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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야성(冶城) 송씨 일문(宋氏 一門) 의 전무출신
박용덕〈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3부자 모두 전무출신
야성(冶城) 송씨 일문의 최초의 전무출신은 정산종사이시다.
정산종사는 구도 발심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편력하다 정읍 화해리에서 독공 중,
대종사가 친히 방문하여 형제 결의(兄弟義)를 하고
그로부터 석달 뒤 무오년(원기3) 8월2일 정산이 영광 길룡리 대종사 문하에 귀의하여
사제 결의(師弟結義)를 함으로 해서 새 회상의 전무출신이 되었다.
이때는 정식으로 회상을 창립하기 이전이라
정산은 창립 인연의 결속, 교리 제도 초안 등 준비에 전무(專務) 노력하였다.
정산종사가 구도차 전라도에 가서 두 해동안 소식이 없다가 큰 스승 만나 정착한 뒤,
소식을 듣고 장남을 만나고 온 송벽조는 솔가하여 영광에 이사하였다.
송씨 일가의 두 번째 전무출신은 정산의 아우 주산 송도성이다.
송씨 일가(宋氏 一家)가 전라도로 이사 오자,
대종사는 양가의 자녀끼리 혼약하고 사위가 될 송도성은
열여섯 나이에 부안 내변산 봉래정사로 들어와 스승(장인 어른)의 시봉을 들었다.
두 아들의 출가에 이어 부친 구산 송벽조는
갑자년(원기9년) 부친 상을 치른 뒤 바로 전무출신하여 영산출장소 교무로 시무하였다.
일가 다섯 식구중 고부간만 남겨두고 3부자 모두 전무출신하였다.
외가 식구들도 전무출신
송벽조 일가가 전라도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고,
그의 처가 연안 이씨 일문에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경상북도 금릉군 구성면 상좌원에 사는 처조카 이지영은
공맹(孔孟)을 하늘처럼 숭상하는 대쪽같이 곧은 유학자였다.
평소 자기가 통하고 존경하는 고모부가 근본도 모르는 전라도 사교에 홀려 고향을 떠나버리자
이지영은 이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원기6년(1921) 가을, 서슬이 시퍼렇게 당장 고모댁을 환고향(還故鄕)시킨다며
영광 고모댁에 달려온 이지영은 되려 고모부(宋碧照)에게 설득을 당하였다.
“고모부가 우애 이래 돼뿌렸단 말입니껴! 대체 그분이 어떤 사람잉교?”
“이 사람아, 그 분을 한번 뵙기나 하게. 그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고 공자님이시네”
“좋습니더. 한번 보입시더.”
부안 내변산 석두암에서 석두거사를 뵌 이지영은 봄바람에 얼음 녹듯 감화 받고,
그가 늘 경을 읽고 우러러 받들던 공자님이 바로 이 분이라는 확신을 하였다.
그는 신유년 구월 초하루날(원기6년 10.1)에
춘풍(春風)이라는 새 이름을 받고 솔가하여 대종사 문하에 살기로 결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춘풍은 서둘러 이사 준비를 서둘렀다.
춘풍은 슬하에 여덟 딸을 두고 아들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집안 어른들에게 간곡히 말하였다.
“지가 아들 하나 얻기 위해 백일기도도 드리고 묘자리도 옮기고 새터를 잡아 이사도 하고,
정성을 들이는 일이라면 안해 본 일이 없습니더”
“그러게 말이네. 어찌 되었든지 후사는 보아야제”
“선조들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더.
옛 어른 말씀에 아들을 볼려면 타관 물을 먹어야 한다 카든데
아무래도 고향을 떠나 살아야 안 되겠습니꺼”
“그려, 그렇다면 타관에 가서 아들을 보면 바로 환고향하게”
그리하여 해가 바뀌기 전인 섣달 스무사흘날(원기7년 1.20)에 서둘러 이사를 하였다.
부인 정씨와 어린 두 딸, 양자 덕화,
홀몸이 되어 친정에 눌러 사는 여동생 까지 여섯 식구가
부안 변산 줄포만 바닷가 보안면 신복리 종곡에 집을 마련하였다.
신복리 종곡 마을 이춘풍의 집은,
기미년에 고모댁이 당초에 이사 오기로 하였던 곰소나루가 보이는 진서리의 이웃 마을이었다.
정산종사 슬하의 자녀 둘 다 교화사업에 헌신 전무출신해
구산대희사 종족의식 각별해 고향 청년들 교화에 공들여
원기7년 12월에 송도성은 봉래정사로 찾아가는 길에 외사촌형네 집(李春風)을 찾았다.
내변산 초입에 자리잡은 이춘풍의 집은
영광-변산 노정에 드나드는 제자들의 연락처 역할을 하였다.
이춘풍이 전무출신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두 딸 7녀 경순(敬順)과 막내 정화(正和)도 전무출신하였다.
두 자매의 교화력으로 후일 연안 이씨 일문의 여러 조카들도 전무출신하니
이질 이성택(李成澤)과,
조카 이경옥(景玉) 도전(道田) 도중(道中) 등이다.
고향 친척 청년들도 전무출신
몸은 고향을 떠나 불문에 출가하였지만 구산은
40여년간 살던 고향에 대한 향념(向念)이 남달랐고 종족의식(宗族意識)이 각별하였다.
매년 시향제 때면 구산·주산 부자는 빠지지 않고 고향에 다녀왔다.
골수에 유학이 배인 연만(年滿)한 종족들의 교화는 도무지 불가하였으나
젊은이들 몇 사람은 익산총부에 내왕하고 한때 전무출신하기도 하였다.
주산은 육촌 동생 송한익·시경·하익(宋漢翼·時經·河翼) 등 3형제를 교화하고
한익은 준시(浚時)를 교화하였다. 준시의 법명은 제국(濟局),
그는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총부학원생으로 있으면서
수양공부에 편중하여 빗자루 질 하면서도 일심 적공한다든지,
닭장 속에서 좌선을 한 일화,
기개도 가당찮아 조실을 방문한 일본 장교의 센또 모자에다 군마를 타고 다닌 일로 유명하였다.
구산은 제국의 삼촌 종룡(鍾龍)을 교화하였다.
종룡의 법명은 경옥(磬玉), 일가족이 총부 근방으로 이사하여 신앙생활하였다.
또 주산은 약목에 사는 누이 송선양의 차녀 이자음을 교화하여
그가 한때 총부에서 학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정산과 고양서당 동문생인 송인집(宋寅輯 1896.1.3∼1961.3.16)은
한때 구도 발심하여 가야산에 동행하기도 하였으나 중도에 포기하였다.
그는 성품이 단정하고 기질이 강경하였으며,
재기 또한 출중하여 공산 문하에서 십여년간 한학을 닦아
소년 재사(少年才士)로 문사와 필법이 사림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충숙공의 후손으로 용계공파(龍溪公派)이며 고산정에서 살았다.
그는 구산과 동항렬이고, 정산보다 네 살 손위 아재벌이 된다.
송인집은 스승 공산(恭山)의 뜻에 공명하여
기미년 유림(儒林)의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성주 장날 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많은 사람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으나,
송인집은 피신하여 옥고를 면하였다. 송인집은 이 해 5월2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 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0개월 형을 받았다.
그는 변성명하고 서울로 가 중동학교와 연희전문 영문학부를 수학하고,
혜화전문학교 강사로 있다가 조부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가업을 이었다.
그는 고향 땅에 동창학원(東昌學園:현 초전초등학교)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정미소와 양조장을 경영하는 등 사업확장을 도모하였으며
토지중개인 장길산의 사기에 걸려들어 가산을 탕진하였다.
이후 다른 사람의 여행증을 이용하여 도일, 가내공업을 운영하는 한편 재일동포들과 손을 잡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며 지하공작활동을 전개하다가 해방을 맞아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 서울역과 남대문에서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던 주산종사를 만나
유일학림 설립계획을 듣고 정산종사의 재차 권고로 익산총부로 솔가하여 원불교에 귀의,
유일학림(원광대학교 전신) 교수로 봉직하였다.
원기31년 4월22일에 입교 수속되었고 법명은 창허(蒼虛), 법호는 진산(晋山)이다.
송창허는 6.25 동란 뒤, 원광중학이 설립될 때 서무주임으로 봉직하였다.
장남 송성찬이 유일학림 1기생으로 1학기를 다니다
경제사정으로 중퇴, 보화당에 입사하여 46년간 약업계에서 전무출신하였다.
희산 송성찬은 이리보화당 사장을 지냈다.
부친 구산의 고향 교화 염원
구산은 평소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덕인이었으며
불의에는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영광지부 교무를 거쳐 진안 마령지부 교무로 있을 때(원기24),
천황불경(天皇不敬) 죄목으로 피검되어 1년반 동안 옥고를 치뤘다.
그 여파로 각 지부 교무가 불법연구회 회가(會歌) 가사가 불온하다는 혐의로 일경에 연행 당하고,
영산지부장로 있던 장남 송규는 전남도경에 연행되어 25일간 고초를 당하였다.
부친이 구속되고 형도 일경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산 총부교감은 총총히 영광으로 향하였다.
주산은 불안에 떠는 영광지부 대중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사가의 모친과 형수를 위로하였다.
다음은 총부 학원생 정양선이 보낸 편지에 대한 주산 교감의 답서이다.
‘도성은 (영산에) 온 후 자친(慈親) 기후(氣候) 무손(無損)하시고 대중이 안심들 하오며
자신에 있어서도 일찍이 금강경(金剛經)을 읽은 자로서
쓸데없는 걱정이라든지 공포를 느끼겠소?
좀 안됐기는 하나 직접 당하신 분(父親 久山)이 얼마나 고생스러우시랴 하는 것뿐인데,
이 어른은 더욱이 금강경의 진리를 체득한 분이니 염려할 것 없겠지요.
이곳 와서 보니 여학원생들이 수도 많으려니와 어찌도 씩씩하게 공부를 잘하는지
여류 인물양성에 대하여 못자리 역(苗代)을 충분히 하는 감을 주외다’(1940. 1. 6)
감옥에서 나온 뒤, 구산은 요시찰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어 공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자,
성주 고향으로 갔다.
성주 고산정에는 기미년 파리장서 사건과 성주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한
유림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종중의 백세각이 있고
동문의 친구들이 운영하고 있는 숭양정사와 고양서당이 있었다.
구산은 이곳에서 계미·갑신(원기28-29) 두 해 사이에 종중의 동문인 두 친구를 사별하였다.
계미년에 죽은 고양서당의 공산 송준필은 영남 유학의 거두로
기미년 유림 파리장서 서명운동과 성주 장날 만세운동을 주동한 그 장본인이다.
이듬해 해방을 1년 앞두고 죽은 숭양정사의 앙산 송홍눌은
성주 3송(星州三宋)으로 일컬으지며
공산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유학자며 구산과는 죽마고우 동문생이었다.
구산은 고산정에서 침묵과 인고로 쓸쓸한 가슴을 달래다가,
새로 시작되는 완주 삼례과원(수계농원) 교무로 부임, 수계교당의 산파역을 맡는다.
구산은 삼례과원에서 해방을 맞았다.
동란 직후 구산의 입적으로 성주 교화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반백년대회를 앞두고 대구교당 교무 항타원 이경순의 원력으로
성주에 원기54년 12월28일부터 1년여 월 1회 출장법회를 보다가
56년 6월21일에 성주교당(초대교무 최강연)이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주 고산동 출신 송인걸 교무가 경북고를 졸업하고
원기60년에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영산선원에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송인걸은 충숙공의 후손으로 주부공 시정파의 종손이며 앙산 송홍눌의 증손이다.
이를 기연으로 송인걸은 성주교당 5대 교무를 역임하고
현재 원불교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재직중이다.
구산 대희사 직계 7명 전무출신
구산 대희사의 직계는 본인을 포함하여 손자대까지 7명이 전무출신하였다.
정산종사 슬하의 자녀 모두 전무출신하였다.
장녀 승타원 송영봉은
원기27년에 출가하여 운봉·서울·동산·원남교당 교무를 역임하고
뉴욕교당 교감으로 17년간 교화하였다.
차녀 태타원 송순봉은
1대성업봉찬대회 당년에 출가하여 강경·마산·군산교당 교무, 감찰원 사무처장, 교육부장,
대구교구장,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수위단 상임중앙단원으로 재임 중이다.
정산 슬하의 자녀들은 모두 원불교단에 출가하여 교화사업에 헌신하였고,
아우 주산의 자녀와 손자들은 거개 교육계와 의료계에 진출하였다.
주산은 5남1녀를 두었으나 그들의 장성함을 보지 못하고
한창 일할 나이인 40세에 전재동포구호사업 도중 순직하였다.
정산종사 앞으로 출계된
장남 전은은 서울의대 수학 도중 요절하였고,
차남 천은과 딸 관은이 전무출신하였다. 두 남매는 교육계에 헌신,
천은은 교학대 교수로서 현재 원광대학교 총장으로 재임중이다.
관은은 원광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원불교성가 작곡 및 보급에 선구적인 활약을 하고 있다.
원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원광고등학교에 근무하던
3남 수은은 오랜동안 주한 미대사관에 근무한 후 뉴욕에서 의류 사업을 하다가
역경사업을 발원하던 중 지병인 심장병으로 원기81년에 열반하였다.
4남 경은은 서울 휘경여중 교장,
5남 용은은 원광보건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