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方[7301]오류선생(五柳先生)도잠(陶潛)-사시(四時)
도연명(陶淵明)의 〈사시(四時)〉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이요
봄 물은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峯(하운다기봉)이라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가득하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요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날리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이라
겨울 산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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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사시(四時)= 네 계절.
春水 (춘수)= 봄 물
滿四澤(만사택)=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봄 물은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夏雲 (하운)= 여름 구름.
多奇峯(다기봉)=기이한 봉우리에 가득하네.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가득하네.
秋月 (추월)= 가을 달
揚明輝(양명휘) =밝은 빛을 드날리고
冬嶺 (동령)= 겨울 산
秀孤松(수고송)=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陶=질그릇 도.
淵=못연
滿=가득할 만
澤(택)=못
夏= 빛날 휘
奇=기이할 기.
冬=겨울동.
嶺=고개령.
秀= 빼어날 수.
孤=외로울 고.
松(송)=소나무
峯(봉)=봉우리.
揚= 오를 양.날릴 양.
輝(휘)=빛날 휘.
봄 물, 여름의 뭉게구름, 가을 달, 겨울의 소나무를 가지고
4 계절의 특징을 살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자연미 그 자체를 주제로 한 곳에 이 시의 특색이 있다.
1 구 : 겨울동안 꽁꽁 얼었던 산천이 봄바람에 녹으면서
내를 이루고 흐르다가 저지대에 와서 웅덩이나 못을 이루며
고여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기 서린 봄철의 온화하고 풍성한 기분이
느껴지면서 마치 시냇가의 흔들리는 버들강아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2 구 : 한여름 하늘에 피어나는 뭉게구름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의 얼굴이 되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웅장한 성이 되기도 하고,
떼지어 다니는 양이 되었다가는 다시 흩어지는 새의 깃털이 된다.
바다가 보이는 산길에 앉아 멀리 수평선 끝으로 솟아오르는 뭉게구름은
어느덧 층층이 기기묘묘한 산봉우리를 이루며 자기의 변화무쌍한 자태를 뽐내곤 한다.
3 구 : 자연을 노래하는 시의 소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을을 노래할 때 시인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소재 중에는 달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리고 달 하면 역시 밤 하늘에 높이 떠서 사방을 밝혀주는 가을 달이 으뜸이다.
1년 4계절 달이 뜨지만 가을에 뜨는 달은 빛이 더 밝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도연명 역시 4계절의 특징을 노래하면서 달을 대표적인 소재로 삼아
가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 구 : 여름과 가을을 초록빛깔과 고운 단풍으로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산천의 초목들도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된다. 이와 같이 만물이 황량한 겨울 산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만이 우뚝 솟아 세찬 눈보라에도 시들지 않고,
사시(四時)를 다 지나도록 길이 푸른 빛을 간직한 채 빼어난 자태로 외로이 서 있다.
도연명은 당(唐)이 망하고 아직 송(宋)이 들어서기 전인 시기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에 벼슬을 떠나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절개와 지조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4구에서는 겨울 산에 시들지 않고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통해
변함없는 자신의 절개와 지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자연미가 다분히 윤리적인 미, 즉 사람의 뜻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시(四時) - 네 계절에
도연명(陶淵明) 도잠(陶潛)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엔 물이 사방 못을 가득 채우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여름 구름 기이한 봉 많이 만들며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가을엔 달 밝은 광채 뿌려대는데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겨울 고개 홀로 솔만 빼어나구나.
원문=《 古文眞寶 前集》
春水滿四澤,夏雲多奇峰
秋月揚明揮,冬嶺秀孤松
봄물은 사방 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많구나.
가을달은 밝은 빛을 휘날리고,
겨울 고개엔 외로운 소나무 빼어났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