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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와 소설쓰기 - 내가 보낸 세월
이동하(소설가)
1, 전쟁과 도시 체험-내 문학의 출발점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이따금씩 자문해보지만, 글쎄요, 그래도 소설 쓰는 일에 한사코 매달려 살았을까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선 데는 전쟁의 영향이 절대적이란 생각입니다. 이는 결코 나만의 경우가 아닐 겁니다. 이 땅에는 지난 전쟁 때문에 작가나 시인이 된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와 동년배이거나 윗세대 문사들 중에 특히 그런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문학의 길은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쟁이 터진 것은 내가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 여름의 일입니다. 누나의 손을 잡고 입학식에 간 기억도 생생한 그해 유월의 일입니다.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밤이면 마을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피난민의 물결이 밀려들었고, 뒤이어 남루한 몰골의 후송장정들의 대오가 해종일 마을길을 누비고 지나갔습니다. 흡사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물 같았습니다.
1번국도와 경부선철도를 좌우에 둔, 경상도의 조그만 산골마을(경북 경산군 남천면 대명동; 나의 본적지다)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천지개벽 이래 처음 겪어보는 엄청난 난리였던 거지요. 사계의 변화를 좇아 신명나게 펼쳐지던 나의 동심의 세계는 풍비박산나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혼돈과 공포와 폭력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이때 겪은 전쟁초기의 체험은 등단작품인 단편소설 <전쟁과 다람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다람쥐 한 마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소년 ‘욱이’는 당시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서사적 맥락은 물론 허구지만, 인물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의식과 정서는 그 무렵 나의 것임이 분명합니다. 배경이나 상황 역시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체험의 소설적 진술이 내 소설쓰기의 출발점이었던 거지요.
첫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1967)이나 중편 3부작 형식으로 발표된 장편소설 <장난감 도시>(1979~1982)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즉, 전쟁체험에서 출발한 나의 작품세계는 이향과 도시체험으로 이어지면서 줄곧 내 문학의 뿌리를 이루었던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럴 수밖에요. 전쟁 막바지인 1953년 여름에 우리가족은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사를 했습니다. 윗대부터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생판 낯선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겨 앉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 탓이었지요. 전쟁이 나기 전 군에 자원입대했던 삼촌이 전쟁을 치르면서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채로 귀가한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위의 두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파편>(1982)을 비롯해 비교적 최근작품인 단편소설 <감나무가 있는 풍경>(2010)에서도 이때 얘기를 거듭 되새김질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나의 유소년시절의 체험 중에서 전쟁만큼 충격적인 게 이향과 도시체험이라면 바로 그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 삼촌이었기 때문입니다. 삼촌은 그 시기를 상징하는 문제적 인물로 내 안에 깊이 각인된 까닭입니다.
대구로 이사한 우리가족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달성공원 앞 천변에 지어진 판잣집이었습니다. 말이 하천이지, 그 무렵 도시의 하천이 다 그랬듯이 심하게 오염된 하수도였습니다. 쪽문을 열고나서면 바로 한길이고 뒤쪽 창으로는 악취 나는 폐수가 내려다보였습니다. 아버지는 길 쪽으로 나앉아 풀빵과 냉차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다섯 식구의 호구지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연지사지요. 난생 처음 해보는 장사였으니까요.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우리가족은 태평로 난민촌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그때부터 온통 결핍뿐인 전후도시의 밑바닥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만성적인 굶주림과 병고 속에서 필경 어머니를 잃고 맙니다. 나의 십대 중반인 중학시절, 사회적 소외나 안전망 혹은 최저생계비니 국민복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시대의 일입니다. 빈곤과 질병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비극일 뿐 아무 기댈 데가 없었습니다.
나에게 전쟁체험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이 세계에 미만한 폭력성을 충격적으로 발견케 한 의미를 지닙니다. 전쟁보다 더 큰 폭력이 달리 있겠습니까. 인간의 야만성을 그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경우란 달리 없다는 게 나의 체험적 고백입니다. 나에게 도시체험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무엇보다, 이 세계의 근원적 결핍성을 절감케 하고, 그럼으로써 인생이 지닌 본질적 허무의식을 짙게 안겨 주었습니다. 성장기의 이 원체험들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평생을 두고도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소설들은 결국 이러한 체험적 진실 곧 내 나름의 비극적 세계인식을 담아내려는 노력에서 빚어진 것에 다름 아니란 게 나의 생각입니다.
1980년대 중반 한 때 내가 몰두했던 연작 단편소설 <폭력연구> 시리즈나, 실화에 토대를 둔 장편소설 <냉혹한 혀>(1992) 같은 작품이 이 세계의 폭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장편소설 <도시의 늪>(1980)이나 중편소설 <저문 골짜기>(1979)는 근원적 결핍성과 허무의식을 드러내고자 한 작품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전쟁이후 지속된 분단 상황이 곧 우리의 일상적 삶의 조건이 되면서 이 세계의 폭력성이나 결핍성은 더 거칠고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을 지배해왔기 때문이지요.
2, 등단 무렵 –문창과 제4강의실
대학을 또래들에 비해 4년쯤 지각입학 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학교가기가 번번이 중단된 탓이지요. 무단결석과 중퇴, 독학과 재입학을 밥 먹듯 하면서 초중고 과정을 대충(그야말로 대충이다) 거치고 대학(서라벌예술초급대학)에 가서 보니 내 나이 약관 스물셋이더라고요.
늦었지만 대학에 가야겠다고 작심하고 딴은 열심히 입시공부를 할 때만 해도 서라벌예대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지요. 그런 대학에 문예창작학과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요. 장학금 혜택이 많은 대학을 찾아서 막상 입학원서를 구입하는 단계에서야 나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목표수정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국내유일의 그 대학 문창과에는 당대 소설의 대가 김동리 선생이 주임교수로 계시다는 사실에 나는 무릎을 쳤던 거지요. 옳거니, 여기만 가면 소설가로 입신할 수 있겠구나 확신이 갔습니다. 여기서 잠시 뒤돌아볼 필요가 있네요.
문학에 대한 나의 관심의 단초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됩니다. 중2시절, 태평로 난민촌에서 어머니를 사별했을 때 나는 세상이 온통 거들난 줄 알았습니다. 슬픔과 염세에 빠져 몸과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쓴 나의 최초의 소설이 <코스모스 피는 마을>입니다. 이 짤막한 단편은 폐병으로 각혈하다 코스모스를 끌어안고 죽는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병적감상이 흘러넘치는 이 작품을 나는 [학도주보](학도호국단 발행)의 전국학생문예콩쿨에 투고했는데 어쩌자고 3등입상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 일이 내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장차 소설가가 되어 나와 우리가족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자 하고 단단히 결심한 거지요. 이후 두 번 다시 진로를 회의하거나 수정유혹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 길만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거지요.
문창과 전용의 제4강의실에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동급생들이 많았습니다. 시인 김형영, 마종하(작고), 임영조(작고), 박건한, 소설가 김정례, 김청, 극작가 나연숙 등입니다. 한두 해 위아래 학년에는 지금 문단에 나와 활동 중인 재능 있는 선후배들이 많습니다. 강의실 분위기는 늘 뜨거웠습니다.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이범선 김구용 손소희 선생 등 당대의 일급 작가와 시인들 앞에서 우리는 곧잘 치열한 진검승부를 펼치곤 했습니다. 이른바 ‘합평수업’이 그겁니다.
이 열정적 분위기 덕분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똥마려운 뭣처럼 미아리 캠퍼스 일대를 배회하며 혼자 끙끙 앓던 나는 아무 수확 없이 첫 학기가 지나고 두 번째 학기마저 반쯤 지나 도하 각 신문마다 신춘현상문예작품 공모 광고가 나올 무렵 새로 단편소설 한 편을 탈고하여 동숙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시 전공자인 그는 단숨에 읽고 나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춘당선을 보장한다. 상금 받거든 우리, 양복 한 벌씩 사 입자.”
신춘문예 첫 투고인 고로 최종심까지만 올라가 주기를 나는 속으로 빌었는데 운 좋게도 서울신문에서 당선통지가 날아왔습니다. 단편 <전쟁과 다람쥐>가 그 작품입니다. 상금은 3만원, 한 학기 등록금 내고 술 좀 사고 나니 양복 값은 고사하고 푼돈밖에 남지 않더군요.
흔히 운 타령을 합니다만 나에게는 등단문운 같은 게 있었나 봅니다. 1966년도 신춘당선에 이어 67년도에는 단편소설 <인동>(겨울 비둘기)으로 공보부 신인예술상 소설부문 수석상을, 그리고 같은 해 문예지 [현대문학] 제1회 장편소설공모에서 <우울한 귀향>이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낙방을 거듭한 동급생들이 나에게 ‘프로’란 딱지를 붙여 주더라구요.
3, 사는 일과 쓰는 일 사이에서
첫 직장은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지 편집국이었습니다. 시인 김형영 형과 둘이서 창간호(1968.11월호)를 만들었는데 곧 이문구 형(작고)이 보강됐습니다. 발행인은 김동리 선생, 편집국장은 김상일 선생이셨습니다. 월간문예지가 귀한 때였습니다. 광화문 옛 예총건물 2층에 있던 문협 사무실은 이래저래 문단 복덕방 구실을 했습니다. 나는 두 해 남짓 편집 일을 하면서 문단 어르신들은 물론 당대 내로라는 문사들을, 비록 어깨 너머로나마 두루 뵈올 수 있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워낙 박봉이라 1970년 가을, 결혼을 앞두고 내가 제일 먼저 편집실을 떠났습니다. 은사님에게 사직서를 내미는 일이 도리가 아니었지만 그럴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동리 선생이 하신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선생은 좀 못마땅한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월 1만원만 줄 수 있어도 붙잡겠다만 우리 형편이 그것도 안 된다....”
내가 옮겨간 곳은 월간 골프잡지사였습니다. 월 7천원을 받던 나는 월 2만원짜리 봉급생활자가 되었지만 그 대신 생판 낯선 일이었습니다. 그럴 밖에요. 골프장이라곤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때문에 지겨운 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단박에 문예지 시절이 그리워졌지만, 그러나 별도리 없었지요. 거기서 잠시 밥벌이를 하다가 다시 옮겨간 곳이 월간 양계잡지사였습니다. 보수가 더 후해진 대신 맨날 닭 사진들만 들여다보는 일 역시 고역이기는 마찬가지였지요. 다시 옮겨 앉은 곳이 월간 [지성](창간호 1971.11.)이란 잡지사였습니다. 이청준(작고)씨와 책상을 나란히 놓고 앉아 당대 최고의 지성지를 편집한다는 자부심으로 마음이 한껏 부풀어오른 것도 잠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재정난 탓이었지요. 출판사나 잡지사들이 간판 올리고 한 해를 버텨내기가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속절없이 실직자로 내몰린 나는 알만한 얼굴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지요. 뭐, 나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세상살이의 두려움과 고달픔에 잔뜩 짓눌린 채였습니다. 이러다가 내 식구들이 길바닥으로 나앉는 건 아닌가 싶어 자주 등덜미가 써늘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또 그럭저럭 꾸려가지는 게 세상살이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번에는 평론가 홍기삼 선배의 주선으로 건국대학교 신문사에 자리를 얻었습니다. 내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던 평론가 곽종원 선생이 총장으로 계신 덕분이었지요.
그렇게 호구지처를 찾고 나자 창작욕구가 다시 나를 압박했습니다. 단칸방에 애 둘을 데리고 살 때인데, 식구들이 잠든 머리맡에서 밤늦도록 소설을 쓰곤 했습니다. 겨울에는 문을 꽁꽁 닫아 건 좁은 방에서 연신 독한 담배를 태워댔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야만적일 수 없는 작업풍경이다 싶습니다. 때로는 다락으로 기어올라가 거기서 작업을 했습니다. 단편 <알프스를 넘는 법>(1970), <상전 길들이기>(1976), <모래>(1977), 중편 <실종>(1974) 등 70년대에 씌어진 초기작품들은 모두 그런 작업환경의 산물입니다.
아시다시피 1970년대는 툭하면 위수령이 발동되곤 하던 이른바 유신시대였습니다. 출판물 검열이 가혹했던 그 시기 10년간을 대학신문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편집안 기획에서부터 취재, 기사작성, 판짜기, 인쇄교정에 이르기까지 학생기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게 주된 업무였지요. 다들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듯 숨죽이고 살아가던 시절, 유독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을 부리고 건사하느라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학생기자들과 싸우고 구스르고 해가며 힘겹게 만든 신문을 일절 배부하지 못하고 전량 폐기처분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 시절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느닷없이 경기도교육청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사는 일과 글 쓰는 일 사이에서 시달리던 나는 문득 낙도나 벽촌의 초등학교 선생 자리가 탐이 났던 거지요. 그런 직장이라면 맘 편히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든요. 사는 일이 절박한 만큼 쓰고자 하는 욕구가 절실했습니다. 인사 관련 담당자에게 내 처지를 얘기하고 임시직이라도 좋으니 보내줄 데가 없느냐 물었습니다. 몇 년 만 일찍 왔어도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상황이라고, 그는 동정의 빛을 담아 말했습니다. 그냥 돌아설 수밖에요.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그렇듯 신산한 세월을 보내던 중에 목포대학 국문과의 전임교수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 일에 다리를 놓은 사람은 후배작가인 박양호 전남대 교수였습니다. 비록 낯선 곳이었지만 나는 주저 않고 이삿짐을 쌌습니다. 1981년 2월의 일입니다. 저 광주민주화운동의 기억이 생생하던 때라 경상도 출신인 나를 걱정하는 친구도 없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또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친지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대신 문학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친구삼아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주말이면 가족여행을 자주 했습니다. 목포 일대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해남을 뒤지고, 신안 앞바다의 섬들을 돌아다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모처럼 누려보는 여유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대학에서도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국문학과 동료교수들의 배려로 강의는 물론 그 밖의 짐도 많이 덜 수 있었습니다. 득분에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글쓰기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습니다. 연작중편 3부작 형식으로 발표한 [장난감 도시]의 2부와 3부를 쓴 것도 이 시기의 일이고, 연작단편 [폭력연구] 시리즈를 쓴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광주사건 후유증과 ‘학원의 봄’으로 시작된 민주화 시위로 캠퍼스는 자주 소란스러웠지만 내 작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밤늦도록 연구실에 앉아 작업을 하다가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면 광주-목포 간의 텅 빈 도로풍경이 어찌 그리도 시리게 가슴에 와 닿던지... 지금도 써늘한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감정은 무엇일까? 지금도 곰곰 생각해 보곤 합니다. 작가는 글을 쓸 때만 이 세계에 대한 가장 명징한 의식과 더불어 자기존재의 충일감을 맛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91년도 새학기부터 중앙대학 문예창작학과로 다시 옮겨 앉았습니다. 건국대에서 나의 30대 10년, 그리고 목포대에서 나의 40대 10년을 보낸 뒤여서 앞으로 10년 뒤인 60세에는 조기퇴직하고 글이나 써야지 내심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러지 못하고 정년을 맞았지요. 사는 일이 어찌 그리 호락호락하겠습니까.
중대 문창과에는 작가지망생들이 대거 몰려드는 곳이라 분위기부터 확 달랐습니다. 국문과의 그들과는 기질도 다르고요. 좋게 말하자면, 문학에 대해서나 시국에 대해서나 엄청 치열하게 반응하는 분위기였지요. 훈장노릇이 버거웠습니다. 원고지에 코를 틀어박고 시나 소설을 열심히 끄적거리는 녀석들이나 걸핏하면 친북반미 구호를 외치며 밖으로 뛰어나가는 녀석들이나 마찬가지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늘 학생들의 습작원고가 쌓이고, 토론수업은 종종 씁쓸한 뒷맛을 남기곤 했습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나의 글쓰기는 점점 더 힘겨워질 밖에요. 대학으로 간 소설가들 대부분이 비슷한 사정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오죽하면, 대학은 작가의 무덤이란 말이 나왔겠습니까. 10년 넘게 제대로 된 소설 한 편 못쓴 동료교수가 하나둘이 아니었고,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 거 같습니다. 사는 일 때문에 쓰는 일을 뒷전으로 밀쳐놓은 결과지요.
작가는 줄광대와 같다는 게 평소 생각입니다. 쓰는 일을 게을리하다보면 결국 둔해지고 말지요. 나는 이른바 ‘전직작가’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안간힘 했습니다. 방학 때만이라도 소설쓰기에 집중하곤 했지요. 하지만 실상 방학이란 것도 빛 좋은 개살구 격입니다. 여름방학은 더위 때문에, 겨울방학은 입시 때문에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한사코 매달려야 단편 하나 건질까 말까였습니다. 나는 급기야 저 목포대학 국문과로 되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불편하면 다시 오라던 동료교수의 말이 귀에 쟁쟁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요. 정말 쓰고 싶은 건 나중 퇴직 후에 쓰지 뭐, 이런 식 감언이설로 자신을 달래며 견딜 수밖에요. 창작집 한 권 내놓는 데 10년씩 걸린 사정이 그런 것입니다.
4, 자전적 요소와 일상적 서사-나의 소설작법
나의 작품세계를 내 입으로 말하는 자리이니만치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자 합니다. 첫 소설(전쟁과 다람쥐)에서부터 근년의 작품(사모곡)에 이르기까지 나의 모든 작품에 일관된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족사와 관련된 인물과 이야기들이란 사실입니다. 일테면, 첫 소설에서 전쟁 중 젊은 이장으로 등장하는 아버지는 <사모곡>에 이르면 8순의 치매노인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흔히 내 소설의 주인공이나 그 가족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고 늙어갑니다. 그 까닭인즉, 나의 소설의 인물들은 대부분 나와 세월을 함께 했던 주변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전적 요소가 강한 셈이지요. 소설은 허구를 본질로 하지만 나의 소설쓰기는 거의 언제나 나의 삶이 놓여 있는 자리를 그다지 멀리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소설작법은 항상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고 허구적 요소는 가급적 최소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자전적 요소가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특히 <장난감 도시>가 그러합니다. 인물들이나 사건이 거의 실제적 경험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전쟁의 포연이 멈춘 1950년대 중반, 대구시 태평로 3가(지금은 고성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난민촌에서 겪은 얘기입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흡사 묵은 앨범을 들춰보듯 기억의 갈피들을 한 장씩 넘겨가며 그 시절 내 이웃의 얼굴들을 찾아내어 스케치하는 기분으로 썼습니다. 단지 미학적 고려 때문에 기억을 재편집하는 수준 외엔, 가급적 허구를 배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에서 출발하되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 그것이 내 작법의 요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적 진실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적 삶의 구체 체험에서 얻어진 어떤 감동적 세계인식 내용입니다. 나의 경우 그것은 거의 매번 일상적 삶에서 감동의 형식으로 얻어집니다. 작가로서 내가 하는 일은 이것(감동)을 다시 언어(소설)의 형식으로 재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자에게도 의미 있는 각성을 줄 수 있도록 소설의 미학구조를 짜 맞추는 데에 늘 나의 방법론적 고민이 있는 것이지요.
작업에 임하여서는 투명한 문장을 쓰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선, 그것(감동적 체험)이 무엇인지 나로서도 잘 알 수 없는 때가 많고, 그리고 간신히 이해하고 나면 다시 언어의 저 엄청난 저항 앞에 마주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천성의 게으름까지 가세해서 결과적으로 과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벽돌을 한 장씩 쌓아올리듯이 문장을 하나씩 이어가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됩니다. 완전한 스토리를 머리에 넣고 시작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시계 제로의 안개지대를 헤쳐 가듯 밀고 나갑니다. <장난감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53개의 삽화들과 그 안의 인물들이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구성되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소설쓰기란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고, 상상의 산물이라기보다 일상적 경험들의 의미 있는 재구성작업인 셈입니다.
5, 하고 싶은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몇 가지
중단편 소설집으로는 일곱 번째인 [우렁각시는 알까?]를 간행한 것은 2007년 5월, 정년을 한 학기 앞둔 때였습니다. 그래서 책 끝(작가의 말)에 나는 이런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이제 족쇄가 풀리면 먼저, 자유를 만끽하겠다. 그러면서, 필요 때문이 아닌, 정말 읽고 싶은 글이나 읽고, 그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흘러 다니고 싶다. 무슨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지 싶어서다. 그 다음으로는, 이미 때가 늦었지만 그러나 한두 해만이라도, 이른바 전업작가 기분을 내보고 싶다. (.....) 어쨌거나 지나온 내 삶이 문학에 너무 많이 빚지고 있다는 심정에서다.”
솔직한 고백이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글쓰기와 생업의 갈등 속에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비로소 원초적 자유를 되찾은 나는 이제부터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리라 단단히 작정했던 거지요. 하지만 그로부터 어느 덧 여러 해가 흘러 간 지금 나는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람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생업 말고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덫은 도처에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 있는 거지요. 일테면 몇 년 전 느닷없이 폐암진단을 받은 것도 그런 덫의 하나인 거지요. 수술과 약물치료와 습생을 통해 그럭저럭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급기야 나는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짓거리나 저지르지 말자고.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 잭 니콜슨은 이렇게 익살을 떱니다. 늙어가면서 꼭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지요. 첫째, 화장실을 그냥 지나치지 말 것. 그랬다간 곧 낭패를 당한다는 거지요. 둘째, 섹스를 피하지 말 것. 매사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말라는 거죠. 셋째, 아무데서나 방귀를 뀌지 말 것. 노추가 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작가가 늙어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을 법합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이런 겁니다. 첫째, 같은 말,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지 말 것. 둘째, 인생을 달관한 듯 도사연하지 말 것. 셋째, 언어의 긴장과 탄력을 끝까지 놓지 말 것.
하지만 이 또한 지난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채워지지 않은 글쓰기의 욕망과 날로 무디어지는 필력과의 갈등 속에 나는 지금 서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