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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주 중 하나인 분주(汾酒)의 술병에는 "주막이 어디에 있는가 물으니 / 목동은 저 멀리 살구나무 마을을 가리키네"라는 두목(杜牧)1)의 시구가 쓰여 있다. 이 광고 문구는 술의 산지가 산서성(山西省) 분양현(汾陽縣) 행화촌(杏花村)이라 두목 시구와 딱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살구나무 우거진 곳에 술 익는 내음을 상상하게 하여 마시기도 전에 이미 한가롭고 아름다운 풍경에서 풍겨나오는 향기에 푹 빠지게 하는 묘미가 있어 분주의 명성을 배가시키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자극적인 것을 기대하는 이 시대에 긴 호흡을 필요로 하고 잔잔한 여운을 느껴야 하는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인은 천 년 전의 시구를 글쓰기의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광고 문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는 수천 년간의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까지도 함께 호흡하고 있는 시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에서 근원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은 스스로 '시의 나라' 후손임을 자처하는데, 한자의 상형문자적 특성이 이미지 전달을 위주로 하는 시와 잘 부합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만,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간결하고도 인상 깊게 표현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의 『시경(詩經)』부터 시작된 중국 시의 역사는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웠다. 한(漢)나라 때까지의 시가민가로서 백성들의 공통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었다면, 한나라 말엽부터는 시인의 개인적인 정서를 읊기 시작하였고, 당대에 이르러서는 시를 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적 장치, 시인의 비약적 증가에 힘입어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또한 질적으로도 근체시(近體詩)와 고체시(古體詩)2) 스타일이 완성되어 성숙해졌으며 다양한 수법과 세련된 언어로 인간의 수많은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고 있어 독특한 맛을 지닌 '당시(唐詩)'가 형성될 수 있었다.
중국의 시가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면 거기에 우뚝 선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꼽을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11살 터울로 나이차는 별로 나지 않았으나 당시(唐詩)의 서로 다른 두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이백이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전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했다면 두보는 난리 이후의 혼란스럽고 강퍅한 시대에 주목하였다. 이백은 시선(詩仙)이라는 별칭답게 맑은 물에 피어난 연꽃처럼 청순한 자연미를 환상적으로 표현하였다면, 두보는 시성(詩聖)으로서 인생과 사회를 비추기 위한 거울을 애써 닦고 단련하여 현실 지향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예부터 쉬우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이백의 시는 신선의 경지와 같아 쉽게 닿을 수 없다고 여겼으나, 엄격하면서도 치밀한 모색에 의한 두보의 시는 열심히 공부해서 갈고 닦으면 결국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시인들이 이백보다는 두보를 모방, 추종하였으므로 한자 문화권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두보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것은 그가 대단한 천재여서도 아니고, 화려한 경력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아마도 갈등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하려 무단히 애썼던 것, 그것이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오웬(Stephen Owen) 교수는 두보에게 '대립하는 양자'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 두보는 하고 싶어 했고 해야 한다고 믿었던 당위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간극 속에서 항상 갈등의 불씨를 품고 있었다. 인간이란 시지프스의 신화에서처럼 무거운 돌을 짊어져야 하는 고통 받는 존재이듯, 두보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현실의 무게에 억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형벌로 생각하지 않았고 현실의 돌을 들어 올리면서 이상을 꿈꾸며 동경하였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엇나가기만 하였고, 그 부조화 때문에 희망과 좌절을 오갔으며 유가와 도가, 불가가 복잡하게 얽힌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릎이 꺾였을 갈등 속에서 그는 시를 대안으로 삼아 끊임없이 시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하였고, 놀랄 만한 작품을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두보는, 몰락한 세족 출신이 대개 그렇듯 진(晉)나라 명장이었던 13대 조부 두예(杜預)와 당나라 초엽 문명을 날렸던 조부 두심언(杜審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자신도 언젠가 관직에 나아가 그들처럼 정치적 이상을 펴리라고 다짐했었다. 청년 시절 두보는 전국을 답사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유명 인사들과 시문을 논하며 꿈을 다져 나갔기 때문에 스스로를 반고(班固)와 양웅(揚雄)에 견줄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였다. 과거에 두 차례 낙방했어도 그다지 상심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안정과 번영은 두보의 이러한 이상 지향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그는 시를 통해, 태산에 올라 뭇 산들이 얼마나 작은지를 바라보겠다며 큰소리를 치거나, 임금을 요와 순 위에 올려놓겠다고 다짐하면서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고자 자존심의 날을 세웠던 것이다.
두보는 입신출세에 대한 이상을 줄곧 견지하고 있어서 가정 형편이 악화되어 생계에 위협을 받자 약초를 재배하여 팔면서 유력자에게 시를 지어 추천을 바라기도 하였고, 조정에 직접 문장을 지어 올려 보기도 하였다.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절망 속에서 이 생활을 청산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가 다시 관직을 구하고 다시 실의를 반복하는,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구직생활이 지속되었다. 결국 나이 44세에 간신히 무기를 관리하는 낮은 관직을 얻게 되었는데, 두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자리였으나 아들이 굶어 죽는 판에 생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여전히 그의 편이 아니었다.
755년에 터진 안록산의 난은 그의 모든 기대를 허물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이 난리는 당 왕조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두보 개인의 인생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반란군의 포로로 붙잡힌 두보는 사선을 뚫고 전란 중에 왕이 된 숙종(肅宗)에게로 달려갔다. 새 군주에 대한 기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온 보람이 있었는지 임금께 직간을 임무로 하는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관직은 그에게 맞지 않은 옷이었다. 모함에 빠진 친구를 위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고 만 것이다. 씁쓸한 두보는 장안(長安)을 빠져나오며 이렇게 읊조렸다.
이 길로 지난날 임금께 돌아갈 때,
서쪽 근교에는 오랑캐가 한창 들끓었지.
···
재주도 없이 날로 늙어 쇠약해짐에
말 멈추고 임금 계신 궁궐 바라다본다.
-「지덕 2년, 내가 장안의 금광문(金光門)에서 나와 봉상으로 돌아갔었다. 건원 연간 초에 좌습유(左拾遺)에서 화주연(華州掾)으로 이직하게 되어 친구들과 이별하고는 이 문으로 나오니 옛일에 슬프기만 하구나」 중에서.
평소의 꿈을 이루고자 목숨을 걸고 장안을 떠나 새 군주를 찾은지 1년 만에 다시 실의한 채 장안을 떠나는 시인의 쓸쓸한 모습이 겹쳐진다. 이후로 죽을 때까지 두보의 삶은 부평초 같이 떠도는 인생이어서 불안한 경계인(境界人)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는 「입추가 지난 후」라는 시에서, "평생에 홀로 원하는 바 있었으나 / 슬프게도 나이는 벌써 반백이구나. / 관직을 버림은 역시 사람 때문이니 / 어떤 일로 마음이 육체의 노예가 되리오?"3)라며 조정에 가득한 소인배 때문에 이상을 펴보지도 못한 채 실의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였다. 이때부터 두보의 정치적 포부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관직을 얻어 이상을 펴보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유랑을 하며 고난의 객지생활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보의 시야는 더욱 확대되었다. 이전에도 백성의 고초에 대해 무심하지는 않았지만, 여정 중에 백성이 겪는 참혹한 현실을 목도한 후 「삼리(三吏)」, 「삼별(三別)」 등을 창작하여 개인적 고통을 전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성들이 겪었던 고난의 피와 눈물을 생생하게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을 펴보지도 못한 채 무릎이 꺾였던 두보는 시인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진지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화주(華州)에서 진주(秦州)로, 다시 동곡(同谷)을 유랑하면서 민중의 곤궁한 삶의 현장과 애환을 하나하나 시에 담았고, 성도(成都)에 정착하여 오랜만에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동화된 맑고 조용한 작품을 창작하면서도 세상의 고난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 예로 「띠집(茅屋)이 가을바람에 부서지다」의 후반부를 보자.
지붕 새어 침상 머리 마른 곳 없고
빗발은 삼 줄기 같이 그칠 줄 모른다.
난리 겪으며 잠은 적어졌지만
젖은 채로 긴 밤 어찌 새우리오?
어찌하면 천만 칸 큰 집 지어
천하의 가난뱅이 크게 감싸 함께 환한 얼굴 되어서
비바람에도 산처럼 태연할 수 있을까?
아아!
언제든 눈앞에 우뚝 선 그런 집 보이면
내 오두막 부서져 얼어 죽는다 해도 족하리라!4)
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가을에 태풍이 불 적마다 얼마나 마음 졸이는가? 지붕이 날아가고 가재도구가 햇볕 아래 나뒹구는 속수무책의 상황을 보면 손이라도 잡아주며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게다. 두보 역시 오랜 방랑 끝에 초당(草堂)을 짓고 잠시나마 한숨 돌리려 하였지만, 졸지에 재난을 당한 백성들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지만 자신의 생계조차도 해결 못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곳곳에서 전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두보는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없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참혹상과 백성이 받는 고통을 어느 역사서보다 생생하게 기록하여 독자의 심금을 울렸으므로 그에게는 '시사(詩史)'라는 칭호가 남게 되었다. 성도에서 운안(雲安), 기주(夔州), 다시 강수(江水)와 상수(湘水)로 떠돌면서 시 창작에 더욱 몰두하는데, 관직 생활에 대한 미련보다는 고단한 삶을 사는 백성들에 대한 동정,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위정자의 부재에 관한 작품을 써, 여전히 허망해 보이는 이상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한 채 곤궁과 병에 고통 받는 인간 두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그의 시에서는, 자신을 '버려진 물건'이라며 자조하거나, 자부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다가도 때로는 지혜로운 늙은 말로 비유하는 등 자탄과 함께 아직은 웅지를 품고 있음을 과시하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흰 구름, 푸른 산이 만여 리인데, / 줄곧 북쪽으로 근심스레 보는 것은 장안일 뿐"5)이라며 죽을 때까지 조국의 현실과 백성들의 안위를 근심하였다.
두보의 생애에서 실제로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3년도 되지 못하였다. 그것도 자신의 마음에 썩 내키지 않은 직위라 불안하고 답답한 생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생애를 걸쳐 끊임없이 제세(濟世)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에 대해 손 쓸 수 없는 무능을 자조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여 위정자들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려 하였다. 이상을 펼 수도, 그렇다고 현실을 간과할 수도 없었던 시인 두보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고통과 인내를 시화했던 것이다.
당나라 시대는 사상이 비교적 개방적인 시대였다. 통치자들이 유교와 도교, 불교를 모두 중시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당시의 문인들에게는 이 세 요소가 복합적으로 보인다. 두보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유가적 사고방식을, 개인의 행위양식은 도가, 불가적인 감정의 흐름에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대학의 원종례 교수는, 두보는 복합적 인격이 극단적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유ㆍ불ㆍ도가 서로 보완적이기 보다는 갈등관계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그의 복합적 인격이란 항상 이상과 현실의 경계 위에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어디로 향할지 불안해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두보는 스스로 밝힌 대로 유생(儒生)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유가적 열망, 즉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길만이 참된 것이라는 믿음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는 갖가지 좌절을 맛본 뒤에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이상의 목소리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은둔의 길을 택해야만 했고, 때로는 스스로도 강렬히 은거를 지향했기 때문에 모순과 충돌 속에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은거의 뜻을 두고
세월 보내려던 뜻 없었던 것도 아니나,
생전에 요순과 같은 임금 만났으니
차마 길게 떠나지 못하겠구나.
지금의 조정은 잘 갖추어져 있으니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있으랴?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기울어지는 것,
만물의 성질은 정말 바꾸기 어려운 법이네.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면서」 중에서6)
과감히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갈등을 하면서도 결국 관직에 대한 의지는 앙금처럼 남아 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관직에서 떠나 유랑하는 중에도 여전히 현실과 중원의 소식에 귀 기울이면서 한편으로는 도가적 성향을 지닌 인사들과 자주 어울렸고 함께 단사나 영지 등 장생불로 약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또 불교의 사찰도 유람하고 불법에 대한 강의도 들었으며 스님들과도 교류를 하는 등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뇌와 모순이 없는 이상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심리 또한 있었던 것이다. 유가적 이상에 대한 개인적 욕망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고통의 해소를 위해 도가와 불가에 의지해보려 했지만, 여기서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결국 그에게 정신적 탈출구는 시의 세계였다.
평생 동안 이상을 지향하면서 살았던 두보는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다소 변화된 양상을 보였다. 어린 시절의 생각은,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여 입신양명하리라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외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더 이상 관직 생활이 자신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히 좌절된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후 이상과 포부가 점차 내면화되고 심화되었던 것이다. 화주(華州)로 좌천된 이후 그는 관념의 정치와 실제의 정치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그 실제의 정치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추구해왔던 삶의 진실을 도저히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내면화하고 시로 토로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두보의 시 가운데 90% 이상이 난리 이후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피 흐르는 대지를 응시하면서 쇠망해가는 시대, 내심의 갈등과 비애를 충실히 묘사해 내고자 하였다. 때로는 백성을 착취하는 위정자들을 폭로했고 전쟁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에 동정하였으며 그들의 올바른 정치에 대한 염원을 대변해주었다. 찬란했던 당(唐) 제국이 하루아침에 쇠망하게 된 전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권력을 향한 싸움이 자신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등 역사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시로써 표현했던 것이다.
가시덤불 덮인 고향, 승냥이와 호랑이 같은 관리들 때문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에게 주목하면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음을 자책하며 잠 못 이루었던 두보는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때로는 사람 일은 그저 그런대로 놓아두자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허무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마음속의 갈등과 중압감은 지속되었다. 정치와 역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담은 개인적 고난과 맞물려 시에서 불안한 정서와 괴로움으로 나타났다. 두보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높은 데 올라」는 늦가을이 주는 중압감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람 급하고 하늘 높은데 슬픈 잔나비 울음,
물은 맑고 모래 흰데 새는 선회한다.
가없는 낙엽이 우수수 지고
끝없는 장강은 도도히 흘러온다.
만리타향에서 가을 슬퍼하며 늘 떠도는 신세라,
평생 병 많은 몸으로 홀로 누대에 오른다.
어려움 속에 서리 앉은 머리털 괴롭고 한스러운데
지쳐 쓰러져 탁주도 이제 끊는다.7)
갈등과 좌절을 시로 승화해보려 하지만 결국 견딜 수 없는 비애를 안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시인의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현실에서 성취를 이루지 못한 점은 그로 하여금 사회의 어두운 면에 눈을 돌리게 한 동시에 시 자체의 예술성에 집착하게 했다. 즉 무겁고 침울한 내용들을 가장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형식과 치밀한 기교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원래부터 시를 가업이라 여기며 놀라운 시구를 얻기 위해 부단히 애쓴데다 전대 시인들의 성과를 모두 흡수, 집대성하였으므로 자기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일찍이 중국의 어떤 학자는 위의 제5, 6구에서 무려 여덟 가지의 의미를 찾아냈는데, 두보의 시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지 않다. 시 한 구, 글자 하나가 치밀한 계산 아래 창작되었기 때문에 글자 한 자라도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된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 수업 중에 두보의 시 한 편을 한시간 내내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두고두고 감탄한 적이 있었고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기교에 머리가 쭈뼛했던 적도 있었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부(開府) 가서한(哥舒翰)께 드림」 같은 장편 배율(排律)은 첫 두 구와 마지막 두 구를 제외하고 모두 대구를 써야하는 까다로운 형식인데, 두보는 자신을 추천해줄 가서한을 송찬하면서도 기막힌 대구를 운용하여 은근히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었다. 시를 바치는 대상을 높이면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어 추천을 호소하는 두 가지 목적을 솜씨 있게 잘 처리하였는데, 그의 이와 같이 치밀하고 다양하며 조직적인 시상(詩想) 배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것이어서 강단의 선생님이 각 시구의 연결고리들을 풀어서 해석하실 때마다 우리들은 놀라움에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참으로 두보의 시는 이른바 아는 만큼 보이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체시와 근체시를 완성시켰고, 치밀한 구상과 절제된 언어로서 시어를 정련하였으며 각고의 노력을 들여 누구보다도 정교한 시를 창작하였다. 두보는 현실과의 갈등을 예술성 깊은 시로 승화 시킬 수 있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중당(中唐) 이후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으며 수많은 시인들의 시적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두보는 생전에 높은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번황(樊晃)이 『두공부소집(杜工部小集)』을 엮어낸 이래 수많은 판본과 주석서들이 나왔다. 청(淸)나라 때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注)』, 포기룡(浦起龍)의 『독두심해(讀杜心解)』, 두양륜(杜楊倫)의 『두시경전(杜詩鏡銓)』 등이 중요한 것으로 손꼽히며, 그중에서도 구조오의 주(注)는 두보 시 주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성종 12년(1481) 유윤겸(柳允謙) 등이 두보의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지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한자 문화권에 있어서 두보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최근 우리나라의 중국 문학자 몇몇이 두보의 시를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현재 152수의 시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두보의 작품뿐 아니라 대표적인 주석서들의 주석도 완역하고 있어 작업이 더디긴 하지만 『두시언해』 이후 최대의 역작이 되리라 믿는다.
감탄할 만큼 기발한 시어나 재기가 반짝이는 시적 장치뿐이었다면 그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독자의 마음속에 자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보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의미가 있는 것은 '시성'이라는 그의 별칭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인간 두보의 진실한 감정과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내었다는 점이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을 느끼게 한다. 소망과 기대가 꺾였을 때의 굴욕과 억울함, 가난에 식구들이 흩어지고 자식까지 잃어야만 했을 때의 가장으로서의 무력감과 비애, 함께 고통 받는 백성들에 대한 애정과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 세상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허탈함과 자괴감 등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 그의 인생에 대한 솔직함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또한 우리는 그의 고통과 좌절,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시로서 승화시키려는 의지에 감동한다. 시의 예술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많은 독서와 습작, 각고의 노력을 통해 새로운 시적 영역을 개척하였고 누구보다 뛰어난 예술성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이 모여 인생을 이루는 우리 같은 보통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들을 한다. 왜 하필 시인가? 시는 왜 쓰여지고 읽혀지는가? 시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시인이 남긴 고통의 언어를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문학은 도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두보의 작품을 통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1. 두보시의 대표적인 풍격은?
두보의 시는 상당히 다양한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전형적 풍격이라면 대개 '침울돈좌(沈鬱頓挫)'를 꼽는다. 침울은 비분의 정서와 결합되어 있으며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무겁고 충실한 내용을 가리킨다. 그리고 돈좌는 내면의 미처 분출되지 못한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굴곡을 두고 대비를 하며 비장한 느낌을 주게 하는 형식적인 특징을 말한다.
2. 두보의 현실비판적 정신은 후대 어떤 시인들에게 계승되었나?
당나라 때의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稹)을 비롯해서 송나라 때의 애국시인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우리나라 문인들은 두보의 작품을 어떤 경로로 읽었을까?
고려 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 흔히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 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보의 시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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