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장9-16] 이웃을 향해 나타낼 덕목들
9-11절: "사랑은 거짓(위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십시오(9). 형제에게 애정을 보이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먼저 존경하고(10), 열심을 가지고 게으르지 말며, 성령으로 타올라 주를 섬기십시오(11).“
* 참된 사랑 - 거짓이 없음(9(상))
9절에 나오는 "사랑"은 헬라어로 "아가페"라는 말입니다. 아가페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성이나, 친족, 또는 친구간의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공동체 내에서 나타내야 할 성품이 아가페(사랑)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가페가 갖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아가페는 "거짓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없다고 번역된 말(아뉘포크리토스)은 원래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바울 당시에 헬라 극장에는 배우들이 자기 배역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습니다. 이 경우에 배우들은 자기가 쓴 가면 때문에 자신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나 위선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가페는 위선이나 거짓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를 속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이 참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사랑은 거짓이나 위선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거짓이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러한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짓이나 위선을 버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함(9(하))
바울은 아가페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며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잠언서 기자는 (잠 6:16-19)에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일곱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악을 꾀하는 마음, 악으로 달려가는 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그리고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악을 미워합니다. 또한 아가페는 적극적으로 선을 사랑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악을 미워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선을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며 선한 일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말 성경에 "속한다"고 번역된 말(콜로메노이)은 원래 "아교풀로 붙여서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선을 가까이 하되 선과 하나가 되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참된 사랑은 거짓이 없고 진실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가까이 합니다.
* 애정(10(상))
바울은 성도들이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필라델피아)은 형제간의 사랑을, 그리고 "우애한다"는 말(필로스토르게)은 "부모나 친척 같은 혈연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개의 말은 혈연 관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성도들은 한 피를 나눈 가족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같은 성령을 가진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가족처럼 생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 존경(10(하))
또한 바울은 성도들에게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교만하지 말고, 서로 남을 존경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남이 존경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남을 존경하고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먼저 자신을 낮추셔서 죄인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도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존경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에서 수많은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겸손과 존경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 열심(11)
바울은 성도들에게 "부지런하되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해야 하며 절대로 게으르면 안됩니다. 또한 성도들은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맹목적인 열심은 부작용을 부를 수 있지만,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뜨거운 마음과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열심을 품고"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영으로 불타 오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타오른다"는 말은 '물이 부글부글 끓어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길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도들은 주님에 대한 열심이 식어집니다. 이러할 때에 성도들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주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차갑게 식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지금 성령충만하여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인내를 보이고, 꾸준히 기도하기를 계속하고"
* 소망, 기도, 인내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부탁했습니다(12). 이 3구절의 핵심은 "소망", 즉 주님의 재림과 그 영광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입니다(5:2, 8:24-25 참고). 이 소망은 우리들에게 변하지 않는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 소망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환난을 겪고 기도하며 견뎌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13절: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는 일을 힘쓰십시오."
* 관대함, 손님 대접
바울은 성도들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합니다(13(상). "공급하라"는 말(코이노눈테스)은 "사람들의 필요와 고난을 함께 나누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형제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한다는 말은 성도들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코이노니아"(교제)는 매우 관대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실제로 "모든 물건까지 서로 함께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행 2;42 참조). 그들은 아무도 자기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현대 교회도 이러한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13(하)). 우리말 성경에 "힘쓰라'고 번역된 말(디오콘테스)은 원래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하고, 교회를 방문한 손님들을 잘 대접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필라델피아"(형제간의 사랑")를 보여야 하는 동시에, 낮선 손님들에게는 "필록세니아"(낯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교회는 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 당시에 손님 대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여관이 거의 없었고, 안전하지 못했고 매우 불쾌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행객들에게 자기 집을 개방하여 손님들을 대접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이 일을 매우 강조했습니다(딤전 3:2, 딛 1:8). 오리겐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낯선 사람이 우리에게 올 때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찾기 위해 주의 깊게 알아보고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선가 머리를 가릴 지붕 하나 없이 거리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게 해서는 안된다"(크랜필드의 로마서 주석, 제 2권 p.640).
14절: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 선의
바울은 "너희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14).
박해자를 축복하라는 명령은 기독교적 사랑에 필요한 도전입니다. 서로 축복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비는 일이고, "저주"는 악한 일이나 해로움을 기원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을 저주하는 자들까지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선하게 대해주어야 합니다. 이 명령은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이었습니다(마 5:44, 눅 6:28 참고).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십시오."
* 공감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고 말합니다. 사랑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나 고통과 관계없이 나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형제들과 동일시하며,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형제들의 삶과, 웃음과 눈물에 대해 깊이 관심을 보이며, 그 삶과 웃음과 눈물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16절: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높은 일을 생각하지 말고, 낮은 자리에 처하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지 마십시오."
* 조화와 겸손
또한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15(상)). 이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서로에 대해서 같은 것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같은 생각을 갖고 뜻을 합해서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후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또같이 "마음을 같이 하여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했습니다(빌 2:2). 이러한 권고들은 성도들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새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공통성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16(하)). 우리는 교회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남보다 더 높이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위나 계급, 또는 신분, 학력, 재물 등에 따라 스스로 사람들을 구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과 자유롭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에 대해 생색을 내려하지 말고, 마음을 낮추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참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기독교적 사랑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분별력이 있고, 애정이 있으며, 서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열심히 일하고 참을성이 있어야 하며, 관대하면서 손님 대접을 잘하고, 친절하면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조화와 겸손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서로 사랑한다면, 교회는 더욱 더 행복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령을 통해 사랑의 힘을 공급받을 때에 효과적으로 실행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