도 좋은가? 차라리 채를 썰어서 양념한 육회를 우아하게 젓가락질 할 생각은 없는가. 무지막지한 칼질의 고통은 견뎌내면서 왜 우아한 젓가락질의 작은 고통은 참지 못하는가?
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