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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의 민주화운동 9- 장공 김재준목사, 강원용, 김대중, 미주 메릴랜드 볼티모아 주립대 교수 김광훈( 침례교 김광택박사동생)
자유토론판
2020-01-28 14:52:23
우연히 정기용씨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기사를 보다가
미국 수도 워싱톤 디씨에 정착한 우리 조선 침례교 원조 동아기독교의 후손? 혹은 선조이신 김광택 메릴랜드 주립대 교수 동생 김광훈 박사가 눈에 들어온다.
1975년경 미국에서 김대중선생의 옥중감금으로 인해 민주노선이 침체될때
2 파로 갈라지게 되엇는데,
하나는 '선통일 후민주' 이고
다른 하나는 '선민주 후 통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 한국의 침례교 첫 선교사이신 펜위익 공부를 모셨던
안대벽목사의 부인 이순도 여사의 여동생의 2 아들들인 김광택집사(박사, 음악목사)의 동생 김광훈 메릴랜드 주립대 교수 가 '선통일 후민주'를 주장하는 쪽이어서 단체를 결성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35년경 펜위익 공부가 돌아갈때 예닐곱쯤 된 김광택형제에게 약간의 유산까지 남기신 분이다.
형 김광택박사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아주 늦게 유명한 성악가 케서린 김과 결혼해서 81년경 아주 어린 딸이 있었다.
이때가 1975년 경이고 우리가 81년도 쯤 볼티모아로 이주 왔는데,
그때 기억나는 것은 자형 CJ 정진구이사가 그사람 빨갱이라고 부모님께 접촉하지 말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김광훈박사가 북조선에서 유학생을 데려다가 공부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광택집사 부인 형수 가 이야기 해 줬는지 아니면 당시는 큰 비밀이 아니었든지 혹은 한국신문등에서 기사났을것같다.... 간에.
역사는 꺼꾸로 흐르고 있나???..
그런데 안탑깝게 그리고 몇년 후에 김광훈박사는 이른나이에 돌아가셨다.
백인 부인사이에 자녀가 없었고 수염을 엄청길렀었다.
국립부산수산대학 해양환경학과 교수 원종훈교수의 죽음이나, 수제자 이배정조교의 죽음...
그리고 이제보면 왜또 김광훈박사도 일찍 돌아 갔는지...
그 외에 일찍 돌아간분들이 넘 많은것 같다....
▶ 정기용의 민주화운동 비망록9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가 북한에서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과 만나고 있다. 장공 김재준 목사(왼쪽)와 필자, 이근팔 씨(오른쪽). 한민신보에 실린 민병권 장관과 김형욱 관련 기사(왼쪽부터).
-김재준 박사와 김대중
내가 만난 인물 중 큰 감화를 준 이는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년~1987년) 박사다. 젊은 시절 간도 용정에서 교편을 잡고 강원룡 목사와 안병무를 길렀던 그는 한국 예수교 장로회를 창설해 기독교계의 새 지평을 연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다. 한국신학대학 학장도 지내셨다.
다소 눌변이지만 고매한 인격과 해박한 지식으로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한민통을 잘 이끌어온 분으로 평가한다.
장공을 생각하니 그의 사위 이상철 목사와 송정률, 전규홍 박사,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옹, 임창영 전 유엔 대사, 김상돈 전 서울시장 등도 잊을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매우 깊고 특이하다. 그는 어느 정치인에게서도 엿볼 수 없는 정치 감각과 순발력을 지닌 천부적 정치인으로 회고된다. 물론 험난한 정치역정에 흠도 있었지만 불가피한 측면으로 해석된다.
열한 살 때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어봤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 그는 필자의 부탁이라면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고 속이야기를 소상히 하소연하곤 했다.
그의 첫 부인 차용애의 동생인 막내처남 차인식은 나와 중동고 동기동창이다. 이희호 여사의 막내 동생인 이성호 씨와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함께 지낸 사이다.
서울에서도 DJ는 장남 홍일을 자주 내게 보내 만나게 했고, 대통령이 되자마자 당시 대변인이던 박지원 씨를 통해 네 번이나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민주진영의 분화
장공이 의장을 맡았지만 한민통은 김대중이란 구심점의 기나긴 공백으로 활동이 점차 지지부진해졌다. 이 무렵 한민통으로 결합됐던 민주화 세력의 노선은 분화된다. ‘선(先) 통일 후(後) 민주론’을 주장한 분들은 독자적인 조직 구축에 나섰다.
그 중 하나가 75년 10월 결성된 재미민주한국촉진회(일명 민촉)이다. 김광서 박사(의사)가 의장, 김광훈 교수, 김정현 여사(안용구 피바디대 교수 부인)가 부의장, 신대식 목사 등이 주축이었다.
또 하나의 단체는 77년의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일명 민건)이다. 워싱턴의 로광욱 박사와 뉴욕의 임창영 전 유엔대사, LA의 선우학원 박사 등이 중심인물로 장성남 씨가 의장을 맡았다. 두 단체는 북한과의 교류 및 연대를 중시하고 남한의 민주화보다 조국통일이 우선 필요하다는 노선이었다.
-통일운동가 로광욱 박사
선 통일론의 핵심인물은 고 로광욱(盧光郁) 박사다. 1922년 평남 남포 생인 그는 해외통일 운동의 선구자라 해도 손색이 없는 분이다. 그는 민족의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이론적 기저를 제공하며 기치를 세웠다. 워싱턴한인회 노진환 회장이 삼선개헌 지지성명을 내고 탄핵되자 후임 한인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의 부친 로정일 씨는 목사로 연세대 교목을 지냈으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치대 전신인 경성치과전문학교를 나와 뉴욕대 치과대학원을 졸업한 로 박사는 메릴랜드에서 개업했다. 부인은 피아니스트인 이효숙 씨로 그 언니가 이화여대 교수이며 여성학계의 선구자인 이효재다. 선우학원 박사와 함께 로 박사는 한반도 중립화론을 주창한 김용중의 수양아들이기도 하다.
-문명자와 로 박사 부인의 싸움
로 박사와 얽힌 잊지 못할 장면이 떠오른다. 하루는 노 박사에게서 자기 집에서 저녁이나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메릴랜드 댁으로 가보니 작곡가 윤이상 씨 내외, 이응노 화백, 유럽에서 활동하던 이영빈 목사, 그리고 미국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피아니스트 한동일씨가 와 있었다. 세계적인 음악가와 화가, 그리고 피아노의 거장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다 한동일의 피아노 반주에 로 박사가 노래를 불렀다. 로 박사는 치과의 이전에 성악가이자 평론가, 작곡가로 독창회도 열고 빼어난 가곡도 만든 음악가였다.
그때 언론인 문명자씨가 나타났다. 잠시 후 문간방 쪽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고성이 오가며 시끄러워졌다. 문 씨와 로 박사의 부인 간 격렬한 언쟁과 몸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그 뒤 로 박사는 나에게 그날 기상천외한 해프닝이 일어난 사연을 입단속을 당부하며 들려주었다.
“내가 북한에 가면 대남총책인 김중린이나 고위 관리들이 마중 나오곤 했어. 그런데 지난번 방문엔 순안비행장에 아무도 영접을 나오지 않더구만.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야. 3시간이나 지나서야 말단 직원이 나와 우리 일행을 데려갔어. 불 같이 화가 났지. 나중에 알고 보니 문명자가 북한 측에다 로광욱, 선우학원이 미국 CIA 소속이라고 거짓을 일렀다는 거야.”
그 후 문명자씨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보도된 것을 보고서야 로 박사 댁에서의 해프닝이 이해가 됐다.
-김형욱 “날 못 건드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 관해서도 몇 줄 남겨놓아야 한다. 김형욱이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돼서 갑자기 나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뉴저지에 체류하던 그를 내셔널 공항(현 로널드 레이건 내셔널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만났다. 중정 서울분실장을 지낸 백태하와 동서라는 김 모와 함께였다.
“내가 미 하원 청문회에 가서 박정희 독재를 고발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좀 도와주시오.”
그의 요청에 나는 “우선 진정성 있게 행동하고 교포사회의 민심부터 수습하라. 당신은 여야 어느 쪽으로 붙어도 원성을 사게 돼 있다”고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었다.
“내 신변은 걱정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모든 만행은 내가 녹음하여 뉴욕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 수록해 놓았다. 나를 건드리면 즉각 모든 비밀이 자동적으로 폭로되게끔 돼 있으니까 절대 나를 못 건드린다.” 그는 매우 거만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루는 김형욱이 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박정희가 민병권(무임소장관)을 내게 보낸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런 내용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 한 자리에 모인 워싱턴한인회장들. 앞줄 왼쪽부터 최제창, 서준택, 로광욱, 김응창, 뒷줄 왼쪽부터 고응표, 박규훈, 강철은, 신필영, 오석봉, 정세권.
“두말 할 나위가 있겠나. 유신헌법 철폐하고 구속당한 학생들과 정치인들을 모두 석방하라. 그리고 민정(民政)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
나는 진지하게 충고를 해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정희는 민병권에게 정성껏 만든 고급 한과를 들려 보내며 김형욱을 회유하려 했다. “김 부장, 모든 것을 잊고 고국에 돌아와 함께 일해 봅시다.”
김형욱은 민병권을 통해 자신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처 신영옥과 장남의 여권을 연장해줄 것, 서울 돈암동의 자기 소유의 건물을 건드리지 말 것 등이었다. 자신의 치졸함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 후 나는 김형욱과 심한 직설적 언쟁을 주고받고서 관계를 끊어버렸다.
-김형욱 실종의 수수께끼
김형욱은 망명 초기만 해도 사진기자가 빨간 양말을 신은 것을 트집 잡을 정도로 철저한 반공이었다. 그런데 그가 실종될 1979년 무렵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군 출신 몇 명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었는데 김형욱과 이들의 관계가 깊어졌다는 풍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실종되기 얼마 전 느닷없이 한민신보에 전면광고를 의뢰해왔다. 그 내용을 보면 그의 사상이 180도 변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김형욱의 파리에서의 실종을 놓고 한국 정보원들에 납치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가 직접 총살을 했다느니, 불란서의 어느 닭장 분쇄기에서 그라인더로 갈려 없애졌다느니, 그럴듯한 추리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의 단세포적인 성품과 지적 수준으로 볼 때 어느 기관에서든지 쉽게 처단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북한과 접촉했던 인사들이 그를 집요하게 세뇌시켰으며 쉽게 전향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 눈치 챈 한국이나 미국 측이 최장시간 정보부장을 지낸 그가 지녔을 수많은 비밀들이 공개되는 것을 우려해 처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의 밀사를 가장하여 북한으로 돌아서려는 그를 유인한 다음 없애버렸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신상옥 영화감독이 미국에 체류할 때다. 나를 만난 그는 대뜸 영화 제작을 제안했다. 제목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동선 뇌물사건’이었다. 히트작이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그의 불만은 대단했다.
문제는 영화제작 자금 조달인데 그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정치인 김상현을 통해 김형욱의 투자를 유인하는 것인데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르겠다. 둘째는 자신이 만든 영화 36편의 필름을 홍콩에 갖다 두었는데 이걸 미국에서 상영하면 제작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신 감독은 워싱턴에 오면 미국 공보원에 근무한 주동걸 씨 집에 머물렀다. 주 씨와는 함경도 북청 동향으로 어릴 적부터 친구라 했다. 하루는 주 씨 집에서 신 감독과 밤늦게 술을 마시고 취해 잠이 들었다. 도중에 깨어보니 그는 잠도 안 자고 깊이 담배를 빨며 고민하는 눈치였다.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곧 알게 될 거야.”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전 부인인 배우 최은희 납북사건이 발생했다. 그 보도를 보며 난 신 감독이 최은희의 납북을 예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뉴저지에서 신 감독의 전화가 왔다. 홍콩에 가서 최은희의 납북 수사에 협조한 후 불란서 칸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감독님은 지금 영주권 신청 중입니다. 나가면 재입국이 쉽지 않을 텐데… 그리고 가족(배우 오수미와 1녀)이 하와이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가 25년이나 함께 살던 여자인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나.”
칸 영화제에 참석했던 신 감독에게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미국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각 영사관마다 비자를 안 내줘 어렵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민주혁명당 창립
반정부 분위기는 고조돼 갔지만 민주진영 내부는 평화스럽지만은 않았다. 질투와 사꾸라 모략이 성행하고 진짜 반독재 운동을 하는지를 알 수 없는 카멜레온 같은 인사들이 출몰했고, 경력과 학력, 고향 등을 버릇처럼 속이며 살아가는 자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도 뜻있는 한인 지도자들은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한미동맹의 손상을 우려했다. 1976년 워싱턴한인회 고응표 회장은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으로 안홍균 씨를 선임하고 성대한 축하행사를 갖기로 했다. 안 위원장은 위스콘신 대에서 유학한 인물로 워싱턴지역 초대 한인유학생 회장을 지냈으며 훗날 코리아 게이트 때 미 의회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반독재 운동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산만해졌다. 1977년경 나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창재(미네소타), 박찬웅, 전충림, 정철기, 김원동(이상 토론토), 정일성, 송숭락, 송석중(디트로이트, 미시건), 주우정(버지니아),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김유진(뉴욕), 안봉근(볼티모어), 김응태, 최창훈(워싱턴) 등과 함께 워싱턴에서 ‘민주혁명당’ 출범식을 열었다. 민주진영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단체였다.
알링턴의 한민신보 사무실에 본부를 두고 모국의 민주회복과 독재 종식을 목표로 활동했으며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내가 서울에 갔을 때 5개 수사관들이 질문해온 것도 대부분 민주혁명당의 내막이었으며 이창재 초대 대표가 방북했을 때도 북측에서 민주혁명당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어왔다고 술회했다.
197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그것은 중세봉건의 질곡에서 인간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로 향하는 민주혁명의 도정이었다. 나는 그 역사의 층위 위에서 내 혼신을 다하고자 했다. 그것은 조국을 사랑하는 자, 살아있는 자의 의무였다. <끝>
나의 비망록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예정했던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단하게 돼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박정희 서거시 대사관 조문, 북한의 회유 공작, 광주항쟁 당시 백악관 앞 89일 시위 등 훗날 여건이 허락되면 못다 한 이야기들을 전해줄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이 될 이번 호에는 굵직했던 사건들을 단문으로나마 남길 수밖에 없음을 독자 제위들께서 혜량해 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필자 571-326-6609>
1930년대 원산 침례교 본부 성경학습원.
침례교 첫선교사 펜위윅 공부의 부인이 인도하던 성경학습원.
왼쪽 3번째가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여사 동생인 김광택, 광훈 박사 어머니.
4번째 울 오마니,
7번째가 이화여전 이순도여사,
가운데 작은꼬마들이 김광택, 김광훈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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