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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불안
김대현
가을은 다시 낙망으로 시작한다. 잔혹한 봄의 기억과 함께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벌써 몇 차례나 겪은 감정이지만 아무래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기억을 한 가지로 고정시키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의가 불러온 심경도 유사한 종류의 것이다. 가을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억에 대한 선전포고는 역사에 역진은 없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소박한 기대를 배신했다. 시간의 흐름이 역사의 역류를 막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역류를 막을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오래전에 있었던 어떤 불안한 기시감을 떠오르게 한다.
누군가의 기억에 가중치를 두어 다른 기억들을 배제하는 역사 국정화 논의는 필연적으로 중심이 되는 기억을 예비한다. 그리고 가중치가 부여되는 기억은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사적인 기억을 국가의 국민 모두의 보편적 기억으로 삼길 원하는 당대 권력자의 기억이 된다. 잔혹한 상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보편적인 규준이 제시된 이상 그에 반하는 기억들은 당연히 규격화된 기억이 주장하는 ‘올바른 역사’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에서 배제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무가치 또한 반가치한 것으로서 천천히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궁극적으로는 소거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서로 다른 역사적 기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인식 기회 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계절에는 힘과 중심에 관련된 시들을 찾아 읽는다.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죽음을 당하기 전에
브레멘으로 가면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음악대에 들어갈 수는 있다고
늙은 나귀가 말했지
브레멘이라고 들어봤어?
그곳은 어디에 있나?
그곳이 있기나 하나?
더 이상 죽음 없이 견딜 수 있는 흰 시간은 오지 못할걸
이 세계에서 가장 빛이 많은 곳에
가장 차가운 햇빛은 떨어지고
죽음보다 조금은 나은 일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네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이 세계에는 없는 곳으로 가는 거야
나귀와 개, 고양이와 수탉이 되어
주야장천 붉은 음악에 몸을 흔들면서
없는 곳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다가
도둑의 집 그 심장 속에서
음악을 허겁지겁 집어 먹으며
물어보는 거야
아니, 브레멘이라는 곳은 도대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허수경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문학과사회』, 가을호 전문 )
때때로 동화는 체제를 지배하는 자들이 직접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꺼림칙한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아이들에게 전달한다. ‘콩쥐팥쥐’나 ‘신데렐라’는 가부장제의 모순이나 사람들이 혈연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자들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라는 불편한 진실을 태연하게 기술한다. ‘브레멘의 음악대’또한 마찬가지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힘이 다할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해 주인을 위해 노력하지만, 용도가 폐기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철저한 방기나 죽음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노동계급을 대하는 자본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동화가 가지는 이러한 발칙함과 불온함에도 불구하고 체제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 동화가 일정 정도는 사실을 보여주되 사실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사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화에서 비정한 현실에 시련을 받는 자는 늘 승리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현실에서 핍박을 받는 자들이 승리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동화가 그 후의 세상을 사실로 기술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핍박받는 자가 승리하는 세상 따위는 이제까지 존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우수한 동화작가라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옥의 섬세한 묘사는 가능하지만 천국의 묘사가 불가능한 이유와도 같다. 이로써 동화는 사실에서 환상으로 전화한다. 하지만 이 환상은 비정한 현실이라는 부분적인 진실과 결합하여 아이들에게는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는 미래로 여겨지게 된다. 하여, 아이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가해질 무수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잡히지 않는 불가능한 환상을 좇아 체제 안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는 전래동화라는 규범화된 해석을 통해 사회화 과정을 겪은 어린이들이 성장한 미래의 모습이다. 체제 내에서 자신의 용도를 다해 중심에서 밀려난 그들은 언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젖어 있다. 동화가 가르쳐준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그들이 구원의 장소인 “브레멘”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늙은 나귀”의 뒤에 숨은 체제의 지배자들은 언젠가 그들에게 분명히 “브레멘”이라는 이상향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혹감에 빠지는 것은 지금부터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아무리 애타게 묻고 들어도 결코 “브레멘”을 찾을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브레멘”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허구의 영역에 속한 공간인 것이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에게 주어진 냉엄한 현실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전래동화 속 주인공들도 그 이름과 달리 끝내 “브레멘”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동화와 달리 어른들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은 채 영원히 지속된다. 현실의 결말은 희극이든 비극이든 어쨌든 체제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브레멘”이 “이 세계에 없는 곳”이라는 부조리를 알면서도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다시 “브레멘”으로 향한다. “아니, 브레멘이라는 곳은 도대체/있는 거요, 없는 거요“라는 자신과 타인을 모두 속이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면서.
출렁거리는 뱃살이 힘의 창고가 아니라면
힘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링 위에서 덩치 큰 사내 둘이 서로를 치고받으며
조금씩, 기진한다. 상대에게 기대기도 하면서
주저앉으려는 바닥을 일으켜 세우려고
링 아래서 악악거리는 저 땅딸보가 감춰진 실세일까?
힘은 통뼈 속에 숨겨져 있다. 아닐까?
나는 대학생이고 어머니가 건오징어 도매할 때였지
남대문 중개시장에서 만난 깡마른 노인
몇 백 킬로 마른 오징어 짝을 사뿐히 어깨에 얹었는데
기운을 조섭해 뼈를 세우는 게 요령이라고
그 요령 숨겨 놓고 혼자 써도
그는 넉넉한 품세는 아니었다
누구 앞에서나 으르렁거리는 덩치 큰 하마를
회칼로 저몄다는 깡마른 정장,
세단이 멈춰 서자 작달막한 바바리 앞에
허리가 꺾이도록 굴신한다, 도열한 검은 정장 사이로
내딛는 저 검은 구두가 힘의 본부일까?
과시가 아니라면 힘은 나타날 필요가 없다, 덤불 뒤에
숨어 있다 갑자기 출현하는 사냥꾼을
늪가의 하마들이 알아차렸다 해도 진흙탕 뭉개며 뒹구는 산만한 덩치들이
제 멸종의 시간표를 알까? 장갑 말고 감춰진
손이 만지작거리는 스톱워치를!
-김명인, 「하마」(『세계의 문학』가을호)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래한 유서 깊은 의문이다. 힘은 중심과 주변을 가름으로써 공동체를 구성하는 성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직 인류의 이성이 미숙하던 시절, 힘은 신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있었고, 신은 그 비가시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지상의 대리인인 제사장에게 그 권한을 수권했다. 이후 힘은 총과 칼이라는 직접적인 물리력을 가진 봉건 군주들을 거친 후, 혁명을 거쳐 다시 시민들의 총의라는 관념적이고 의제적인 대상으로 전달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러니하게도 힘은 이전의 신과 같이 다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은폐되었다.
「하마」는 서로 힘을 참칭하는 자들 사이에서 진정한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탐색한다. 최초의 탐색은 당연하게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의 크기이다. “출렁거리는 뱃살”은 크기에 대한 관습적인 표상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타인의 구경거리가 되어 “링 안에서 싸우는” 그들이 진정한 힘이 근원이 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들의 힘은 자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기를 주도하는 “땅딸보”라는 타의에 의해 수권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관찰하는 “땅딸보”가 힘의 근원일리도 없다. 경기를 주선한 땅딸보 또한 자신의 쾌를 위해 경기를 주관한 것이 아니라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누군가의 쾌를 위해 위임된 권한을 행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크기와는 달리 보이지는 않지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통뼈”라는 물리력 또한 이와 같다. “몇 백 킬로 마른 오징어 짝을 사뿐히 얹”는 힘이라고 해봐야, 개인이 가진 물리력이란 결국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한 품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덩치 큰 하마를/회칼로 저몄다는 깡마른 정장”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아무리 난폭한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힘을 가진 “검은 정장”들이 모여 있다면 그가 그들을 지휘하는 “검은 구두”에 굴복하는 것은 산술적으로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검은 구두” 역시 진정한 힘의 근원은 아니다. 원형 감옥의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관찰 받는 대상은 관찰하는 자가 가지는 시선의 권력을 영원히 이길 수 없는 것이다. 힘의 중심은 모든 것을 관찰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다. “하마”를 잡는 “사냥꾼” 은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을 보지만 결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신이 전지전능한 이유도 이와 같다. 그리고 오늘날 힘의 중심 또한 과거의 신과 같이 모두의 시선에서 은폐되어 있다. 시민의 총의라는 추상적인 관념에 숨어 모든 것을 주재하는 힘의 중심. 덩치들로 하여금 격투를 하게 만들고, 통뼈와 대학생을 노동에 종사하게 만들며, 힘들을 모아 더 큰 힘을 만들게 하는 힘. 그것의 다른 이름은 아마도 자본일 것이다.
이 옷 좀 빨아주세요, 아무리 빨아도
냄새가 가시지 않습니다 꿈을 꾸며 중얼거리다 깨어난다
방바닥에 널린 술잔, 약봉지, 밥그릇, 머리카락
집으로 돌아와 또 술을 마시며 내가 밤새 써놓은 공책에는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는 선하고
소수자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외치는 자들……
술이 덜 깬 채로 라면을 사러 걸어간다
죽은 자가 눈을 뜨듯
구름의 찢어진 눈꺼풀 사이로 쏟아지는 빛
미천하게 살아, 기어다니므로
만질수 없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취해서도 죽음과 생명을 분쇄하여 시를 쓰려는
나의 노력은 가상하다 불탄 산에서 바위가 검게 그을리고,
초라한 자기 형색을 드러내듯
방바닥에 주저앉아 라면 국물을 마신다
거지가 되어 시 쓰는 자 그야말로 얼마나 용감하며 정직한 자인가
약자를 응원하며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므로
남의 살을 뜯어 먹으며 정신없이 허기를 채우면서도
저는 남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어
그동안 식구들의 눈총을 참으며 견뎌왔으나
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숙취도 견디지 못하므로
정신과는 아무 상관없이 참을성이 없으므로
거지가 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술자리에서 만났던 선배는 지옥의 심판대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너는 더럽게 타협하고 항상 세상을 살아가지
술을 마시며 그가 이야기한 마이너에 대한 옹호는
중앙을 꿈꾸는 자들이 특히 자주 말하는 방식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으나
비겁하게도 애써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자
그게 도망치는 걸 좋아하는 나의 한계이지만
다만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므로
자기 안에 생명을 가득 채우려 하므로
그는 죽음을 몰아내므로 자신을 완성할 수 없나니
나는 쭈그러져 집에서 술 마시며 화풀이 낙서나 하는 것이다
밤새 꾸었던 꿈에서 심판관이 물었던 것 같다
이렇게 더렵혀진 옷은 누구의 것이오
꿈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가
평생 망상만 거듭해온 인간의 것입니다
-김성규 「이 옷은 누구의 것이오」(『창작과 비평』, 가을호 전문)
권력은 중심으로 집중하려는 속성이 있다. 권력이 분배되기 시작하는 순간 권력은 권력이 아닌 것이다. 힘의 차이가 있을 때만이 누군가를 복종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권력은 분배를 주장하며 자신의 의지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힘의 중심에서 배제하여 주변으로 흩어 버린다. 그렇게 권력은 필연적으로 반대자들을 생성한다. 문제는 이렇게 권력이 생래적으로 가지는 비윤리성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그 반대자들의 관계가 반드시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권력이 악이라고 해서 반대자의 윤리성이 선이라고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경우 권력에 대한 투쟁은 공동선을 명분으로 한 서로 다른 권력의지의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옷은 누구의 것이오」는 권력의 대척점에서 투쟁하다 스스로가 또 하나의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전락한 이들에 대한 혐오감과 그에 대항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시인의 자괴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에서 권력의 반대자들이 가지는 유일한 정당화 근거는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는 선하고/소수자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라는 진영논리에 입각해 있다. 권력에 대한 저항이 최고선이라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그들은 항상 “마이너에 대한 옹호”를 말하며, “타협”을 더러운 것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화자는 그것이야 말로 “중앙을 꿈꾸는 자들이 특히 자주 말하는 방식이라는 걸” 안다. 스스로에 대한 무오성을 강조하며 자기반성을 가지지 않는 자는 주변에 위치한다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핵으로 하는 또 하나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약자를 응원하며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므로/남의 살을 뜯어 먹으며 정신 없이 허기를 채우면서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하는 권력의 속성을 거울처럼 보여 준다.
화자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한다. 그것이 “도망치는 걸 좋아하는 나의 한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에 대해 “너는 더럽게 타협하고 항상 세상을 살아가지”라는 그들의 주장은 어쩌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쨌든 화자는 권력 또는 그 대척점에 있는 반대자들로 구성된 대항권력 어디에도 저항하지 않으며 “집에서 술 마시며 화풀이 낙서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인의 영혼은 “이렇게 더럽혀진 옷은 누구의 것이오”라는 질문에 결국“평생 망상만 거듭해온 인간의 것입니다”라는 자괴감으로 드러난다.
명예교수 휴게실에서 문학의 죽음에 대해
대책 없는 토론을 벌이다 채 끝내지 못하고 나와
(이거 한평생 헛발질한 거 아냐)
차 시동 켜고 오디오를 켠다.
옛 테너 스테파노가 부르는 나폴리 민요.
순환도로에 오르자 시야 가득 벚꽃 휘날린다.
창을 열고 천천히 차를 몰다 인도에 붙이고
노래 몇 곡을 같이 흥얼댄다.
삼십 년 전
귤꽃향기 뇌 속까지 밀고 들어와 벌떼처럼 응응댈 때 만난
나폴리 해안에 와 부딪치던 새파랗게 파란 물결
지금도 몸 저릿저릿하게 치고 있겠지
노래에 끌린 듯 차 안으로 날아든 꽃잎 두엇
얼굴을 스친다. 나도 모르게 저릿저릿.
스르르 눈 감기고 정신이 깜빡,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산타 루치아 성당이 올려다 뵈는 곳? 허나 눈 앞에는
새파란 물결만 출렁인다.
하긴 나폴리가 나폴리에만 있겠는가?
태안군 안흥,
해수욕장 생기기 전 보길도 예송리에서도
새파란 봄 물결이 온몸 저릿저릿하게 출렁댔지.
꽃잎 몇이 이번엔 머리와 손등에 앉는다.
그래, 펄럭이던 문학의 불꽃 그만 폴싹 꺼진다면?
문학이 어디 문학에만 있겠는가!
-황동규, 「나폴리 민요 1」『문학동네』(가을호)
권력은 정치적인 것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은폐된 형태로 도처에 산재한다. 제도로서의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문학장은 치열한 담론투쟁에서 승리한 것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문학 또한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아 중심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들 또한 안심할 수만은 없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권력을 가지지 못한 반대자들을 생성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다. 어떤 권력도 불멸할 수는 없다. 오늘날 문학이 수시로 도전 받으며 그 죽음이 이야기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나폴리 민요 1」는 최근 곳곳에서 발생하는 “문학의 죽음” 논의에 대한 한 원로시인의 소회를 밝힌다. 자신이 평생을 종사하며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문학에 대한 사망선고는 “(이거 한평생 헛발질한 거 아냐)”라며 내심 그를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가만히 앉아서 수긍할 수 없는 현실에 차를 타고 나온 그는 “스테파노가 부르는 나폴리 민요”를 들으며 조용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삼십 년 전”, 그의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했던 “나폴리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이 전해주는 압도적인 체험은 비슷한 시기에 젊은 그가 최초로 문학에 대해 가졌음 직한 경외감의 은유로 읽힌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의 가슴 한 구석은 전율한다. 가능하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시간에 머무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비가역적이므로 그런 상상은 불가능하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생각하며 무언가를 떠올린다. “나폴리” 이후 그가 만난 풍경들은 모두 다른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폴리”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풍경은 또 새로운 자극을 준다. 생각해보면 그가 살아오며 만났던 풍경과 문학은 늘 서로를 갱신하면서 그의 마음을 생동감으로 물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 또한 갱신한다. 사망 선고를 받은 “문학”이라는 것 또한 그가 삶을 살아가다 만난 풍경 중의 하나인 “나폴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문학의 부음을 듣고 슬퍼할 수 있지만, 그 죽음을 딛고 또 다른 새로운 “문학”들이 “불꽃”처럼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이 어디 문학에만 있겠는가?” 문학 또한 숨겨진 형태로 세상 어디에나 산재한 것이다. 문학은 죽어도 문학은 결코 죽지 않는다.
포플러 나무로 변한 파에톤의 누이를 만났지
태양은 가난한 뼈를 위해 대신 울고, 유리병에 보관한 북극곰의 눈물처럼 숙성 잘된 질문은 무거워
태양의 눈이 증발하는 높이쯤에서 머리를 떼어 당신에게 맡기고
극장 밖을 서성거렸어, 당신이
제 값 받지 못할 속 빈 뼈를 채우는 동안
나는 투명한 얼굴
유리잔에 콜로라도 토파즈 원석을 따라 마셔봐, 뜨겁게 산란하는 것들만이 반짝인다는 걸 알아?
포플러는 입술로 가공해야 하지
사천진의 아침처럼, 당신의 귀에 매달려 빛을 낭독하던 파에톤의 누이처럼
값없이 대신 울어주던 태양이 고맙거든
묻지 말고 종종걸음으로 웃다, 웃다가, 가만히 바닥을 바라봐
지상에 내려온 조각끼리 손을 맞잡는 순간
빛 뿌림이 시작될 테니
-최은묵 「태양의 눈물」(『애지』, 가을호 전문)
권력이 가지는 또 하나의 속성은 잔혹함이다. 권력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 잔혹함을 과시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반대자들을 일정 기간 동안 유보시킨다. 도전자들의 신체에 가해지는 잔혹한 형벌은 도전자에 대한 응보와 함께 위하를 통해 적극적인 예방의 효과를 동시에 가진다. 지고한 신들의 세상을 뒤집으려 했던 ‘제천대성’에게 자비의 화신 ‘석가여래’가 내린 오행산의 압박과 배고프면 쇳물을 먹이라는 하명은 이러한 명제에 신뢰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다. 파에톤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신들에 제왕 제우스가 보는 서사에서 파에톤은 그 방자함과 오만함으로 인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에 불과하다. 파에톤에게 내려진 벼락은 권력을 제어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를 치죄하는 적절한 형벌로서 충분한 당위성을 가진다. 하지만 파에톤의 누이들이 보는 서사는 다를 수 있다. 그들에게 파에톤은 주변에 거하다가 중심을 꿈꾼 죄로 희생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파에톤이 죽어 마땅한 존재로써 각각의 죄목으로 기소한 신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파에톤의 죽음을 슬퍼하다 결국 포플러 나무가 된다.
「태양의 눈물」은 세상의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는 수많은 파에톤들을 산발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위무하는 이야기다. 태생적으로 중심에서 배제되어 “가난한 뼈”를 가진 채 태어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오늘도 “제 값을 받지 못할 속 빈 뼈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소비하며 고된 일상을 보낸다. 초라한 자신의 존재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운 그들은 “태양의 눈”이 증발하는 높이를 찾아 자신의 “머리를 떼어”냄으로써 존재를 숨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그들을 찾아와 “파에톤의 누이처럼/값없이 대신 울어”준다. 아무런 대가를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심이 아닌 소외된 곳의 서사를 노래하며 그들을 위로한다는 점에서 이 시의 “태양”은 오늘날의 문학과 그 모습이 참 닮았다.
권력에서 배제되어 주변에 거하는 자들은 사회를 구성하면서도 그들의 말을 가지지 못해 언제까지나 은폐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방식과 고통은 있는 그대로 전해지지 않으며 대문자 역사를 통해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역사를 국정화 한다는 것은 이렇게 힘과 중심을 강제하는 대문자 역사를 확정적으로 고정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의 삶과 기억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증명하지 못하는 잉여가 된다. 문학의 역할이 더욱 무거워지는 계절이다.
김대현 문학평론가 2012년 『실천문학』평론 신인상 수상. 현재 『플랫폼』,『리얼리스트』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