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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시미 칼>의 줄거리:
전신을 하얀 까운으로 치장을 한 일식 주방장님이 환하게 웃으시면서 사시미칼을 쥐고 계시면 아름답고 먹음직하게 잘 꾸며진 커다란 회 접시와 다양한 스끼다시로 가득 메워진 일식 밥상이 머리에 떠 오릅니다. 그런데 많은 종류의 칼 중에 특별히 이 사시미칼은 이상하게 주방장님 이외의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으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범죄와 연상이 됩니다. 사람의 몸이 꼭 이와 같습니다. 사시미 칼 같은 몸을 주방장이신 하나님 손에 쥐어 드리는 길을 찾아봅니다.
사시미 칼
(롬6:12~14)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사시미 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관세청 관계자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최근 온라인 국제쇼핑이 굉장히 많이 늘어나면서, 공항이나 항구에 있는 세관으로부터, 통관상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는 물품에 대한 잡음이 굉장히 많이 생겨서, 문의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세관에서는 가능한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은 그런 물품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하게 심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국제 온라인 쇼핑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런 잡음이 발생되는 물품 중에는 총포 그리고 전자충격기 등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사시미 칼이라는 겁니다.
이 사시미 칼이 수입통관 때 항상 문제가 되는데, 그 사시미 칼을 들여오는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사시미 칼이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서, 그것을 온라인으로 구입하는 그 의도를 세관 입장에서 아주 명확하게 붙잡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사시미 칼을 구입하려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때가 많아서 이렇게 시끄럽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 머리에 하얗게 주방장님이 쓰는 그런 모자를 쓰시고 하얀 가운을 입으시고, 일식집에 들어가면 저~쪽에 서서 이쪽 입구를 향해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소리를 크게 지르지 않습니까?
주방장님들이 그때 환~하게 웃으면서 사시미 칼을 손에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벌써 딱 머리에 순간적으로 기대가 됩니다.
잘~ 아름답게 꾸며진 싱싱한 여러 가지 회가 담뿍 담겨 있는 그 아름다운 회 접시를 생각하게 되잖아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시미 칼은 일식 주방장님 말고 다른 사람 손에 쥐었거나, 그냥 누가 손에 쥐지 않더라도 일식 주방이 아닌 딴 곳에 놓여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뭔가 무시무시한 소름끼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무서운 칼이에요, 길쭉~한 게.
그래서 뭐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이 칼을 손에 쥔다,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직폭력배들이 영화나 드라마 같은데서 나오는 것처럼, 사시미 칼을 품고 다니다, 아~ 무서운 일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사시미 칼보다도 훨씬 더 소름끼치도록 날카롭고 예리하고 무서운 무기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사람의 몸이고, 내 몸이에요, 내 몸.
내 몸이 사시미 칼보다 더 위험한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 몸을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불의의 무기로 죄에 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불의의 무기, 의의 무기라고 나오니까 서로 다른 무기 같지요?
아니에요. 내 한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의 무기라는 것은 내 몸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졌을 때를 말합니다.
불의의 무기라는 것은 내 몸이 죄의 손에 쥐어졌을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불의의 무기, 의의 무기라는 것은 내 몸이 하나님께 쥐어졌을 때는 의의 무기,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칼이 되고, 죄에 쥐어져서 내 몸이 사용 될 때는 불의의 무기, 하나님으로서는 도저히 마음에 들어 하실 수 없는 그러한 정말 이 6장의 마지막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정말 멸망시키고 불살라 버리고, 불이 훨훨 타는 가운데 프라이팬에 소금 튀듯이, 그렇게 멸망당해야 될 못마땅한 결과들이 빚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 몸을 통해서.
그러면 하나님은 왜 내 몸을 손에 쥐고 싶어 하시는 것일까요?
창조의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 않습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 차있는 무의 영역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삼라만상을 창조하실 때, 그 창조의 과정 과정마다 하나님께서 추임새를 넣으십니다.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그러니까 ‘야~! 정말 좋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마음에 든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세상으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도 뭐냐 하면 마찬가지로 보시기에 좋은 역사를 이루어 내시려는 겁니다.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잘 꾸며진 회 접시 같은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밑그림이 있으십니다.
이 밑그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역사를 위해서, 내 몸을 의의 무기,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결과를 나타내기 위한 무기로 사용을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죄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죄적 존재 구조.
마음이 하나님을 빗나갑니다.
하나님을 비껴서 하나님을 지나쳐 버리고, 마음의 등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그리고 몸에 붙어서, 몸이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서 내 마음이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반응하면서 내 몸을 움직이려 합니다.
이게 바로 내 몸이 지금 죄의 상태에 맡겨지게 된 겁니다.
내 마음은, 내 딴에는 잘해 보겠다고 하고 있지만, 존재의 구조 자체가 하나님을 빗나간 구조이고, 그럼으로써 죄의 구조이고 죄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사시미 칼 잘못 휘두르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계획하신 밑그림, 그것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너무나 너무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내 자신이 내 인생을 보기에도 너무 감격스러울 수 있는 그런 내 인생의 밑그림을 내가 내 몸을 가지고 사정없이 찢어 놓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계획하신 인생의 밑그림 자체를, 내가 죄악 된 존재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며 이 몸으로 행위하고 살아갈 때에, 내 몸으로 행동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세워두신 아름다운 밑그림을 찢어 놓는 것이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위해 갖고 계신 계획을 산산조각을 내놓는 결과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 본래의 인생을 찢는 이 행위는 그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연쇄반응을 동반합니다.
내 인생의 진행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본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내 주변의 사람들 특별히 나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제일 가까운 가족들의 인생이 동시에 찢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내 인생의 밑그림을 찢을 뿐만 아니라, 나와 유기적인 관계 안에 살고 있는 내 자녀, 내 배우자, 내 부모님, 이 가까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생 계획까지도 다 찢어 놓는 그러한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게 내 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시미 칼이 섬뜩섬뜩하고 소름끼치는 무서운 무기입니다마는, 아무리 사시미칼이 위험하고 소름끼쳐도 내 몸이 갖고 있는 가능성 앞에서는, 빛이 바랠 정도로 내 몸은 위험한 사시미 칼 이상의 칼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앞에서 여러분,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로원 원리의 오리지널 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다.
죄에 대해서 꺼지고 하나님에 켜진다, 이런 뜻입니다.
죄에 대해서 제로가 되고 오직 마음은 전체가 다 하나님을 향해서만 산다, 온전한 1.
바로 이게 바로 제로원의 오리지널 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이다, 이런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해서 죽게 될 때에, 그게 바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헌 생명들에 대해서 죽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죄의 구조가 파괴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비껴 스쳐 지나쳐버린 그래서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이 존재의 구조, 이 구조가 깨어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계속해 나가고 있는 과정 중에 되어 진 이야기에요.
그래서 믿음은 행위 이전의 일이라는 대전제 아래서 믿음과 관련된 다양한 측면과 문제를 계속 다루어 왔습니다.
행위 이전의 일로서 심장이식이고, 심장을 이식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을 편승하는 것이고, 그 내 심장을 이식한 숙주이신,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것이고, 또한 새 생명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죄에 대해 죽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서만 사는 것이다, 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면 이제 나와야 될 얘기가 뭡니까?
믿음과 육체, 이 몸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리고 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행위의 차원은 믿음과의 관계에서, 영원토록 논외로 처리되어서 추방되어야 될 항목인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이 세 구절 속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몸은 의의 무기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있는 것이 죄악의 존재 구조라고 해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으면서 마음이 몸을 떠나게 됩니다.
또, 몸이 만나게 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마음이 제로가 됩니다, 신경 씀이 제로가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몸은 내 마음으로부터 버려진 채로 남겨지게 됩니다.
이때 이 몸에 대한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이것이에요.
의의 무기로 드려져야 된다는 얘기에요, 의의 무기로, 이 몸이.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고, 몸은 의의 무기로 드려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의 주님을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자! 여기서 질문을 해 봅니다.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실제 어떻게 해야 된다느냐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냐?
또 하나의 질문은, 내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그러면 믿음이라고 하는 마음의 움직임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부가적인 마음의 행동인 것이냐? 마음의 움직임이고 또 다른 마음의 결단이냐?
주님의 십자가에서 연합해서 죽는 이유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드리기 위해서요, 죄악 된 존재의 구조를 깨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믿음인데.
그러면 이 믿음 말고, 마음을 몸에서 떠난 상태에서 남겨진 이 몸은, 또 다시 하나님께 드리려는 액션이 필요한 것이냐, 부가적인 액션이 필요한 것이냐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의 다른 측면을 얘기하는 겁니다.
믿음은 행위 이전의 일이다, 믿음은 심장을 이식하는 것이다, 믿음은 새 생명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고, 이 세상에 다른 대상을 향해서 죽는 것이다, 라고 하는 한 측면이 있고, 믿음이라고 하는 한 가지 일에 또 다른 측면은 바로, 몸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음을 갖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게 되면, 마음이 몸으로부터 떠나 버리지 않습니까? 이때 이 몸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쥐어지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내 몸을 어떻게 하나님이 의의 무기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 손에 쥐어 드릴 수 있겠느냐? 내 몸을 갖고 내 마음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냥 몸을 떠나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서,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 내 마음이 따라 올라가면, 그래서 내 행복과 만족과 기쁨이 하늘 위로부터만 주어진다고 믿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내 이 땅에 남겨진 몸은 하나님께서 손에 쥐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손에 쥐십니까?
이 땅 위에서 이 몸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나의 인생 계획에 밑그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밑그림을 수행하시기 위해서 내 몸을 손에 쥐신다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내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또 다른 부가적 결단과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제로 됨의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내 마음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고, 이 땅 위에 있는 내 몸은 이 땅 위에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지는, 이 두 가지 일이 주님의 십자가를 믿게 될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내 죽음이라고 고백하게 될 때 동시에 일어난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해 죽으면, 옛 사람이 죽는 것이라 그랬잖아요, 그렇죠?
옛 사람은 빗나간 존재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죄.
그래서 이 구조 안에서, 하나님을 비껴 지나쳐서 등지고 몸에 붙어서 몸이 만나는 대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갈 때,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몸에서 생겨나는 욕구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소원에 굴복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날마다 죽는다고 고린도 전서 15장에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몸이 만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해서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몸에 대해서도 마음이 죽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예수님 따라서 부활승천해서 아버지께로 가게 되고, 이때 몸은 하나님의 손에 넘어가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일식 주방장님 손에 쥐어진 사시미 칼이 된다는 얘기에요.
그 전에는 죄악 된 존재의 구조, 마음이 하나님을 지나쳐서 몸에 붙어 있는 상태에서 몸이 만나는 것들을 내가 판단하고 살아갈 때는, 조직폭력배의 손에 들여진 사시미 칼이 되어서, 이 칼이 칼부림이 일어나게 되는데, 나는 잘한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데 그게 전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계획되어진 내 인생의 계획과 밑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칼부림으로 바뀌어 버린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제로원의 원리를 정리하면 여러분, 이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2000년 전에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고 마치 아담이 범죄 할 때 내가 그 속에 있었으므로 원죄를 타고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죽으실 때에 내가, 그런 죄악 된 존재의 구조를 갖고 살았던 옛 사람인 내가 같이 죽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나는 꺼진 거예요, 내 마음이 제로가 된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켜집니다.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이 꺼질 때, 몸으로 만나게 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마음이 꺼지게 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켜지게 됩니다.
이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꺼지는 하나의 꺼짐을 통하여, 하나의 제로를 통하여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켜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땅에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내 몸을 의의 무기로 쥐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켜지게 됩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한 번 죽는데,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켜짐과 동시에, 나를 이 땅에 있는 내 몸을 향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켜지는 두 가지의 켜짐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 두 번째 켜짐을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의의 무기로 드리라고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를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마음이 몸에 붙어 있는 죄악의 구조 속에서 죄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 몸을 통하여 욕구가 나타나는 것은 다 오늘 본문에 말씀대로 몸의 사욕입니다.
몸의 탐심이에요, 몸에서 샘솟는 탐심들이에요.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욕구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몸이 있는 한 인간으로 오신 주님께서도 발견 되었듯이,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고 입어야 되고 집이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해 몸의 사욕이 있는 반면에 몸의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필요.
타락 이전에 아담의 몸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에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이라는 건 뭡니까?
모든 육체적인 필요가 다~ 충족되어지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가 에덴입니다.
“에덴”
그리고 심지어는 여자까지도 아담의 머릿속에는 아직, 이성이라는 단어와 개념조차도 없을 그때에, 하나님이 스스로 먼저 앞서서 이성이라는 여자를 만들어 돕는 배필로 배우자로 아담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몸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천부의 자식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 때에 심지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루하루 사는 삶에서 필요한 필요들, 내 몸이 너무 피곤하잖아요?
쉴 수 있는 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십니다.
일 년에 한 번 가는 휴가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몸의 필요를 하나님이 아시는 거예요.
다~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시고, 다~ 필요한대로 공급하시고 채워져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뭐냐? 몸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드리면 되요.
내 몸을 따로 쥐어드리기 위해서, ‘내 몸 가지세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어버리면 됩니다.
이 몸에 대해서 죽어버리면 되고 이 몸이 만나는 대상들에 대해서 죽어버리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몸을 쥐십니다, 의의 병기로 사용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내 몸이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하나님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결과를 열매 맺는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체험하실 수 있는 하루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몸은 사시미 칼과도 같습니다.
내가 사용하려 할 때, 나는 조직폭력배로서 내 몸을 사용하는 소름끼치는 형국이 벌어지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계획하신 모든 내 인생의 복된 계획들을 찢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과 내 몸에 대해 죽음으로써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지고, 내 몸은 인생의 주방장이시고 내 인생의 맛을 내시는 주방장이신 하나님 손에 쥐어지는 놀라운 복된 결과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