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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2장
평범함에 관하여
1975.06.12, 붓다홀에서
제가 잘못 찾아온 것입니까? 저는 평범하고 행복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제가 사랑할, 그리고 저를 사랑해 줄 여자를 원합니다. 그리고 같이 즐기고 시간을 보낼 친구를 원합니다. 저는 깨달음을 원치 않습니다. 제가 잘못 찾아온 것입니까?
수 세기 동안의 잘못된 교육이 깨달음에 대한 그대의 마음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 깨달음이라는 말이 그대에게는 기이하고 내세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은 죽음 다음에 있는 어떤 것으로, 또는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만일 그대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깨닫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대가 평범해지고 싶다면, 어느 누구도 깨닫지 않고 평범해진 적이 없다. 그대가 사랑하고 또 사랑 받고 싶다면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대는 깨달음에 대한 나의 개념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평범하고, 건전하고, 자각적이고 전체적이 되는 것이다.
모든 마음은 어떤 비범한 것을 찾는다. 그것이 바로 에고이다: 에고는 항상 어떤 특별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기를 두려워하며, 비어있기를 두려워하고, 내면의 공허를 어떤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항상 노력한다. 모든 사람들은 비범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 - 바로 그것이 슬픔을 낳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아닌 것이 바로 그대의 본질이다. 그대는 아무런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대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대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알렉산더 같은 사람조차도 실패한다. 그대는 그 어떤 사람(somebody)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도 아닌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도 아닌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그대가 그 아무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즉시 지극한 기쁨이 그대로부터 사방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 슬픔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슬픔은 에고의 그림자이다. 야망에 찬 마음의 그림자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그대가 어떤 불가능한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하기 때문에 그대는 슬퍼지는 것이다. 그대는 어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하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그럼으로써 그대는 좌절하고 슬퍼지는 것이다. 지옥은 불가능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천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대는 아무도 아니다. 그대는 이름도 형상도 없이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대는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죽을 것이다. 이름과 형상은 표면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 그대는 단지 거대한 공간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 어떤 사람이라면 그대는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만일 그대가 어떤 사람이라면 그대는 유한하고 제한적이며 속박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신은 그대에게 아무도 아닌 사람, 무한하고 끝이 없는 존재가 되는 자유를 주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나에게 깨달음이란 이런 현상이다: 사람이 아무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대는 구두끈으로 그대를 끌어 올리려는 일을 중단한다. 그대는 그 일의 어리석음을 이해한다 - 그리고 중단한다. 그리고 그대의 존재 위로 웃음이 퍼진다. 갑자기 그대는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그 노력이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할 때, 그대는 사랑할 수 없다. 야망에 찬 마음은 사랑을 할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야망에 찬 마음은 먼저 자신의 야망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야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는 계속해서 사랑을 희생시킬 것이다. 야망에 찬 사람들을 보라 - 그들이 돈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언제나 사랑을 연기한다. 내일 많은 돈을 모으면, 그때 사랑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지금 당장은 어떤 식으로 든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다. 사랑은 휴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취할 어떤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 목표는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명예일 수도, 정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을 수가 없다 - 사랑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현상이다. 사랑은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야망은 미래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야망은 절대로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대는 사랑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사랑은 내일도 아닌 바로 이 순간에 함께 있을 준비가 되어 있고, 바로 이 순간에 전체적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모두 잊을 준비가 된 두 존재 사이의 깊은 교감이다. 사랑은 과거와 미래를 잊는 것이며, 이 순간, 고동치는 이 순간, 살아 있는 이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다. 사랑은 순간의 진리이다.
야망에 찬 마음은 절대로 이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항상 끊임없이 움직인다. 어떻게 그대가 달려가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항상 경쟁 속에 있다; 그는 시간이 없다. 그는 미래의 언젠가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그가 추구하던 권력을 얻었을 때, 그가 바라는 부를 얻었을 때, 그때 휴식하고 사랑하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목표는 절대로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야망은 절대로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야망은 성취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떤 야망을 성취할 수 있겠지만, 그 즉시 수 천의 다른 야망이 그 야망으로부터 일어난다. 야망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대가 야망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야망에 에너지를 준다면, 그때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면서 그렇게 비참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할 수도 없고 사랑을 받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황홀경이다: 무심의 황홀경, 현재의 황홀경, 야심 없는 상태의 황홀경, 텅 빔의 황홀경이다. 연인이 있는 곳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사랑만이 존재한다. 두 연인이 만날 때 그들은 둘이 아니다. 밖에서 볼 때는 두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막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둘이 아니다. 그들이 만나는 순간 둘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아 흐른다. 그대의 내면이 비어있지 않다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그대와 그대의 연인 사이에 어떤 장애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게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그대가 어떤 사람이라면 그대의 연인 또한 어떤 사람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실제로 있는 두 사람과 그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어떤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뒤에 선 두 거짓된 에고가 악수도 하고, 애무도 하고, 사랑의 몸짓을 한다. 그것은 드라마이다; 우스운 일이다! 연인들이 만날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아닌 두 사람은 둘일 수 없다. 어떻게 두 개의 무(無)가 둘일 수 있겠는가? 무는 경계선이 없다 - 무는 광대함이다. 두 개의 무는 하나가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 둘은 둘로 남는다.
내가 아닌 그대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사랑이 그렇게 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의 사랑은 추한 것이다. 가장 추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 될 수도 있었지만 가장 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연인들은 계속해서 서로 싸우고 다투고 상대에게 고통을 준다.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은 지옥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대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대가 홀로 있을 때, 그대는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대의 연인과 함께 있을 때, 긴장이 생긴다. 그대는 홀로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아닌 것(nobodiness)’은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것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갈증과 심한 배고픔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대는 홀로 남을 수 없다. 그대는 함께 있을 사람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어느 누구와 함께 있는 순간 그것은 고통이 된다. 모든 관계는 고통만을 낳을 뿐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가 깨닫지 않는 한, 사랑은 단지 갈등과 투쟁이 된다. 사람들은 차츰차츰 거기에 적응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차츰차츰 우둔해 지고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전체가 그렇게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썩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냄새가 난다. 모든 관계가 썩어가고 추해져 버렸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 받기를 원한다면,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대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대는 사라져야 한다. 떠나가야 한다. - 그럼으로써 깨끗한 무위(無爲)를, 신선한 무위를 남겨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사랑의 꽃이 피어날 수 있다. 씨앗은 이미 그곳에 있으나 에고라는 것은 마치 바위와 같아서 씨앗이 거기서 싹트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는 평범해지고 싶다고 말하는가? - 그리고 사랑하고 싶다고? - 그리고 친구를 원한다고? - 그리고 즐기고 싶다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나 목사나 조직화 된 종교나 교회를 찾아 가보면, 그들의 깨달음은 다르다. 그들은 평범함에 반대한다; 그들은 사랑에 반대한다; 우정에 반대한다; 그들은 즐기는 것을 반대한다; 그들은 그대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을 반대한다. 그들이 가장 악랄한 독살범들 이다.
그러나 그대가 나를 찾아왔다면 그대는 올바른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 깨달음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의미에서 올바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저 세상(other world)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세속적인 존재만이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아니다. 나를 오해하지 마라. 그러나 저기에 있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에 의존한다. 저 세상은 이 세상(this world)에 의존한다. 그리고 하늘은 땅에 의존한다. 그대가 높이 오르고자 한다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러면 내생(來生 /other life)에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생은 현생(現生 /this life)과 맞서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내생은 현생의 발화(發花)이다. 신은 이 세상에 반대하지 않는다. 신은 이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세상 안에, 그 속에 숨어 있다. 그를 찾으려고 세상을 등지고 갈 필요가 없다 - 그렇게 찾아 간다면 결코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숨어 있다. 여기서 그를 찾아야만 한다. 그대 자신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 그것이 그대가 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삶 전체, 이 존재 전체는 사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은 그 안에 숨어 있다. 여기로부터 도피하지 마라.
나는 현생에 반대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어느 것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에 찬성한다. 만일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아무런 목적 없이 창조하지 않았다 - 신은 미치지 않았다. 모든 존재는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다: 만일 현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생이 현생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생이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로 올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관념을 갖고 온다. 내가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는 이제까지 배워 온 깨달음에 대한 관념으로 나를 이해한다. 내가 산야스에 대해서, 포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이해한다. 나는 그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모두 오염되어 있다. 그 말들은 다른 수 백만의 사람에 의해서 수 백만 번이나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과한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공(空)을 완전히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즐기고 그것은 지극한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 자신의 공을 즐김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 있게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서 그의 신비에 동참할 수 있다. 그의 문은 열려 있고, 그는 친구들과 연인들을 초대한다. 그는 나누어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공으로부터 무엇을 줄 때, 그대는 주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공은 다 써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주고, 또 주고, 계속 준다 - 그러나 공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것을 고갈시킬 수가 없다. 오직 유한한 물건들만이 고갈 될 수 있다. 사람들이 구두쇠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기가 비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주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는 자신을 모조리 다 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지 않는 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신성한 현상이다. 사랑은 속된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다 신성하다. 사랑 속으로 들어올 때 그대는 순수함과 천진스러움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 그대는 신의 사원에 들어오는 것이다.
즐겨라! 나는 슬픔이나 침울한 얼굴을 옹호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더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대는 이미 너무도 비참하다. 나는 그대에게 슬픔을 더해 주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가 지극한 행복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타고난 권리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본질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잊어버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대는 행복이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그것이 안에 있는데도 밖에서 찾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데도 멀리서 찾고 있다. 바로 그대 앞에 있는 데도 멀리 있는 별에서 찾고 있다.
영어에는 재미있는 단어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obvious(명백한)’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그대 바로 앞에 있다는 뜻의 라틴어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는 ‘problem(문제)’이다. 그것은 그리스어로부터 나온 것으로, 바로 그대 앞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백하다는 것과 문제라는 것은 어근에 있어서 뜻이 같다. 말하자면 명백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대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문제다 - 왜냐하면 그대가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눈은 멀리 있는 섬을 방황하고 있다. 명백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깨달음이란 명백한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백한 것을 자각할 때 문제는 사라진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이 곧 깨달음의 삶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존재 방식이다; 그것은 성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배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노력이나 수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대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지켜보고, 관찰할 수 있도록 좀 더 주의하는 것이다. 해답은 그대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그것을 멀리서 찾지 마라; 해답은 그대 안에 있다. 그대가 그대 안에서 자리를 잡고 중심을 잡아 뿌리를 내린다면, 나는 그대에게 모든 자유를 줄 것이다 - 가서 사랑하라. 가서 세상 안에 있어라; 이제 그대는 그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깊은 가능성 속으로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거기에서 항상 신을 발견할 것이다. 사랑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러면 신을 발견할 것이다; 식사할 때, 주의해서 깨어 있는 채로 먹어라. 그러면 그대는 신을 발견할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음식은 신이다(Annam Barhm)"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파니샤드는 섹스는 궁극적인 기쁨과 쌍둥이 형제라고 말한다. 궁극적인 마지막 기쁨의 쌍둥이 형제가 섹스이다! 그대는 그것을 너무도 많이 저주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사다리의 제일 밑에 있는 가로대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사다리에 속해 있는 것이다. 가장 위에 있는 가로대도 역시 가장 밑의 것과 같이 사다리에 속해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은 신에 속해있고 신성한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모든 것에서 신성함이 고동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종교는 어느 것에도 맞서있지 않다. 종교는 모든 곳에서 신성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성함은 거기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는 올바로 찾아왔다. 그대의 마음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곳은 마음에게는 죽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이 그대에게는 올바른 곳이지만 마음에게는 잘못된 곳이다. 이곳은 그대의 존재에게 절대적으로 올바른 곳이다. 그러나 그대의 야망과 에고와 자부심과 어리석음에게는 이곳이 가장 잘못된 곳이다. 이 순간에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잘못된 곳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결정하라. 어리석기를 바란다면, 도망쳐라. 그러면 마음은 그대가 사랑하고 있고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대를 우롱할 것이다 - 그러나 그대는 자기가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가 사랑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은 그대가 마음껏 즐기고 있다고 속일 것이다 - 그러나 그대는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대는 어느 면으로 보나 통합된 존재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대는 방황하고 자신을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어떤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할 여인을 원하고, 친구를 원하고, 삶을 즐기고 싶어 한다면 - 내가 그대에게 그 열쇠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