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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경 人 원문보기 글쓴이: 싱글벙글
◈ 언제: 2016.07.23 토요일 ◈ 어디로: 창녕 화왕산 ◈ 인원: 마눌과 둘이서 ◈ 날씨: 폭염, 33℃ (체감온도 38℃) ◈ 상세코스: 자하곡매표소-갈림길에서 제1등산로-암릉길-비들재갈림길-배바위- 산성동문-산성서문-화왕산정상-전망대-제3등산로-자하곡매표소 ◈ 교통편: 대중교통 화왕산 등산은 일반적으로 창녕여자중고등학교 맞은편의 자하곡매표소를 들머리로 시작된다. 화왕산을 오르는 코스는 1등산로,2등산로,3등산로등 3개의 등산로가 있는데 3등산로는 입구에서 도성암을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가장 완만하고 순한 코스이며, 2등산로는 좌우 산줄기를 끼고 1,3등산로의 가운데로 환장고개를 거쳐 오르는 길이고, 1등산로는 맨 우측 능선을 따라 기암괴석이 즐비한 암릉을 타고 넘어며 오르는 코스로서 스릴도 있지만 그만큼 체력소모도 많다. ▲ 사상서부터미널 ▲ 창녕시외버스터미널 ▲ 오늘이 마침 창녕장날이네..(3,8장) ▲ 군내버스를 타기위해 영신버스터미널로 이동 ▲ 영신버스터미널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창녕경찰서앞에서 하차(10분소요) ▲ 창녕경찰서앞에서 내려 약 15분 걸어서 자하곡매표소 입구에 도착.. ▲ 입구 주차장.. ▲ 좌측으로 고분군 유적지를 보며 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20여분 올라간다. 창녕에는 이런 거대한 고분들이 이곳 말고도 송현동 고분군도 있다. ▲ 절정의 여름을 달리는 폭염속에 요란스런 매미소리를 노래삼으며 20여분 정도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 좌측은 제3등산로이고 우리는 우측으로 간다.. 오늘계획은 오를때는 우측으로 제1등산로를 따라 암릉산행을 즐기고 하산은 제3등산로를 따라 좌측으로 나중에 내려올 계획이다. ▲ 화왕산장이 있는곳에서 좌측산길로 들면서 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 시작부터 너덜겅으로 험난한 길임을 예고한다.. ▲ 갈림길에서 우측 1등산로로.. ▲ 다시 갈림길 이정표에서 조금 더 직진후.. ▲ 우측으로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길을 따라 오른다.. ▲ 암릉이 시작되는 능선에 올랐다.. ▲ 정자쉼터가 있고 여기서 잠시 쉬면서 물도 좀 마시고.. ▲ 이름이 자하정... ▲ 정자를 뒤로 하고 다시 오른다. ▲ 건너편 줄기의 암반구간.. ▲ 계속해서 암릉들을 넘어 올라야 하는데 나름대로 안전시설이 잘되 있는 편이더. ▲ 마눌이 뒤에서 한컷 찍었네..^^ ▲ 길고 긴 암릉들을 무사히 올라오고나니 다시 약간의 시장끼가... 어제 학원마치고 들렸던 홈플러스 아시아드점에서 산 새우튀김이 너무 맛있다.. ▲ 지나온 암릉들을 돌아본다.. ▲ 비들재 갈림길.... 비들재코스는 아직 미답구간인데 숙제로 남겨두고...우리는 화왕산방향으로 ▲ 조금전 넘어온 암릉구간... ▲ 산불감시초소와 소방무선중계탑이 있는곳.. ▲ 배바위 바로 앞에있는 이정표 ▲ 화왕산 배바위 2009년 2월 9일, 대보름 맞이 화왕산 억새태우기 축제를 하던 중 갑자기 불어온 돌풍과 오랜 가뭄으로 부상당한 사건이다. 사고 당시 행사장에는 2만 5천명에서 3만명 가량이 모여 있었으나 안전요원은 400명에 불과했으며, 전부였다. 안전을 위해 억새밭에서 30~50m의 방화선을 구축했으나 불길은 방화선을 넘어서서 옮겨붙었다. 해발 757m 높이 산 정상 억새평원에서 한 해 무사안녕을 기원하려던 정월 대보름 축제가 갑작스런 해발600m 지대에는 화왕산성(사적 64)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있던 성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분전지로 알려져 있다. 삼지(三池)가 있다. 목마산성(사적 65)이 있다. ▲ 화왕산성 동문 ▲ 동문에서 바라본 허준 드라마세트장을 줌으로 당겨 보았다.. ▲ 동문에서 억새밭을 가로질러 서문으로.. ▲ 화왕산 용지 신라 26대 진평왕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인 예향(禮香)은 어려서부터 복병(腹病)이 있어 온갖 명약을 다 써도 좀처럼 복병은 낫질 않았다.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예향에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창녕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라는 못은 신험(神驗)이 영특하여 만일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애타는 마음에 좋은 날로 택일을 한 후, 예향은 기도하고 용지에 목욕을 하였더니, 갑자기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갈 바를 몰랐다. 조금 있으니 운무가 개이고 예향이 못에서 솟구쳐 나왔고, 그 후 병이 쾌유(快癒)하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기가 있었고 아들을 낳았다. 현자(賢者)가 현몽(現夢)하기를, "너가 이 아이의 부친을 알겠는가? 그 이름은 용자(龍子) 옥결(玉玦)이니,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요. 작게는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에 번성을 누릴 것이니라." 하였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겨드랑이에는 조자(曺字)와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이 진평왕에게 고하자, 왕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아기에게 '조(曺)'라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하였다. 계룡(繼龍)은 커가면서 매우 총명하였으므로 진평왕이 사랑하여 여러 가지 관직을 내렸으며, 신라 진평왕의 사위가 되어, 창성부마(昌城駙馬)에 봉하니 곧 창녕(昌寧) 조씨(曺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 서문은 지금 한창 성곽과 서문 보수작업중이다.. ▲ 지나온 배바위를 돌아본다.. ▲ 정상으로.. ▲ 하산은 제3등산로로..도중에 전망좋은곳에 잠시 들린다.. ▲ 창녕읍일대를 한눈에 볼수있는 전망대.. ▲ 원도 한도없이 흠뻑 흘린 땀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마눌과 둘이앉아 즐기는 늦은 점심.. 커피와 새우튀김, 샐러드를 곁들인 토스트, 그리고 모스끼또 와인의 향긋한 향기...... ▲ 목구멍을 적시는 와인의 맛이 기가 막힌다.. ▲ 하산길..3등산로는 이처럼 순탄한 길이다.. ▲ 도성사.. ▲ 아침에 지나갔던 갈림길..우측으로 올라서 좌측으로 내려왔다.. ▲ 다시 돌아온 매표소 입구.. ▲ 창녕여자 중고등학교옆으로 직진.. ▲ 버스정류소 가기전에 만옥정 공원에 들린다..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창녕읍 화왕산록에 있던 것을 1924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또한 공원에는 조선 후기의 관아건물인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창녕척화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 등의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 창녕객사 ▲ 신라 진흥왕척경비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 아침에 떠났던 사상터미널에 다시 돌아왔다.. ▲ 사상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단골 돼지국밥집, 무한리필로 제공되는 국수를 국밥에 함께 말아먹는 그맛이 일품이다. 오늘도 우리는 국밥한그릇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