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 4: 21-31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1 )
4.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4: 21-31 )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은 율법의 얽매임과 복음의 자유함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두 여자를 비유로 사용하였다. 곧 자유 있는 여자로 비유한 사라와 여종으로 비유한 하길을 예로 들었다.
여종인 하갈은 옛 언약인 율법의 상징으로 그녀의 후손(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로 유업을 얻지 못하고 결국 쫓겨난다(30절).
자유 있는 여자인 사라는 새 언약인 복음의 상징으로 그녀의 후손(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로 마침내 유업을 받았다. 이처럼 하갈과 사라의 엇갈린 운명은 그대로 율법과 복음에 적용되었다.
갈 4: 21 내게 말하라 -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었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해당하는 사실이다.
1] 내게 말하라.
우리 교회에도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율법에 속한 교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에 속한 교인들이다.
율법에 속한 자들은 율법의 속박 아래 살며, 복음에 속한 자들은 복음의 자유를 누린다.
2]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본 절의 '율법'(*, 노몬) 역시 4절과 3: 23등과 같이 정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율법적 제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써졌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은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키려는 자들이 아니라 외식에 치우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자들을 가리킨다.
특히 ' ... 하고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론테스'(*)는 '원하다', '지지하다', '좋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델로'(*)의 현재 분사형이다.
과거에 율법을 따랐던 적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현재 의도적으로 율법주의를 따르며 지지하고 있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떠나 율법주의로 떨어지려하므로 바울이 이렇게 문책한다. 그들이 완전히 율법주의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있었다.(1: 6. 4: 11, 17)
3]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는 말이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율법의 성경이 어떠함을 들어 본 적이 없는가? 하는 통탄의 질문이다.
율법과 복음을 비교해 볼 때에 율법은 인간을 속박할 뿐이고 구원을 못준다.
비유컨대, 율법에 속한 자들은 종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율법책(모세 오경 중 창세기 16 장, 21 장)이 자증(自證)한다. 사실이 그러한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찌하여 율법 아래 들어가고자 하는지?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곧 사탄의 미혹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믿고 그 안에 굳게 서 있는가?
갈 4: 22 두 아들 -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
바울은 이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예를 들어 복음에 속한 자와 율법의 속한 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1]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1) 기록된바
이것은 창세기 16 장과 21 장에 있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한 여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 창 25: 1-2 - 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두 자녀만 언급한 것은 그들의 탄생에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서로 판이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약속과 관계된 반면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없이 육신을 따라 난 것이다.
2] 하나는 여종에게서,
'여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는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노예로서의 여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본 절에서 이 단어는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의미하며 나아가 그녀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신분'과 '율법의 신분'을 암시한다.
* 눅 12: 45 -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 요 18: 17 -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 행 12: 13 -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자손이 크게 번창 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 후 10년이 지날 때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제안으로 그의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하신 아들이 아니었다.
3]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후 15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이삭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었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갈 4: 23 육체를 따라 났고 -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1]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육체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사르카'(*)는 수태의 방법이 육체의 질서와 법칙으로 인해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그 아들을 잉태한 어머니의 신분을 시사한다.
이스마엘은
(1) 사람의 육체적 계책(計策)대로 아브라함이 그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인 까닭이다.
* 창 16: 2 -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2) 아브라함의 자연적 체력(自然的體力)에서 난 아들인 까닭이다.
* 창 16: 4 -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여기서 '육체'는 보통 '영'이라는 말과 대조되어 사용되는데 그것은 때때로 평범하고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육체'는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세계와 대조되는 세상의 현실적 삶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 롬 1: 3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 롬 4: 1 -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 고전 1: 26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고후 1: 17 -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 고후 5: 16 -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2]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약속' - 헬라어 '에팡겔리아스'(*)는 본 절에서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관사가 있는 경우에는 명백하게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지만(3: 19), 관사 없이 사용된 본 절의 약속은 이삭이 태어난 원인이며 수단이다.
이 출생의 신비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이 구할 수 없는 가운데서 얻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1)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출생된 까닭이다.
* 창 17: 16 -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 창 18: 10, 14 -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2) 노쇠한 아브라함의 몸에서 초자연적 능력(은혜)으로 출생된 까닭이다.
* 창 18: 13-14 -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창 21: 1-2 -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 히 11: 11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갈 4: 24 두 언약 -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과거의 교훈을 현재 상황에 적용시켜 하나님의 섭리의 일관성을 논증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살펴볼 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1) 이것은 비유니
'비유'를 뜻하는 헬라어 '알레고루메나'(*)는 '알레고레오'(*)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는 '알로스'(*, '다른')와 '아고류오'(*, '말하다')의 합성 동사이다.
그 문자적인 의미는 '다른 뜻으로 말하다'이지만 보통 '우의적(禹意的)으로 말하다' 또는 '어떤 사물을 비유로 설명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비유(Parable)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른 것과 비교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마샬’(mashal)이란 단어가 비유로 번역되었다.
‘마샬’은 비교를 통해 어떤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법을 말하는데 구약에 쓰인 ‘마샬’은 속담(삼상 10: 12, 삼상 24: 13, 겔 16: 44), 잠언(잠 1: 1),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심오한 가르침(욥 27: 1, 욥 29: 1), 우화적인 특성을 지닌 것(겔 17: 2-3, 겔 24: 3-4), 비밀한 말씀이나 불가사의한 말씀(시 49: 4, 시 78: 2, 잠 1: 6, 겔 17: 2), 조롱 섞인 노래(미 2: 4, 합 2: 6)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비유들은 예수님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 목적은 비난자들에게는 알아듣지 못하게 하면서 직접적인 핍박을 못하도록 하기 위함과 하나님의 말씀, 나라를 사람들이 알기 싶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비유로 묘사된 예수님의 말씀과 이야기들은 짤막한 역설적인 교훈(막 7: 17), 잠언(눅 4: 23), 의미가 숨겨진 비유(씨 뿌리는 자. 마 13: 3-9), 짧은 이야기(누룩 마 13: 33. 감추인 보화 마 13: 44), 긴 이야기(어리석은 부자. 눅 12: 6-21) 등이 있다.
여기에서 '비유'란 말은, '풍유(風喩)'로 번역해야 된다. '풍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유와 다르다. 비유는 그 내용의 주요한 부분들만이 어떤 신령한 뜻을 내포한 것이다. '풍유'는 그 내용의 전부가 각각 신령한 뜻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의 가정의 두 여자를 통하여 된 역사적 사건은 본래 예언적인 풍유로서 신령한 뜻을 가진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 기사(記事)들은 어느 것이든지 다 풍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오리겐의 학설은 성립될 수 없다.
칼뱅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의 가정은 그 당시의 참된 교회니 만큼, 거기서 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오늘 우리에게 신령한 모형이 된다.'고 하였다.
(2)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언약'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셔서 세우신 것이다.
그 하나는 '행위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 언약'이다.
행위 언약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인데 그 언약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을 이행하지 못하였지만 폐지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속되며 우리를 정죄한다.
그러나 은혜 언약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을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의를 전가(轉嫁)시켜 주시는 제도가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풀어주며(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구원 문제를 해결해 준다.
2]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것은 앞에 언급된 두 여자의 풍유에 대한 해석이다.
아브라함의 첩 하갈은 율법의 상징인 시내산과 같다는 말이다.
'종을 낳은 자' - 율법을 '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에게 종처럼 속박을 줄 뿐이고 영적 자유는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갈 4: 25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 -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
1]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개역한글의 '하가'라는 번역은 '하갈'의 잘못된 표기이다. 헬라어 사본들과 다른 영역 본들은 한결같이 '하갈'('*, Hagar)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본 절에서 이름과 연관 지어 논쟁이 되는 것은 '하갈'을 시내산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 때문이다. 수많은 주석가들이 '하갈'이라는 이름의 지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본 절을 바울이 사용한 우화로 푼다면 그 의미는 보다 쉽게 상징화된다.
시내산을 하갈 산이라고 불렀든지 '하갈'이라는 말 자체가 시내산을 의미하는 단어인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바울이 본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갈과 시내산 및 지상의 예루살렘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2]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이 말은 그 당시에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로 삼고 있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시고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종 됨은 이방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3]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하갈이 그의 자식과 함께 종이었던 것과 같이, 율법주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곧, 유대교)도 대속(代贖)의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그 교훈을 받은 자들은 그러하다.
갈 4: 26 위에 있는 -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1]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이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그곳은 율법에게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예루살렘이다.
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로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도성이기도 하다.
* 히 12: 24 -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 빌 3: 20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현재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백성이 되며 성령이 친히 이 일을 증명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 계 21: 2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 하늘에서 내려오니 - 승리한 교회의 모습
* 사 26: 1 -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 사 52: 1 -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2) 예비한 것
* 사 61: 10 -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3) 신부 - 남편을 위하여
(4) 단장 - 신부의 모양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성전은 하늘(성경)에서 만들어진 성전이요 하나님께로부터(말씀으로 건축된) 해산된 사람성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아내라고 하였다. 어린양의 아내는 세마포 옷을 입은 자요(계 19:8) 세마포는 성도(聖徒)들의 옳은 행실이니 새 예루살렘성전이란 사도 선지자들과 평강(平康)을 이룬 사람을 말하고 있다.
'새' 역시 앞 절에서 사용된 단어 '카이넨'과 같이 질적(質的)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니 새 예루살렘성전은 땅에 있는 교회성전과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하늘의 예루살렘성전이라는 것을 말하며,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성경(하늘)에서 일곱 날의 진리의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성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예루살렘성전으로 오시어서 땅에 있는 예루살렘성전을 헐어 버리라고 하셨다.
* 요 2: 19-21 -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성전이 창조되면 건물성전이요 교회성전들은 무너지고 사라지게 되면서 새로운 사람성전이요 육체성전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
* 갈 4: 24-26 -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때부터 교회성전에 계시던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居)하시는 사람성전이요 육체성전의 세상이 시작되니 이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셨다(계 21: 3-7).
(5)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① 성도들의 영원한 기업이다.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②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 롬 8: 18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③ 바울이 가 본 셋째 하늘이다.
* 고후 12: 1-4 -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④ 바울이 소망한 하늘의 영원한 집이다.
* 고후 5: 1-2 -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⑤ 아브라함이 바라본 성이다.
* 히 11: 10 -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⑥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처소다.
* 요 14: 1-3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6) 본 절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새' 역시 앞 절에서 사용된 '카이넨'(*)으로 지상의 옛 예루살렘과는 달리 질적으로 변화된 하늘의 예루살렘을 암시한다. 본 절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두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능력과 수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곳은 죄와 사망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물이요 하나님의 거처이다(Morris, Johnson).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할 때 새 땅에 내려왔다. 새 땅에 내려온 것은 영원천국이 아니라 천년왕국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고 했는데 그곳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영원천국에서는 왕 노릇한다는 개념이 없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평등한 관계라 하면 천년왕국은 상을 받고 유업을 누리며 왕 노릇하는 기간이다.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천년왕국에서도 아직은 하여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성안에서의 왕 노릇이 아니라 성 밖에 있는 만국 백성들을 향해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래서 땅에서 왕 노릇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②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본문의 남편과 신부의 비유는 새 예루살렘이 지리적인 것이거나 공간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남편과 신부'의 비유는 하나님과 백성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 계 19: 7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 사 61: 10 -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백성간의 교제를 암시한다(Mounce, Kiddle, Ladd, Johnson).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린양의 신부로 어린양을 위해 단장하였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 2).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진 성이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말하고, 계시록에서는 신부(新婦)를 새 예루살렘성전이라고 하면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여인을 어린양의 아내라고 하셨다.
* 호 2: 19 -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 계 19: 6-8 -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신부(新婦)는 성도(聖徒)들의 옳은 행실(行實)로 만들어진 세마포 옷을 입은 자(계 19: 8)라고 하셨으니 성도들이란 사도 선지자들을 말하며 세마포 옷이란 사도 선지자들의 영과 진리로 만들어진 의의 옷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산된 자요 사도 선지자들의 신앙(진리) 위에 세워진 자다.
* 엡 2: 20-22 -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늘에서 건축된 성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 유 1: 20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 고전 3: 16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요 14: 20-21, 23 -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정리 21: 2, 9-10 )
(1) 여러 견해.
① 지상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것처럼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다.
팀 라하이[Tim Lahaye] : 성은 사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건물과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성은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수도이다. [팀 라하이, 요한계시록 해설, p.557]
② 현 시대는 물론 미래에 있을 이상적인 교회이다.
핸드릭슨[W. Hendriksen] :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분명하다. 구약에서도 교회는 도성으로 상징되었다. …이것은 현재와 장차에 있을 이상적인 교회를 말한다. [핸드릭슨,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246]
③ 영화롭게 변화된 몸으로천년왕국에 들어갈 교회(성도)를 말한다.
래드[G. E. Ladd] : 구속 받은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였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주님과 결합하게 된다. 하늘의 예루살렘, 곧 새로운 세계에서의 거주지 또한 신부로 비유되었다. [래드, 요한계시록, p.360]
렌스키[R. C. H. Lenski] : 신부는 모두 영화롭게 된 성도들로 구성된 거룩한 무리다. 신부는 재림 후에 나타난다. [렌스키, 성경주석 계시록, p.497]
(2) 저자의 견해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교회가 어린 양의 신부로 단장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내려온 성은 천년왕국에 입성할 교회의 모습이다.
① 본서의 내증으로 입증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 - 계 21: 2.
지상의 큰 성 바벨론 : 하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
② 그리스도와 교회의 완전한 연합으로 입증된다.
새 예루살렘의 진정한 의미는 장소나 지리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소개하려는 데 있다.
③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말한다.
⒜ 재림 직전의 모습이다.
⒝ 이 세상은 두 교회가 공존할 수 있다.
⒞ 그러나 천년왕국은 공존할 수 없다. 에덴동산이 좋은 예다.
⒟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은 어린 양의 신부로 그리스도와 왕 노릇해야 한다.
④ 두 성을 대립시켜 바벨론을 철저하게 멸망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5) 믿음의 정상에서만 볼 수 있다.
⒜ 음녀는광야에서 보았다.
* 계 17: 3 -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② 그러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 계 21: 10 -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③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대면한 것같이
* 출 19 장 이하 -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④ 에스겔도 높은 산위에서 회복된 성전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았다.
* 겔 40: 1-4 -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⑤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 마 17: 1-8 -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 막 9: 1-8.
* 눅 9: 28-36.
2] 곧 우리 어머니라.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전통 사본)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은 신약 교회를 가리킨다.
신약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복음 전파를 통해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또 구원 받은 영혼들이 교회에서 양육함을 얻기 때문이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의 아들 이삭의 차이는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이다. 유대교는 육신적 아브라함의 자녀들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요 복음의 자유를 가진 자유자들이다. 우리에게는 성령 안에서 받은 의와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가 있다.
갈 4: 27 홀로 사는 자 -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
1] 기록된바
'기록된 바' - 바울은 본 절에서 사 54: 1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를 선포하고 영적인 평화의 상태가 도래할 것을 묘사하면서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과 믿음의 자녀들이 핍박자들의 고난을 물리치고 믿음의 자녀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한다.
* 사 54: 1 -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잉태하지 못한 자', '산고를 모르는 자', '홀로 사는 자'는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홀로 사는 자란 말의 뜻을 알면 그 위의 두 어귀의 뜻도 알게 된다. 홀로 사는 자란 말은 '광야'를 말하는데, 이것은 자식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본 절의 인용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포로 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두고 예언한 것이다. 곧 포로 된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같이 취급되었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백성으로 여김이 되었다. 그러나 포로 된 자리에서 해방되어 광복(光復)의 시기가 있을 것이었다.
이사야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겸하여 장차 이방인들이 많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것도 포함시켜 예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된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기지 못하던 이방에서 앞으로는 무수히 나오게 되어, 그 수효가 남편 있는 자(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스라엘)의 자녀보다 더 많겠다고 함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결국 신약 교회를 가리킨 것이다. 바울은 앞 절에서 우리 어머니란 말로 이 예언의 성취를 상징하였다.
3]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홀로 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무'(*)는 '과부된 자'라는 뜻으로 남편 잃은 과부의 고독하고 불행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 구절이 이사야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하는 바, 바벨론에 포로 된 유다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90세가 넘어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서술한다.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란 직접적으로는 자손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의 어머니 사라(26절)를 통하여 복음을 주시며, 그 복음으로 교회가 크게 확장된다는 계시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교회의 확장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다.
* 롬 14: 11 -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 빌 2: 9-11 -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한편 이 말이 꼭 이방인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유 하는 여인이 낳은 아들 중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분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태어난 모든 양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