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하상, 조선 땅에 선교사 데려오고 대목구 설정에 공헌
박득순 작 ‘성 정하상 바오로’. 수원가톨릭대 소장.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을 연재하면서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103위 성인 가운데 평신도 대표인 성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이다. 아버지 정약종을 잃고 청년 시절 온 생애를 다해 선교사를 영입하고자 북경 파발꾼으로 가서 선교사들을 모셔 들이고, 마침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자 사제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그의 노력은 우리 교회사에서 빠질 수 없다. 1839년 박해를 마무리하면서 정하상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사제의 길을 미리 걸었던 신학생 정하상
정하상이 103위 성인의 평신도 대표인 것은 많은 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사제직을 준비하며 모든 평신도의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8년 쓴 보고서에 보면, 자신이 4명의 신학생을 가르치고 2명에게는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3년 뒤에는 조선 땅에서 서품식을 거행하고 싶다는 희망을 전하고 있다.
“첫째로는 42세 된 우리의 북경 파발꾼인데 여전히 독신으로 있으며 우리 세 선교사를 조선에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801년 박해 때에 자신을 천국으로 보낼 칼날을 보겠다고 해서 (하늘을 보고) 눈을 뜬 채 참수를 당했던 영광스러운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입니다. ⋯저는 조선말을 공부해 가면서 이들 네 명에게 매일 2시간씩 강의를 하는데, 이것은 제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올여름에 이들은 (라틴어) 글을 읽는 일에 좀 익숙해졌습니다. ⋯앞의 두 명에게 신학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3년만 있으면 서품식을 거행할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 자 서한)
정하상은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할 때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함께 옥에 갇혀 있다가 고향 마재로 돌아가 어머니 곁에서 성장하였다. 마재의 정씨 일가는 천주교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조카인 정하상을 외면하였다고 한다. 정하상은 혼인하라는 집안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신을 지켰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구전으로 전해 듣는 교리 지식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 멀리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 간 조동섬(유스티노)를 찾아가 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정하상은 박해로 아버지와 형을 잃고 힘든 생애를 살아갔건만, 아무리 이치를 따져보고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천주가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심순화 작, 마재성지에 설치된 정약종 일가 모자이크. 왼쪽부터 정철상·정약종 복자와 성모 마리아, 정하상ㆍ유 체칠리아ㆍ정정혜 성인.
아버지 정약종 순교할 때 어머니와 함께 갇혀
정하상은 천주가 이 세상에 계신다는 것을 이 세상 만물과 사람의 양지(良知)와 성경에서 찾았다. 만물을 보면 천주가 계신다는 확신이 들고, 내 안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양심을 들여다보면 천주가 계심을 알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품 공부를 하면서 읽은 성경에서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들었을 것이다. 정하상의 믿음은 자신이 순교 전에 쓴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엿볼 수 있는데, 아버지와 형이 목숨 바쳐 증언한 것처럼 자신도 확신에 차 신앙을 증언하였다.
“금(金)은 산지(産地)에 관계없이 순금이냐 아니냐에 따라 보배가 되느냐 안되느냐가 가려지고, 종교는 그 지역에 관계없이 거룩하냐 거룩하지 않냐에 따라 참된 종교인지 아닌지가 가려집니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종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 이 나라 저 나라에 경계가 있겠습니까?”(「상재상서」 중)
이렇듯 굳건한 믿음을 지녔던 정하상은 조선 땅에 선교사를 인도하기 위해 조선과 북경을 오가는 파발꾼이 되었다. 그가 이처럼 힘겨운 길을 스스로 걸은 이유는 조선 땅에 다시 선교사가 들어와 성사(聖事)가 거행되고, 세상의 주인을 알아보는 참된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복음을 가르치는 사제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던 것이다.
정하상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조신철(가롤로)과 함께 조선대목구 설정의 주역으로 ‘평신도 삼총사’라고 부를 만하다. 그들의 노력과 편지가 교황청까지 전해져서 마침내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정하상 성인이 지은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 「상재상서」 한글 필사본. 가톨릭평화신문 DB
국왕에게 천주교 호교론서 「상재상서」 남겨
1839년 초에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조선과 북경을 오가던 정하상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정하상은 박해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듯 국왕에게 천주교가 올바른 종교임을 호소하는 「상재상서」라는 글을 남겼다.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호소하였다.
“목숨을 바쳐 순교함으로써 성교가 진실된 가르침을 증명하여,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으로 삼는 일이옵나이다. 죽음에 임하여 용감히 말해야 할 때에 한 번 고개를 들고 크게 외쳐 보지도 못하고, 말없이 불쌍히 죽으면, 쌓이고 쌓인 회포를 백년 뒤에까지 스스로 밝힐 길이 없사오니, 엎디어 빌건대 밝히 굽어살피사, 도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그르고 바름을 가리옵소서.”
정창섭 작 ‘성 정하상 바오로 가족’. 왼쪽부터 복자 정약종의 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부인 성녀 유 체칠리아,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평신도 대표로 불려
정하상은 1839년 7월 11일 가족·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문초가 시작되었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추국(推鞫)을 당하게 되었지만, 정하상은 조금도 동요하거나 나약한 신심을 보이지 않았고, 대질 신문을 받는 중에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고 당당히 천주교를 믿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정하상은 아버지가 하늘을 보며 칼을 받던 그 장소,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 나갈 때 수레 위에서 기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고 「기해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하상은 사제가 되지 못하고 평신도로 삶을 마감했지만, 김대건 신부보다 앞서 신품성사를 준비했던 신학생이자 설교가였고, 선교사들의 훌륭한 복사였다. 독신을 지키며 복음의 가르침을 목숨으로 증거한 정하상 바오로는 사제의 길을 미리 걸어간 사제의 모범이 되었으며, 자신이 배운 모든 가르침과 지식, 그리고 두 다리로 조선 땅에 선교사들을 데려오고 대목구가 설정되는데 공헌한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다운 가장 위대한 한국의 순교 성인 가운데 한 분이시므로 평신도 대표로 불릴 만하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