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 10타 >
< 개회 >
< 입정 >
< 영주 >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 기원문 >
< 불전헌배 >
< 묵상심고 >
< 독경 >
.일원상 서원문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반야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과애 무과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청정주
법신청정 본무애(法身淸淨 本無碍)
아득회광 역부여(我得廻光 亦復如)
태화원기 성일단(太和元氣 成一團)
사마악취 자소멸(邪魔惡趣 自消滅)
< 9인 선진 이야기8 >
칠산 유건
칠산 종사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상이 호풍하고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원기 원년(1916)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부임에도 불구하고 칠산 종사는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단호히 제자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되는 대종사에게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원기 2년(1917)7월 남자 정수위단 조직시 곤방(坤方)단원으로 입참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등 회상창립에 공헌하였다.
① 소태산 대종사의 외숙(外叔) : 칠산 유건 종사는 1880년 11월11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유호일(劉浩一)선생과 모친 이(李)선생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칠산 종사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상이 호풍하고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학문에는 소홀하였으나 일찍 동학에 입문하여 득도묘술에만 발원한 관계로 범인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그것이 무실함을 깨닫고 32세때에 퇴교하였다. 원기 원년(1916)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부임에도 불구하고 칠산 종사는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단호히 제자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되는 대종사에게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처음에는 생질되는 대종사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차차 신성이 깊어감에 따라 추호의 개교심이 없이 독실한 신성으로 대종사를 받들었다. 칠산 종사는 대종사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꼭 [종사님]이라 불렀다. 혹 묻기를 [생질을 스승님으로 모시기가 어색하지 않느냐?]고 하면 [육신은 생질이지만 법은 지존(至尊)의 스승이시다]고 하여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원기 2년(1917)7월 남자 정수위단 조직시 곤방(坤方)단원으로 입참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등 회상창립에 공헌하였다. 혈인기도때 칠산 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받은 법명이 유건이었다. 속명은 성국(成國)
② 위대한 심법의 소유자 : 혈인기도를 마친후 칠산 종사는 수년간 수시로 언답 감독도 하고 사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그후 칠산 종사는 영광 사가에 계속 머물면서 가사에 주력,거진출진으로서 담담한 심정으로 심산평야에서 32년간을 목우작농(牧牛作農)하다가 원기 42년(1957)78세시에는 죄송하고 민망해 마지않는 후진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총부 옆 중앙수양원에 이거(移居)하여 만년 수양에 힘쓰시다가 원기 48년(1963)2월22일 83세를 일기로 열반하니 9인성진중 최후 생종자였다. 칠산 종사는 키가 크고 기상이 당당(堂堂)하며 특히 기력이 장하여 방언공사시에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혈인기도 때에는 가장 멀고 험한 기도봉을 맡았으며, 때로는 강건너 기도터를 약한 단원을 대신하여 다니기도 했었다. 칠산 종사의 심법상(心法上)위대한 점을 대산 김대거종법사의 법문을 인거해서 밝혀보면, 첫째,사가로 돌아간후 아들이 병으로 누워 있어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였으나 땔 나무하러 산에 다닐 때 남들은 다 교중(敎中)의 산에서 나무를 베고 야단이지마는 칠산 종사는 손자를 데리고 교중 산을 훨씬 넘어 10리,20리 다니며 땔 나무 한 점이요, 둘째,9인선진이었으나 훨씬 후진에게도 법으로 대하여 조금도 9인선진중의 1인이라는 상이 없은 점이요, 세째, 영산재방언공사때 품팔이와 땅떼기를 하므로 [일은 그만두고 감독만 하시드라도 노임을 드리겠으니 그리하시라]고 종용(慫慂)하였더니 [과거에 칠산이지 지금도 칠산이냐]고 하면서 일체 거부하고 그대로 손자와 땅떼기한 점 등이다. 칠산 종사가 열반하자 장의는 교회중앙장으로 엄수하였고, 묘지는 총부부근 알본에 있었으나 원기 70년(1985)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칠산 종사는 제1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법마상전급이요, 사업등급 정4등을 원성적은 준 3등77인중 36호에 해당되었고, 열반후 바로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되었으며, 원기 70년(1985)3월20일 제103회 임시수위단회 결의에 의해 대호법으로 추존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일곤 선생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으며 손자가 서울에 살고 있다.
③ 외숙과 제자 : 유건이 여러 제자와 함께 무릎을 꿇고 대종사를 모시고 있었다. 대종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분은 나의 외숙인데도 나를 이처럼 공경한다. 내가 미안해서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항상 저렇게 한다.] 유건이 말했다. [이 생의 육신 인연으로는 내가 비록 대종사님의 이삼촌이지만, 영생을 통해 놓고 보면 대종사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님이요,나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스승을 대할 때에는 항상 공경해야 하는것입니다.](소태산 대종사 일화중에서)
< 아침기도의 노래 >
1.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은혜속에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건강한 몸 맑은 맘으로 부지런히 부처님 길 닦게 하소서
2.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은혜속에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고마운 맘 고운 말씨로 인연마다 화한꽃이 피게하소서
3.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은혜속에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좋은 세상 이루기위해 모두 함께 보람찬 일 하게 하소서
< 폐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