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공은 『고려사』에 열전이 있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최언위는 처음 이름이 최신지로 경주최씨다. 품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글을 잘했다. 신라 말기에 나이 열여덟 살이 되어서 당나라에 유학하고 예부시랑 설정규가 주관한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발해 재상 오소도[1]의 아들 오광찬도 같이 과거에 급제했다. 오소도가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다가 자기 아들 이름이 최언위보다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서는, 표문을 올려 주장하기를 ‘신(오소도)이 예전에 입조하여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 신의 이름이 이동(신라사람)보다 위에 있었으니 지금 신의 아들 오광찬도 최언위보다 위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라고 요청했으나 최언위의 재능이 우수하고 학식이 넉넉하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 마흔둘에 신라로 돌아오자 집사성 시랑, 서서원 학사로 임명했다.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최언위가 온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고려에 귀부하니 태자사부로 임명하고 문필에 관한 임무를 맡겼다. 고려 궁궐 편액은 모두 최언위가 지은 것이며 그 당시 귀족 가문에서는 모두 최언위를 스승으로 섬기려고 했다. 벼슬은 대상, 원봉태학사, 한림원령 평장사에 이르렀다. 혜종 원년(944)에 죽으니 나이가 일흔일곱이었다. 부음을 듣고 왕이 크게 슬퍼했으며, 정광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문영이라 했다. 아들은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최행종이다.
최광윤은 일찍이 빈공진사[2]로 유학하여 진나라[3]에 들어갔다가 거란국에 사로잡혔으나 거란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등용되어 벼슬에 임명되었다. 거란의 사신으로 구성[4]에 갔다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려고 준비하는 것을 알고, 글을 써서 여진족 사람에게 부탁하여 고려 조정에 알렸다. 이에 왕은 해당 관청에 명하여 군사 30만 명을 선발하게 하고 부대 이름을 광군[5]이라 했다.
최행귀도 오월국[6]에 유학했는데, 오월국 왕이 비서랑으로 임명했다. 뒤에 고려로 돌아와서 광종을 섬기어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으나 죄에 연루되어 죽었다.[7] 최광원은 벼슬이 비서소감에 이르렀다. 아들은 최항으로 열전이 따로 있다.” {영인}
『고려사』<최언위 열전>에 문영공은 경주최씨(慶州人)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감사공이 <융경보기>에서 주장한 것처럼 원래는 경주최씨인데 완산주로 옮겨와서 살면서 완산최씨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關鍵)은 과연 문영공이 전주에서 살았는가 여부라고 말할 수 있다.
문영공이 급제한 때가 언제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구당서(舊唐書)』에 함께 급제한 발해 사람 “오광찬(烏光贊)이 천우 3년(906)에 급제했다.”고 적혀 있으므로 문영공도 906년에 급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영공은 18세 때(885) 당나라에 유학하여 42세 때(909) 신라로 귀국했고 944년에 향년 77세로 돌아가셨으므로 868년(경문왕 8) 출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영공 이력을 요약하면 표와 같다. 문제는 완산주가 900년부터 936년까지 신라와 고려의 적국 후백제 수도였으므로 문영공은 그곳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후백제 멸망 후 옮겨가서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후백제가 망한 936년에서 문영공이 돌아가신 944년까지는 겨우 8년에 불과하다. 고려에서 최고위 벼슬에 오른 분이 70세도 넘은 나이에 아무 연고도 없고 얼마 전까지 적국 수도로 고려에 원한이 많은 완산주로 옮겨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문영공의 손자 절의공(節義公) 최항(崔沆) 또한 『고려사』에 열전이 수록되어 있어서 자세히 알 수 있지만, 출생연대는 적혀 있지 않다. “성종 때 나이 20세로 갑과(장원)로 급제했다.”[8]라고 적혀 있고『고려열조등과록』에는 그 해가 성종 10년(991)이라 했으므로 절의공은 972년 출생[9]인 셈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문영공과 104세나 차이가 나고 또 <최항 열전>에 절의공은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아서 “나이 70도 안 되어 표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했다.[10] 했으며 또 현종 15년(1024)에 병이 위독해지자 왕이 친히 찾아가 문병했다. 아들 최유부에게 비서성 교서랑을 제수하고, 사위 이작충에게 장복(무늬가 있는 옷)을 내려주어 최항의 마음을 위로했다. 최항이 죽자 왕이 크게 애도하며 절의로 시호를 내렸다.”[11]했는데 만약 절의공이 972년생이라면 돌아가신 나이가 겨우 53세에 불과하여 “나이 70도 안 되어서 치사를 했다.”는 등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고려열조등과록』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각주 ------------------
[1] 烏炤度 or 烏昭度. 872 년경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한 발해 재상.
[2] 賓貢進士. 중국 빈공과 급제자. 빈공과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3] 晉. 당나라 말 오대(五代) 가운데 하나인 후진(後晋, 936~946)
[4] 龜城.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군.
[5] 光軍. 정종 2년(947) 거란 침입에 대비해 조직된 예비군 성격의 공역(工役)부대.
[6] 吳越國(908~978). 오대십국(五代十國) 중 한 나라.
[7] 광종 말년 발생한 정변에서 최행귀를 비롯한 신라계 세력이 축출되었다. 광종 21년(970) 최지몽(崔知夢)의 축출 및 균여(均如)의 참소 사건과 연관된다. 광종 측근으로 개혁을 추진하던 문신 관료들에게 왕권 강화 결과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했다. 특히 최행귀의 죽음은 신라 출신들(경주최씨)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8] 成宗朝年二十登甲科.
[9] 한국민족대백과 등 거의 모든 문헌에 그렇게 적혀 있다.
[10] 沆不樂仕宦年未七十表請致仕.
[11] 十五年病篤王親臨問疾授其子有孚秘書省校書郞賜女壻李作忠章服以慰其意及卒王悼甚贈謚節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