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청바지
박갑순
데님 재질 옷을 입고 종종거리는 푸들의 뒤태가 앙증맞다. 견주는 무릎 위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뒤따르고 있다.
영달말 공원엔 애완견과 산책하는 인파가 많다. 그들의 한 손엔 강아지 목줄이, 다른 손엔 변 봉투가 들려 있다. 이미 한 가정의 막내로 족보에 오른 강아지들은 부모의 개성이 묻어나는 옷을 입고 있다. 간혹 신발을 신고 어색하여 폴짝거리는 강아지를 보며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
뜨개옷을 입은 가로수 사이 데님 옷을 입은 나무를 보았을 때도 마음이 흔들렸었다. 푸른 물이 떨어질 듯 맑은 하늘 아래 줄지어 선 나무들이 패션쇼를 하듯 다양한 옷을 입은 행사장에서 한 나무가 고무줄이 헐거운지 청바지를 꼭 움키고 있었다. 그 나무 곁에서 한참 넋을 놓은 적이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겨 입는 청바지니 동물이나 나무라고 못 입을 것도 없겠지. 청바지를 입은 성경책을 본 적도 있다.
청바지는 고된 작업을 하는 광부들의 질기고 튼튼한 작업복으로 출발하였으며, 지금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패션 아이템이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멋스러운 옷이다. 단순하지만 세련된 느낌을 주고 상황에 맞게 코디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쉽다. 어떤 상의를 받쳐 입어도 잘 어울린다. 오래 입어 무릎과 엉덩이가 나와도 최대한 형태를 유지하며 멋을 살려준다. 단합된 마음을 표출하기 위한 단체복으로 입기에도 적당하다.
내게 청바지는 대물림하는 옷이었다. 동네 부잣집 언니의 옷은 작아지면 으레 내게로 왔다. 아무리 오래 입어도 해지지 않으니 그 옷은 다시 동생이 입었다. 청바지는 남녀 구분 없이 입을 수 있으니 새 옷을 사줄 수 없는 엄마에게는 전천후였다. 티셔츠는 오래 입으면 목 부분이 늘어지거나 색이 퇴색하였지만, 청바지는 입을수록 자연스러운 색상이 되고 형태도 몸에 착 맞게 자리를 잡았다. 낡은 청바지 하나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살림을 꾸리는 엄마 앞에서 청바지처럼 투정도 수수해졌다.
다른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면서 성장기를 보낸 탓일까? 성인이 되어서는 청바지를 즐겨 입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전 입었던 청바지는 여전히 장롱을 지키고 있다. 내게 청바지는 엄마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삶은 평생 여자로서의 생활은 없었다. 어린 시절 화장품이 놓인 화장대는 티브이 연속극에서나 보았다. 스킨 로션 한 병 없는 엄마의 애장품은 반짇고리뿐이었다. 무엇을 먼저 발라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다양한 화장품이 화장대에 그득한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엄마는 일바지 차림에 장화를 신고 논밭으로 내달리다가도 외출할 일이 있으면, 깨끗이 씻고 정갈하게 빨아놓은 옷을 입으면 그만이었다. 화장기 하나 없어도 꾸민 듯 안 꾸민 듯 멋스러운 청바지처럼….
요즘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청바지의 새활용을 이끌고 있다. 유행이 지났거나 크기가 맞지 않는 청바지를 활용하여 파우치, 손가방, 키링, 모자, 앞치마 등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나눈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새활용을 생활화했던 분이다. 밤새 침침한 불빛 아래서 대를 물려 막내까지 입고 난 낡은 청바지 실밥을 뜯었다. 주머니 안감까지도 버리지 않고 사용했다. 교실 바닥에 초를 칠하고 닦을 때 사용하는 걸레나 실내화 대신 덧신을 만들어주었다. 데님의 견고한 질감은 마른걸레나 덧신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도 남은 천 조각은 잘 보관했다가 아빠 작업복을 깁는 데 사용했다. 버릴 게 없는 청바지처럼 엄마의 삶에서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청바지를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다. 젊어서는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당신 옷 한 벌 장만할 여력이 없었고, 나이 들어서는 일바지에 길들여진 체형에 거북했으리라.
어느 날 동네 어르신들끼리 여행을 간다기에 청바지를 사다 드린 적이 있다. 평소 입지 않던 옷이라 좀 망설여졌지만, 더 나이 드신 분들도 즐겨 입는 모습을 보고 결정했다. 신축성이 있고, 통도 넓은 디자인으로 골랐다. 흔쾌히 입고 거울 앞에서 수줍은 소녀처럼 앞뒤를 살피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엄마는 그 옷을 한 번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유품을 정리하면서야 알았다. 남겨진 흔적들 속에 청바지가 정갈하게 간직되어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래된 옷들은 버려야지 하면서 다시 구석에 잘 접어 놓는 유일한 옷이 청바지다. 어렵고 힘든 삶이었지만, 견고하고 단단한 청바지 같은 삶을 살다 가신 엄마를 버릴 수 없다.
엄마 가신 지 1년 반. 엄마가 생각날 때면 공원으로 나가는 버릇이 생겼다.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 속에서 엄마를 찾다 보면 어느새 석양이 어둠을 데려오고 나는 청바지 차림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상상을 한다.
1998년 『자유문학』 시, 2005년 『수필과비평』 수필 등단
월간 『소년문학』 편집장 지냄
제10회 월간문학상 수상 외
수필집 『꽃망울 떨어질라』 외
시집 『우리는 눈물을 연습한 적 없다』 외
현 교정교열 전문 〔글다듬이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