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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강대종
전주선교 (서문교회의 역사)
호남 최초의 교회를 세우다 (1893- 1903)
선교사들 중 가장 먼저 호남 땅을 밟은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에서 파송을 받고 온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1889년 서울에서 선교지인 부산으로 향해 가던 도중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경유하였다. 1892년 말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이널즈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마펫이 선교 지역 책정 문제를 앞에 두고 호남의 초입인 충남 공주 지방까지 말을 타고 답사한 일이 있었다. 1893년 장로회 미션 공의회에서는 예양 협정(Commity Agreements)에 의해 선교 지역을 배정했는 데, 호남 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 지역으로 지정(指定)되었다. 그 당시 호남에는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으로 민심이 흉흉했고 선교사들은 민심의 동향과 지역 사정에 밝지 못했다. 이에 미국 공사관의 만류로 선교사들이 나서기보다는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을 선임해 파송하기로 했다. 그래서 레이널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자신들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정해원(鄭海元)을 선정했다. 전주에 도착한 정해원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 차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에 돌아 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하였다. 그는 주일이 되면 자기의 은송리 집에서 그간 사귀어 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드리며 전주에 처음으로 온 신자답게 생활했다. 1897년에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문답한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문답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그 해 7월 17일 주일에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남자 2명과 여자 3명(김내윤, 김창국과 여자 강씨, 임씨, 김씨)이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 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을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세례 문답에는 합격했으나 시골에서 멀리 사는 관계로 7월 17일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전씨는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도 참예했다. 그 날 세례식에서는 7월 17일 세례를 받은 바 있는 김씨가 두 살 되는 딸 보영(寶榮)을 안고 와서 자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으므로 그 아이는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교인이 되었다. 이 무렵(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널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 날 예배 후에는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자진해 예배당 개수(改修)를 위해 특별 연보(헌금) 할 것을 작정했으므로 9월 7일 화요일부터 해리슨이 살고 있으며 예배 처소로 겸하고 있는 집을 앞으로는 예배당으로 전용할 수 있게 방을 넓히고 인원을 많이 수용하도록 개수했다.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교인들이 힘써 연보하여 충당하였다. 수리를 마친 9월 19일 주일에는 개수된 예배당에 모여서 기쁨으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 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교인은 여자들 외에 남자가 20명 가량이 출석했다. 1897년에는 선교사들의 사택과 선교부 복합 건물이 들어설 기지를 은송리 옆 완산(完山) 지맥(支脈)자락의 언덕에 있었는 데, 완산이 전주의 주산(主山)일 뿐 아니라 이씨 왕조(李王家) 전주 이씨의 시조 신라 사공(新羅 司空) 한(翰)의 발상지요 중시조 목조 안사(穆祖 安社)의 본향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라는 이유로 건축이 금지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선교부 기지의 위치를 완산에서 서북편인 화산(華山)으로 옮겨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임의 사용하도록 하며 완산에 건축했던 건물 대신 세 채를 이전해 지을 수 있는 보상금을 조선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완산에 자리잡으려고 하던 선교부는 현재 엠마오 사랑 병원이 있는 곳(구, 예수 병원 자리)의 등성이에서부터 서북편 일대로 뻗은 야산을 지나 현재 신흥 학교와 기전 학교 등이 있는 곳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교부가 자리를 옮김에 따라 전주의 초기 교회 자리도 은송리의 선교부에서 바로 보이는 전주성 서문 옆에 터를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전주 서문 예배당 터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주 선교부는 1894년 1월 테이트 목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선교사가 서울에서 전주에 정착할 생각으로 내려와 전주 은송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동학 혁명으로 인해 서울로 일시 철수했다. 1895년 3월 레이널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육로로 다시 전주에 와서 상당기간(3∼5월)을 체류하면서 민심을 파악하고 주택을 건축하며 선교 활동 재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초기 세례 받기를 원했던 신자들과 교회를 찾아오던 초신자들은 거의 다 흩어져서 찾을 길이 없어졌고, 선교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이 되어야 했다. 두 선교사는 테이트 목사의 집 사랑방에서 다시금 집회를 시작했다. 5월에 레이널즈는 테이트와 3월에 함께 왔던 일행을 전주에서 계속 일하도록 남겨 두고 자기는 육로로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 전주에서 집 짓는 일을 마무리하던 테이트도 서울에 올라가 6월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다. 1895년 10월 서울에서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간계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지방에 있던 선교사들 중에는 시국에 불안을 느끼고 서둘러서 모여들기도 했다. 전킨과 드루도 선편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정국이 수습되는 것을 보고 11월에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서 거주할 주택과 선교 기지를 물색하며 본격적인 군산 선교를 진행했다. 전주에서 꿋꿋하게 일하던 테이트는 12월 일단 서울에 올라가 일 주간 준비를 한 후 앞으로 누이동생 매티와 함께 전주에서 장기간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선편으로 출항해서 군산에 거쳐 1896년 1월초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래서 1월 5일 주일에는 전주 은송리 처소에서 감격적인 새해 첫 예배를 드렸다. 테이트는 집회 때마다 성경 강설과 교육을 담당했다. 집회 때는 많은 질문자들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살이에 어떠한 이득과 정치적인 안전 보장의 기대나 경제상의 도움 등을 바라고 있었다. 매티는 모여드는 여자들을 위해 복음의 기본 도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는 한편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간단한 의료 시술과 위생에 관한 기초 상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자들은 테이트의 사랑방에서 모이고 여자들은 매티의 방에서 각각 따로 모였다. 뒤를 이어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도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전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 지역 선교부들은 병원 설립, 의료 선교 사업 전개 및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에 힘을 쏟아 군산 구암 병원, 전주 병원, 목포 병원, 광주 병원, 순천 병원, 광주 나병원 등을 설립하고, 신흥 학교, 기전 여학교, 정명(貞明) 여학교, 영흥(永興) 학교, 숭일(崇一) 학교,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영명(永明) 학교, 메리 볼딘 여학교 등의 학교 설립을 통하여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 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의 학생 수를 보이고 있다. 초기 장로 교회의 각파(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해 각 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하자 이들은 장로회의 공통된 방식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각파의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치리권 행사가 별로 없었고 토의와 권고와 보고·친목 등을 다루었으며 앞으로 정식으로 조직될 치리회의 예비적 공회일 뿐이었다. 1893년 2월 선교구역 분할 협정에 의해 미 남장로회 선교 구역으로 확정되면서 선교가 시작된 이 지역은 그 해 3월 선교사 레이놀즈(W.D.Reynolds)와 조사 정해원이 선교부의 파송을 받고 활동을 시작했으며, 1894년에는 데이트 남매(L.B.Tate와 M.S.Tate)가 파송되어 상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선교활동은 중단되었으며, 1895년 이후부터 다시 선교에 전념하여 1907년에 이르러서는 전주 교회가 전주 시내 남문 교회를 분립시키는 한편 1911년 10월에는 전라노회가 전주 서문밖 교회당에서 조직되었다. 한편 전주지역 선교활동은 병원선교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1902년 잉골드(M.D.Ingold)선교사가 세운 여성을 위한 진료소는 현재 전주 예수병원 전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진료의 혜택을 주었다.
1890년대의 호남 선교과정을 지나서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선교업무와 병원 설립, 의료선교, 학교교육을 통한 선교사업이 차츰 구체화되면서 전도를 받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전주와 군산에 자리를 정하고 차분히 활동하던 선교사로는 테이트 남매(崔義德과 玖德) 선교사와 레이널즈(李訥瑞) 선교사 내외, 약방을 설치하고 의료선교사역을 겸했던 해리슨(河緯廉) 선교사, 잉골드 여의사 등의 활약이 현저했다. 목포를 거쳐서 이곳 전주로 파송되어 온 매큐첸(Luther Oliver McCutchen, 馬路德) 선교사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요세핀(Mrs L.O.Josephine Hounsell) 여선교사, 군산에 파송되어 온 불 선교사와 그의 부인이 된 앨비 선교사 등이 일반선교와 학원선교 또는 의료선교 등을 담당했다.
마로덕 선교사, 마로독 선교사의 부인 요세핀 여사, 전킨 선교사
특히 선교 초기, 군산에 살면서 전도선으로 군산 연해 지역과 섬들을 순회하며 전도했던 드루 의사와 더불어 열정적으로 군산지역을 개척했던 전킨(全緯廉) 선교사는 드루 선교사가 1901년 귀국한 다음에도 군산·옥구·김제 등지를 배편을 통해 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 활동에 열중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시내에서 3㎞나 떨어져 있는 궁말(현 구암동)의 습지대에 살면서 잦은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어린 세 아들(Sidney, Francis, George)을 병으로 인해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이 쇠약해졌다. 선교사회에서는 그의 사역지를 기후가 나은 전주로 옮기게 했고 활동 반경을 20리 이내로 제한했다. 1904년부터 전킨 선교사가 전주에 옮겨와서 전주교회를 담임했을 때 남장로회 파송 한국 선교사 중 리더격인 레이널즈 선교사는 그의 능력과 인격이 뛰어나 다른 선교회인 북장로회 선교회의 청빙을 받아 서울의 다른 곳에 가서 목회를 담당하기도 했다.
신사참배와 서문교회
1937년 1월부터 신사참배의 위협이 본격화되자 서문밖교회는 신흥과 기전학교의 앞날을 위하여 특별기도를 하였다. 1월 13일(수요일밤 기도회)에는 신흥학교 교사 대표 김가전 목사의 인도로 간절한 기원이 있었고, 교회 제직 몇 사람의 대표기도가 있었다. 1937년 5월 5일(수요기도회)에는 신흥 기독청년회 주관으로 순회 특별기도회를 서문밖예배당에서 드렸는데 김재우 군의 사회, 회장 이강문 군의 기도로 이루어졌으며 신흥학교 학생인 김종신 군과 심상영 군의 신앙간증이 있었다. 이것이 신흥학교 기독청년회의 마지막 순회 예배였다. 신사참배 강요의 마수에 걸려 신흥과 기전 두 학교는 폐교가 확정되었다. 이에 1937년 9월 15일 수요기도회 날,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던 신흥과 기전의 학생들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모교회인 서문밖교회의 사랑의 정을 못잊어 폐교 송별 기념식을 교우들과 함께 가졌다. 일본은 이 날에도 발악적이고 의도적인 방공연습을 실시하여 등화관제시켰다. 그렇지만 행사는 계속되었고 먼저 기전학교 학생 대표가 폐교 송별사를 울면서 피력하였다. 다음 신흥학교 학생 대표도 통분함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폐교 송별사를 울부짖으며 낭독했다. 서문밖 교우들 가운데 울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예배당 안은 너무나 침통하고 숙연하였다.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던 기전과 신흥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청동제 화병 한 쌍과 화분대16) 두 대를 마련하여 교회에 바쳤다. 그 밤에 신흥의 린턴 교장 부인 인사례 여사가 기념품으로 화병을 교회에 바치는 순서도 함께 가졌다.
큰 타격을 받고 다시 일어서는 서문밖교회
1937년 9월 15일 밤 서문밖교회는 신흥과 기전학교 학생들의 송별예배를 드리고, 22일부터 4일간은 신흥학교 학생들을 고창으로 떠나보내고 전주 시내로 전학가는 기전학교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흩어졌다. 9월 26일, 주일이 되었는데 교회에는 빈자리가 너무 많아서 처절할 정도였다. 교회 제직 중 김교문 안수집사의 가정을 위시하여 김태훈·최계남·박준영·김병수 선생과 그 가족의 자리가 비었고 신흥과 기전 학생들의 자리가 집단적으로 비어 있었다. 그날 주일 예배일지의 출석 상황 난에는 ‘신흥·기전학생 전무(全無)’라고 간명하게 기록되었다. 공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일학교 부서에서 신흥학교 학생 교사의 궐석이 확연하였다. 처량한 공백이었다. 모든 교인들은 침묵으로 처절함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 자리를 메워야 할 각오를 무언으로 다짐하는 눈빛들뿐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에 새삼스럽게 설명이나 강조가 필요치 않았다. 오직 먼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 것을 믿고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설 것을 다짐할 뿐이었다. 군국주의 침략 야욕에 기초한 일본의 기독교 억압 정책이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었으나, 교인들은 어려움을 이겨갔다. 교인들은 예배당 신축으로 인한 부채를 힘써 갚아가며 교회 내 각 부서에서 새교인과 직원의 확보에 힘쓰고 주일학교 교육에도 열심을 내었다. 1937년 5월 4일부터 열렸던 제31회 전북노회의 전주지방 시찰위원회 보고 중 서문밖교회의 상황을 보면, 작년(1936년) 8월 15일 미증유의 수재를 당하여 교우 중 가옥을 유실당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참상을 겪는 중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생명을 잃은 교인은 없었다. 교인 중에는 매일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며, 성경연구를 열심으로 하여 신령상 많은 진보가 있었다. 종전에 예배당 안에서 경영하였던 숭덕학교는 차츰 발전되어 특지가를 얻어 시내 노송동으로 이전하여 교사를 새로 지었고 박성근 씨와 설립자 배은희 목사의 협의로 서문밖교회에서 분리, 독자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전주유치원은 여전히 교회 직영 사업으로 경영중이었다. 1937년 정초에는 부인조력회에서 예년과 같이 여자사경회를 개최하였고, 주일학교와 면려청년회도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교회는 전년 수재로 인하여 무너진 전도실 건물을 다시 건축하기로 계획하였으며 성인 교육을 위하여 한글 보급운동을 교회 내적으로 실시하여 글 모르던 교인들이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힘썼다. 1937년 11월 3일(수요일)에는 그동안 배은희 목사의 사양으로 미루었던 전별식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는 헌당식(1937년 10월 31일)도 마친 뒤였으므로 기도회 후 이미 제직회에서 선출하여 맡겼던 위원들17)이 준비한 기념품을 드림으로써 전별의 예를 갖추었다. 이날밤 예배 때 설교는 조하퍼 선교사18)가 담당하였는데 그 당시 시국과 관련된 설교로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 이듬해 6월 7일부터 열린 제32회 전북노회에 제출한 전주 시찰위원회의 보고를 보면, 서문밖교회는 신흥·기전 두 학교의 폐교로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염려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 또 그 동안 마음에 걸려있던 예배당 신축 부채가 완전히 정리되고 1937년 10월 31일에 헌당식을 거행함으로써 교인들은 이제 가슴을 펼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교회는 다시 힘을 내어 400원의 예산으로 교회 관리원(사찰) 주택 10여 평을 신축하였고, 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1937년 2월 28일부터 1938년 5월 24일 어간에 순차적으로 장로 1명(안백선)과 안수집사 5명(김교문·배보석·오공여·김진태·김형술)을 선출하였고 각기 날짜를 정하여 임직하여 교회의 일꾼을 더욱 보강하였다. 1938년을 맞아 서리집사를 증원 임명하였다. 신흥과 기전 두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된 지 9개월도 못되어, 1938년 6월 8일 시작된 제32회 전북노회는 각 교회의 목사 27명 중 24명, 선교사 7명 중 4명, 장로총대 103명 중 97명으로, 모두 125명이 회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