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엄기호 목사
"지구 종말의 날 시계"(Doomsday Clock) 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운명의 날 시계"라고도 하는 이 시계는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발행하는 핵과학회지"불리틴"(The Bu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의 표지에 실려 있는 일러스트 시계입니다. 인류가 핵전쟁으로 종말을 맞는 시점을 자정(0시)라고 가정했을 때 그 시점까지 얼마나 남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구촌의 위기 상황을 경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처음"지구 종말의 날 시계"는 자정의 7분 전에서 출발했다가 1953년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했을 때 2분 전으로 자정에 가장 가깝게 조정되었습니다. 그 후 1991년 미국과 러시아가 전략무기감축협상에 서명하고 핵무기 보유국들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당시에는 17분 전까지 조정되었으나 1998년 6월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하고 핵무기 보유국들이 핵 감축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되면서 다시 9분 전으로 조정됐습니다.
그런데 11시 51분에 머물던 분침이 4년 만에 두 단계를 더 움직여 현재는 11시 53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지구 종말의 시계가 앞으로 움직인 것은 9․11테러와 테러조직들의 핵물질 입수 시도, 핵보유국인 인도 ․ 파키스탄 간 긴장 고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국제 사회 긴장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로 작용해온 "지구 종말의 날 시계"가 자정을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가운데, 근래의 세계 동향은 이라크 전쟁 이후, 과거보다 더 심한 긴장 속에 놓여있는 듯합니다.
오늘날 국제정세나 환경훼손으로 말미암은 불안한 기후 흐름들은 우리가 소망을 둬야 할 곳은 이 땅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이 세상은 없어질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네 삶은 아침 안개와 같고 여인숙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바라보며 살지 않습니다.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보고 새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부탁하기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간절히 사모한다"는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빌 1:27, 3:14).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추수 때가 오기를 기다리듯, 약혼한 신랑 신부가 결혼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듯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기다리면서 흠이 없이 준비한다는 뜻입니다(마 24:44).
그러면 우리가 사모하고 소망하며 바라보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일까요?
1. 새 하늘과 새 땅은
첫째로, 수한이 차지 못하여 죽는 자가 없는 곳입니다(본문 20절).
이 세상에서 죽음은 나이에 상관이 없고, 가난한 사람, 부요한 사람,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남녀의 구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병들었으니 빨리 죽고, 건강하니 오래 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할 일이 많아 오래살고, 할 일이 없어 빨리 죽는 법도 없습니다.
이렇게 차별이 없고, 순서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이 세상에는 울음과 슬픔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습니다. 억울한 일들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는 아픔과 고통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질병과 고통 투성이지만 그 나라에는 사망이 없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계 21:4).그러므로 빛과 소망이 언제나 넘치는 그 나라에 가기 위해 흠 없이 예비하는 성도가 됩시다.
둘째로, 수고가 헛되지 않는 곳입니다(사 65:23).
이 세상은 뺏기고, 뺏는 세상. 재난에 걸려 수고가 헛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수고가 헛되지 않고,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않는 곳입니다. 자기가 지은 집에 타인이 거하지 않고, 자기가 지은 곡식을 타인이 거두지 않으며, 자기가 모은 재산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는 곳입니다.
이에 우리는 거룩한 행실로 사회에 빛이 되고, 경건한 마음으로 교회 덕을 세우며,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예비해야겠습니다(고전 15:58).
셋째로,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평화로운 곳입니다(사 65:25).
이 세상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고통 중에 있습니다.
보험금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과 보금자리를 불태우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이 세상이며, 불륜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양심이 마비된 곳이 세상입니다.
진짜라고 하면서 거짓말투성이고, 겉으로는 가장 친한 척, 위하는 척 하면서 결정적 순간 배신하고 자기 욕심을 가득 채우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상함도 해함도 없고, 서로 살상이나 약육강식이나, 악성이 없고 평화로운 곳입니다(사 11:8, 9) 모든 것이 서로 더불어 화목하게 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넘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으며, 근심과 욕심이 없는 곳, 기쁨과 사랑과 찬양이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2. 새 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두 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길은 사망의 길, 어리석은 길입니다.
그런데 많은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사망의 길로 들어갑니다(사 53:1).
이 길은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길이며(호 10:13), 사망을 가르치는 길이고(렘 2:33), 굽은 길입니다(시 146:9). 그리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마 7:13). 이와 같은 사망의 길은 사람들이 진리에 따르지 못하도록 혼미케 하며,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사단이 크고 넓게 만들어 놓았습니다(고후 4:4).
뿐만 아니라 잠시의 낙이 있습니다(히 11:25). 이 잠시의 낙을 영원한 천국의 낙과 바꾸는 자가 많으며,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잠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반면, 두 번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야웨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길이며(행 11:21),
야웨를 의지하는 길이고(엡 1:13),
야웨를 가르치는 길이며(행 4:2),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행 17:6).
그리고 야웨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길입니다(렘 26:13).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이 길은 좁은 문이고, 협착한 길이라 찾는 이가 적습니다.
이 좁은 문, 새 길은 바로 오직 한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 14:6). 이 길은 거듭나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요 3:1이하).
이 새 길을 가는 자, 주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
재가 됩니다(요 5:24).
이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길이 우리 앞에 열렸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며, 찾는 이가 적으나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발길을 새 길로 돌립시다.
새 하늘과 새 땅, 그곳은 성부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 예수님이 반겨주시며, 보혜사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승리, 기적, 응답, 축복이 쏟아지는 곳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이 넘치는 곳입니다.
이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예수님은 우리의 새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에 가는 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이에 눈물과 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 오직 한 길이며, 새 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삶, 승리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