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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빼앗겨가는 해방구
바당바위는 사방 어느쪽에서 보나 빼어나게 생긴 바위 봉우리였다. 산줄기 위에 우뚝 치솟은 그 모습은 바위의 무게감으로 장중했으며, 위로 뻗치는 기상으로 장쾌했고, 군더더기없는 담백함으로 수려했다. 그 바위 봉우리는 여러 개의 바위 덩어리들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봉우리 자체가 하나의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였다. 그 바위는 이십 미터 이상의 높이로 직립상태를 이루며 치솟아 있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바위가 산위에 그냥 덩그렇게 놓인 형상이 아니고 그 뿌리를 산속 깊이 박아 아랫부분과 유연하게 연결을 이루어 자연스러운 조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 벼랑바위 사이를 어렵사리 타서 위에 오르면, 거기에 또 하나의 경이가 펼쳐져 있었다. 삼백여 평을 헤아리는 그야말로 넓은 "마당"이 질펀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무슨 조화인지 바위가 평평해서 된 "바위마당" 이 아니고 흙으로된 "흙마당"이었다. 그리고 바위는 담을 치듯 가장자리를 따라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넓은 바위가 흙을 담고 있는 격이었다. 물이 있는 곳에 고기 있는 것이 자연의 철칙이듯이 그 흙에도 갈대, 소나무, 잔디, 풀 같은 것들이 뿌리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당바위"는 살빛이 하얗고 그지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흙이 또한 인간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이 명당으로 소문나 오랜 세월 그 언제부턴가 묘 하나가 통명산을 건너다 보는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두 개도 아니고 꼭 하나인 그 묘는 인근 마을사람들의 손으로 무수히 파헤쳐져 왔었다. 그런데도 다시 보면 또 그 자리에 봉분이 솟아 있고는 했다. 그 누구도 상여가 산으로 올라간 것을 본 일이 없었고, 시체를 넣은 관이 그 드높은 벼랑바위를 타고오르는 것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괭이며 삽을 가지고 마당바위로 치달아오르는 것은 가뭄이 심하게 들어 논바닥이 짝짝 갈라지고, 개울이 말라 붕어들이 배를 하얗게 까뒤집는 해였다. 비를 기다리다 못해 나락이 타들고, 굶어죽게 될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문득 마당바위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곧 누군가가 또 마당바위에 묘를 썼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마당바위를 치달아오른 사람들은 으레 봉분 큼직한 묘를 발견하게 되었고, 분노한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그 묘를 파헤쳐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기우제를 지냈다. 그 자리는 명당인 것이 분명했지만, 사람의 묘를 써서는 안 되는 명당이었다. 그 자리에 묘를 써비리면 하늘에서 내리는 혈을 끓는 것으로서, 그 피해는 백아산 언저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어 있었다. 묘를 그렇게 파헤쳐버려도 어느 때 한번 주인이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또, 그 묘에서는 뼈들이 나오기는 해도, 썩어가고 있는 시체가 나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이상스러운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몰래 도둑묘를 쓴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낼 리가 없는 일이었고, 그 깎아지른 바위 위로 관을 옮길 수 없는 일이니까 집안의 오래된 묘를 이장시키는 방법을 썼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밤중을 틈타 묘를 쓰는 사람들을 꼭 어느 한 집안의 소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전혀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명당에 묘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았던 것이다.
마당바위는 묘를 쓰는 데만 명당이 아니었다. 빨치산에게나 토벌대에게나 그것은 천연적인 망루고 초소였다. 백아산지구에서 그것을 빼앗기자 토벌대는 그곳에다 곧바로 병력을 배치시켰다. 그 마당의 흙은 텐트치기에도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빼앗겼다는 것은 백아산지구로서는 실질적으로 안방문을 다 열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감시를 받았고, 심리적으로 심장을 빼먹혀버린 것 같았고, 상징적으로 백아산지구가 없어져버린 것 같았던 것이다. 실질적 피해를 없애고, 심리적 불안감을 없애고, 상징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당바위를 다시 뺏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차례나 공격을 감행해 마당바위를 다시 차지했다. 그러나 토벌대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세 번째 싸움에서 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거기에 맞서 빨치산들은 네 번째 공격을 준비했으나 실행에 옮길 수가 없게 되었다. 토벌대들은 남아있는 해방구 반을 마저 없애고 말겠다는 듯 지난번 장마 때의 공격처럼 막강한 병력과 화력을 동원해 밀어닥쳤던 것이다.
박격포탄이 제멋대로 날아들어 해방구를 뒤집어엎고 있는 속에서 빨치산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일단 배수진을 친 곳은 해방구와 천연경계를 이루며 곡선으로 길게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들의 고지들이었다. 백아산보다 낮은 그 봉우리들에 빨치산이 붙인 이름은, 해방구의 무등산 쪽 입구로부터 따발고지, 폭탄고지, 승리고지, 강철고지, 인민고지 등이었다. 그 고지들로 물러선 것이 박격포탄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일단 해방구 전체를 적에게 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철고지에 배치된 조원제는 멀찍하게 솟아 있는 마당바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하늘 배경삼아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우뚝 솟아 있는 마당바위는 유난히 그 모습이 뚜렷하면서 말쑥해 보였다. 역시 마당바위는 멋들어지고, 몇 차례씩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은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마당바위를 빼앗긴 지는 오래고, 이제 반 남았던 해방구까지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파악된 일이었지만 토벌대들은 군경이 합동으로 작전을 펴면서,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각 지구를 차례로 돌아가며 공략해대고 있었다. 그건 이쪽의 병력 소모를 꾀하면서, 해방구를 파괴하려는 이중작전이었다. 적들의 그 집중화된 공격에 각 지구들은 어찌할 수 없이 많은 피해를 당해가고 있었다. 역시 군인들이 가세된 화력전은 그 위력이 만만찮았던 것이다.
박격포 공격이 뜸해지고 있었다. "어이, 쩌어그 잠 보소." "잉. 보고 있네." "영판 많은 갑는디?" "아매 그런 감마. 줄줄이시." 긴장된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조원제는 고개를 돌려 무등촌 쪽을 바라보았다. 토벌대들이 멀리서 밀려들고 있었다. 많은 부대가 일제히 몰려 들면서 그들은 길이고 밭이고를 가리지않고 무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논만은 피하는 것은 물 때문이었다. "저런 개녀러새끼덜, 밭농새 다 망치네웨." "적성마실 것덜 농새딘 저것들이 머시가 아까울 것이여." "허기넌 그려. 해방구 마실사람덜도 저 새끼덜언 다 빨갱이로 몰아때리니께." "잡새끼덜, 참말로 느자구웂는 인민에 적이여." 이런 수군거림이 또 들렸다. 입을 꾹 다문 조원제는 눈으로는 몰려오고 있는 토벌대들을 보면서, 귀로는 대원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적들은 해방구 안에 있는 마을들을 적성마을이라고 했고, 마을사람들을 적성분자라고 해서 빨치산과 똑같이 취급했다. 그리고 해방구에 가깝거나 빨치산의 영향력이 미치는 마을들을 통비마을이라고 했고, 그 마을사람들을 통비분자라고 부르며 불온시하고 불신했다. 적성마을 사람들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히면 살해되었고, 통비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의심받고 걸핏하면 잡혀가 혼쭐이 났다. 그런 실태를 환히 알고 있어서 해방구 사람들을 진작 승리고지와 인민고지 너머 골짜기로 완전히 피신시켜버려 마을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지난번 장마 때의 전투에서는 피신시키는 것이 늦어져 꽤나 많은 마을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그때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 반 남은 해방구로 피해와 투쟁인민이 되었다. 적들의 용어로 적성마을 사람들은 빨치산에게 세금이나 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희들 마음대로 정한 통비마을 사람들은 그 고초가 딱하기만했다. 그렇다고 지구들이 그들까지 보호하기는 어려웠다. 조원제는 그들이 안됐다는 생각은 언제나 버릴 수가 없었다.
앞장선 토벌대들이 마을을 수색해대는 것이 아까보다 조금 가깝게 보였다. 토벌대가 처음나타났던 지점에서는 계속해서 병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조원제는 입술을 물며 그 수를 어림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만으로도 이쪽의 두 배는 될 듯싶었다. "워메, 쩌것 불질리는 것 아니라고!" "긍마! 쩌런 잡녀러새끼덜이 금메!" "쩌것얼 워쩐다냐! 요리 산몽뎅이서 보고만 있을 챔이여?" "저리 마실마동 꼬실라뿔게 냅둬? 글먼 해방구 지절로 욼어지는 것이제." 조원제는 옆의 목소리가 커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술렁거림을 좌우를 살피며 파악했다. 토벌대들이 첫 번째 마을에서 불붙인 짚단들을 들고 오락가락하는 것이 보였다. 조원제는 입술을 더 세게 물며 숨길을 다잡았다. 증오가 뻗쳐올랐다. 가슴이 화끈하게 뜨거워졌다. 그는 집을 태우는 것을 볼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증오가 치솟아 올랐다. 빨치산의 씨를 말린다며 산을 태우는 것까지는 보아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집까지 무작정 태우는 것은 사람을 무작정 죽여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증오의 불기둥을 솟기게 했다. 인간의 역사가 뭔지도 모르는 새끼들! 인간이 왜 평등해야 하는지를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새끼들! 악랄한 반민족세력에게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날뛰는 새끼들! "중대별로 돌격대 다섯 명씩 긴급 차출! 중대별로 돌격대 다섯 명씩 긴급 차출!" 연락병이 다급하게 반복을 하고는 다음 중대 쪽으로 달려갔다.
조원제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툭 트이는 것을 느꼈다. 중대장을 찾았다. 중대장이 벌써 이쪽으로 빠르게 오고 있었다. "싸게 조직혀주씨요." 중대장이 말했다. "하먼이라." 조원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과 작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과 책임이 정치일꾼의 임무였다. "동무덜, 싸게 일로 모이씨요!" 조원제는 좌우를 휘둘러보며 중대원들에게 말했다. 중대원들이 신속하게 모여들었다. "동무덜, 시방 동무덜이 다 보고 있대끼 적덜언 인민의 집얼 불질르고 있소. 인민해방얼위해 나슨 우리가 워찌 저런 만행얼 보고만 있겄소. 나가서 쳐부셔야 헙니다. 당은 영웅적투쟁에 나설 돌격대럴 조직헙니다. 다섯 명 자원혀주씨요!" 조원제는 박진감 넘치게 짧은 선동연설을 했다. 선동연설은 행동을 촉발시키고, 용기를 북돋우는 힘을 발휘해야 했다. 그건 문화부중대장의 책임이고 능력이었다.
"여그요." "나요." 여기저기서 대원들이 일어섰다. "다서, 되얐소. 남은 세 대원은 앉으씨요." 조원제는 다섯 명을 중대장에게 넘겼다. 중대장이 다섯 명을 인솔하고 급히 연대장 쪽으로 이동해갔다. 중대원들을 재배치시키고 조원제가 막돌아서려는데 강경애가 다른 남자대원들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강경애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조원제도 웃어 보였다. 강경애는 조원제에게 은근히 누나 노릇을 하려 들었다. "조 동무넌 얼굴도 여자맹키로 이쁘장허고 나이도 나 동상뻘로 쪼깐헌디, 워찌 그리 연설도 야물딱지게 잘허고, 당이론도 전등불 키대끼 그리 훤헌지 몰르겄소이. 허기넌 나가 실답잖은 소리제. 호남 천재덜만 뫼인다는 서중학교 댕겼당께 비문허겄어. 나헌테 조 동무겉이 똑똑헌 동상이 한나 있었으면 똑 좋겄는디이?" 강경애는 어느새 말도 편안하게 놓고는 살살 웃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해버리면 당장 누나, 동생이 맺어질 판이었지만 조원제는 웃어넘기고 말았다. 산에는 해방투쟁을 하려고 들어왔지 의형제나 맺으려고 들어온 것이 아니었고, 또한 그런 행위는 당규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전사와 전사의 사이에 상호 신뢰와 존경으로 대등관계를 유지하며 인민을 위해 몸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문화부 중대장으로서 그런 엄연한 규정을 어기고 사적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원제는 원칙을 위배되는 일은 스스로도 하지 않았고, 다른 대원들에게도 엄격했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대꼬챙이"란 별명을 영광스럽게 알았으면 알았지 조금도 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대장 이태식마저도 단둘이 있게 되면, "아익, 자네넌 다 존디 그눔에 원칙 너무 따지는 것이 탈이여. 시상 몰르고 젊어논께 그런 갑는디, 그리 땁땁허게 허덜 말고 헹펜 바감스로 살살 혀, 살살" 하고 충고했다. "허먼, 나보고 수정주의자가 되라 그것이요?" 조원제의 정색을 한 대꾸에 이태식은 그만 쥐업가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강경애의 호의는 좋았지만, 그 호의가 어디까지나 대원간의 상호존경으로 건재하기를 조원제는 바라고 있었다.
"야이 호로개애아덜눔덜아! 여그 무당 아덜 자앙칠봉이가 나간다아-" 컬컬하고 걸직한 목소리가 육자배기가락인 듯 어기차게 터져오르며 징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폭탄고지에서 한 대원이 신바람나게 징을 쳐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원제는 장칠봉이도 돌격대에 자원한 것을 알았다. 장칠봉은 스스로가 목청껏 외쳐대는 것처럼 무당의 아들이었다. 그가 쳐대는 징도 자기 어머니가 쓰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렇게 목청을 뽑아대며 한바탕 징을 두들겨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는 장칠봉이라는 이름보다는 "무당 아들"로 더 유명해졌다. 무당 아들들이 한둘이 아닌데도 그만 유독 무당 아들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는 그 점을 아주 흡족해했다. 조원제는 그가 자신의 비천했던 과거의 신분을 일부러 드러내는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행위는 자신이 천대받고 살아온 저쪽 세상에 대한 보복감의 노출이었고, 자기를 멸시했던 자들을 적으로 맞대하게 된 증오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제 과거의 신분이 오히려 떳떳한 삶의 조건이 된 상황에서 자기를 맘껏 확대하고 싶어하는 보상욕구고, 자기확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다 한군데로 모아져 그를 남다른 투쟁력을 가진 전사로 만들고 있다고 조원제는 생각했다. 그가 소리를 외치며 징을 두들겨대는 것은 제멋대로 아무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장의 허락을 받고 하는 일이었는데, 그의 한바탕 어우러지는 징놀이는 싸움을 앞둔 다른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울리는데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징소리의 여운이 아직 나무숲에도, 대원들의 가슴에도 남았는데 돌격대들은 벌써 조를 이루어 산비탈을 달려내려가고 있었다. 조원제는 나무들 사이사이를 기민하게 빠져나가며 그방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산을 벗어난 돌격대들은 산개한 채 적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적들과의 거리는 아직 꽤 멀었다. 그러나 돌격대의 달리는 속도는 금방금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무질서한 듯 흩어져 달리고 있는 돌격대들을 지켜보면서 조원제는 또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돌격대들은 오륙십명에 불과한데도 이쪽 들판이 돌격대로 꽉 찬 것 같았던 것이다. 그 착각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민간인 열 명과 무장한 병력 열 명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무장병력이 언제나 몇 배로 많아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 열과 시체 열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격대들이 계속 달리면서 총을 쏘기 시직했다. 집 서너 채가 시꺼먼 연기를 뿜어올리며 불길을 싸여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터지는 총소리에 놀라고 당황한 토벌대들이 엎드리고 흩어지고 하며 대열이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토벌대들 쪽에서도 곧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있던 토벌대들도 모두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돌격대들은 일제히 뛰기를 멈추고 은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고 있었다. 토벌대가 돌격대를 향해 질서 잡힌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돌격대는 토벌대가 다가서는 만큼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건 마을에 불을 못 지르게 하려는 방해작전이면서, 적을 산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유인작전이었다. 토벌대들이 갑자기 돌격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돌격대들은 거기에 맞서 기민하게 뒤로 빠지면서 간격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토벌대는 차츰차츰 산줄기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밭두렁이를 타넘고, 논두렁에 은신하고 하면서 뒷걸음질치던 돌격대는 마침내 산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토벌대들은 마을을 두 개나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돌격대의 작전은 보기좋게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토벌대들은 산 아래서 부대별로 공격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분산되었던 돌격대들이 산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조별로 모아져 자기네 고지로 올라붙었기 때문에 토벌대들도 그 고지를따라 부대를 배치시키고 있었다. 토벌대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면서 각 고지에서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조원제는 허리끈을 죄며 마른침을 삼켰다. 토벌대의 수는 어림잡아 이쪽보다 세 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경찰보다 군인들이 훨씬 더많았다. 군인들은 경찰들에 비해 싸우는 방법이 사뭇 달랐다. 군인들은 화력도 셀 뿐만 아니라 과감하고 직선적이었다. 공격과 후퇴가 신속하고 분명했고, 고지공격에도 언제나 정면돌파를 감행했다. 경찰에 비해 시원스럽고 절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쪽 입장에서는 화력의 열세를 더 심각하게 느껴야 했다. 해방구를 놓고 벌어지는 이 싸움은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어느때없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것에서 해방구를 없애고야 말겠다는 적들의 결의를 읽을 수 있었다. 적들이 그렇다면 이쪽에서는 해방구를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더 뜨겁게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들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한꺼번에 병력을 투입해 고지마다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결판을 빨리 내겠다는 공격법이었다. 그건 병력과 화력의 우세만을 믿고 몰아치는 것으로, 힘만 있는 씨름꾼의 우직한 씨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싸움이라는 것이 작전에 앞서 병력과 화력이 우선한다는 엄연한 사실과 함께 그런 공격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우직한 힘에 맞서는 것은 또 하나의 우직이었다. 조원제는 빨치산 전법 중에서 어떤 것이 맞을까를 생각하며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건 보나마나 첫 번째인 적진아퇴였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적을 일단 피하면서 골탕을 먹이고, 상황에 따라 네 번째 전법인 적퇴아진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토벌대들의 모습이 나무와 풀들 사이로 얼핏얼핏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총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숨막히는 총소리들이 갑자기 터지자 산들이 따라서 울었다. 삐웅, 피우웅, 총알 날아가는 소리가 빨치산들의 머리 위에서 직선을 그어대는 느낌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조원제는 왼쪽 팔꿈치를 풀 밑둥과 밑둥 사이에 고정시키며 총을 단단히 잡았다. "지도원 동지, 지도원 동지!" 조원제는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연대 지도원 동지 호출이구만이라." 허리를 반으로 접어 몸을 낮춘 연락병이 단내를 풍기며 말했다. "이, 알겄소." 조원제는 새로운 작전시지라는 것을 직감하며 몸을 일으켰다. "윽!" 서너 걸음을 옮긴 조원제가 입에 가득 차는 비명을 물며 왼손으로 옆구리를 잡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앞으로 휘청 꺽였다가 바로 세워졌다. 그는 옆구리에 불덩이가 닿는 것같은 화끈함과 동시에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지도원 동지! 워째 그요?" 연락병이 조원제에게 황급히 다가섰다. "옆구리가 뜨끔혔는디, 나가 총 맞었으까?" 조원제는 태연한 것도 아니고 놀란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말도 애매하게 하고 있었다. "워디 봅씨다." 연락병이 잽싼 동작으로 조원제의 손을 왼쪽 옆구리에서 떼냈다. "워메, 당혀부렀소!" 연락병의 큰 목소리가 탄식처럼 터져나왔다. 워쪄? 당혀? 근디 나가 워째 요러크름 꼿꼿하게 서 있다냐? 앞뒤로 빵구는 안 난 모양인가? 조원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왼쪽 옆구리르 내려다보았다. 연락병이 옆구리에서 손을 떼냈던 것이 분명한데 어느새 손은 옆구리를 받치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사이로는 새빨간 피가 비져나오며 아랫손가락으로 차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도원 동지, 워쩐 일이시오?" 연락병과 함께 중대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짜잔허게 당혔는갑소." 조원제는 씨익 웃었다. "싸게 환자트로 욂기씨오. 피가 심헌디." "가기넌 가야 쓸랑갑소." "하먼이라. 무장 인계허시고, 얼렁 쾌차허시씨요이." "아, 총!" 조원제는 그때서야 자신이 오른손에 총을 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갑자기 팔이 처져내리도록 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총은 곧 생명이라는 인식으로 입산 이후 단 한번도 몸에서 뗀 일이 없었던 총을 자신도 모르게 그때까지 들고 있었던 것이다. 잠을 자면서도 품고 잤고, 밥을 먹으면서도 어깨에 걸치고 먹었고, 똥을 누면서도 앞에 세워잡고 누었던 총이었다.
총을 받으며 중대장이 경례를 했다. 조원제도 맞경례를 했다. 그 순간, 내가 당하다니! 하는 생각이 가슴을 찡 울렸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기필코 화선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차츰 심해지고 있는 적들의 총소리를 들으며 이를 맞물었다.
조원제는 간호병의 부축을 뿌리치며 일 킬로 남짓 떨어져 있는 골짜기의 환자트까지 혼자 걸었다. 피가 계속 흐르고 있는 옆구리의 통증은 이빨이 빠득빠득 갈릴 정도로 심했지만, 다리의 힘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간호병의 부축을 받는다고 통증이 덜할 리 없었고, 걸을 힘이 있는 이상 혼자 걷고자 했다.
"아니, 이건 참 기막힌 기적이오, 기적!" 옆구리의 상처를 들여다보던 의무과장이 마치 탄성을 지르듯 말했다. 상처를 건드리자 통증을 더 심하게 느끼고 있는 조원제는 상을 잔뜩 찌풀니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옆구리 갈라진 것이 무신 흥해 갈라진 것이랍디여? 기적이게." "그게 무슨 소리요?" 의무과장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었다. "기적이먼 무슨 기적인지 싸게 말이냐 혀줏씨요." 조원제는 통증으로 몸을 비꼬았다. "아 이게 말이오, 총알이 옆구리를 한 뼘 가량이나 뚫고 지나갔는데 말이오, 글쎄 늑막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단 말이오. 이건 천에 하나, 만에 하나도 보기힘든 일이오. 그러니 이게 기적이 아니면 뮛이오." "금메요, 워떤 대원은 연장은 암시랑토 않고 붕알만 똑 떨어져나갔드라는디, 고것에 비허자먼 나넌 기적 같지도 않은디라? 과장동무넌 그 소문 못 들어셨는 게라?" "언젠가 듣긴 들었고. 그런데 말이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아슬아슬하기로 치자면 그쪽이 더 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고환이 없어져버린 성기가 무슨 소용이 있소? 그 사람은 영원히 생식불구자요. 그런데 지도원 동무는 늑막이 안 뚫려 내장이 보호되었을 뿐만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면했소. 그리고 상처는 아물면 흉터만 남을 뿐이지 별다른 후유증은 없소. 이런데 어떤 게 더 기적이오?" "듣고 봉께 그렇구만이라이." 조원제는 고통스러운 얼굴인 채 멋적게 웃었다.
"이건 공산주의자로서 전혀 안 어울리는 말이긴 하오만, 천상 명당집 자손이라고 밖에는더 할말이 없소." 의무과장의 말에 조원제는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기적이란 원래 설명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총상이 그만한 것을 뒤늦게 다행으로 여기며 이상스럽게 몸이 자지러드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기적에 대한 해답이 나왔다. 조원제는 어제께 벗어던져놓은 웃도리를 끌어당겨 옷을 뚫고 지나간 총구멍을 살펴보았다. 총알은 주머니를 뚫고 지나간 뒤에 또 하나의 구멍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조원제는 주머니에 뚫린 총구멍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그는 부산하게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서둘러 그것을 꺼냈다. 반으로 접어진 백원짜리 수십 장에는 옷에보다 훨씬 선명한 총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고장 동무, 어지께 말혔든 기적이 풀렸구만요. 총알이 요 돈 육십장얼 뚫고 나감스로 심이 약해져논께 늑막을 못 뚫분 것 아니겄는가요?"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의무과장은 놀랍고도 희한하다는 얼굴로 돈과 조원제를 번갈아가며 보더니, " 지도원 동무 판단이 맞소. 돈육십 장을 뚫고 나가면서 총알의 힘이 감소하는것은 물론이고 전진 방향도 달라질 수 있소. 돈을 만드는 종이는 특히 질기고 두꺼우니까, 그런데 말이오. 기적은 여전히 남소." 그는 끝말에 힘을 주었다.
"또 남아라?" 조원제는 의아스럽게 의무과장을 쳐다보았다. "왜 하필이면 총알이 그 돈을 관통했느냐 그것이오." "허, 금메요..." 조원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별로 뜻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의무과장이 묻지도 않았지만, 만약 물었더라도 그 돈을 지니게 된 사연을 말하지 않으려고 조원제는 생각했다. 그 내용은 또 다른 기적으로 확대될 확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돈은 자신이 입산할 때 어머니가 마련해준 삼천원이었다. 그 백원짜리 서른 장을 반으로 접어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도 막상 쓸 데가 없었던 것이다. 산속에서만 살다 보니 세월은 가도 돈은 고스란히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산속에서는 효용가치를 상실하고 그저 그림 그려놓은 종이쪽지에 불과한 그것을 왜 내버리지 않고 지니고 다녔던 것인가. 언젠가 써먹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건 "어머니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 어머니의 마음이 생명을 지켜준 것이다... 이런 발상이야말로 비이성적이고 반유물론적이었다.
"이거 아픈 것이 통 가라앉덜 않는디요." 조원제는 계속되는 통증을 견디기가 어려워 처음으로 의무과장에게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미안하오. 진통제가 없어서..." 의무과장은 민망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글먼 과장동무도 고자 의사시요이." "무슨 소리요?" 의무과장이 의아스럽게 조원제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째고 짜고 하는 생활만 해와서 그런지 못 알아듣는 소리가 많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 붕알 웂는 자지나 약 웂는 의사나 머시가 달브냐 그 말이요." "하하하하... 지도원 동무가 어째서 그 나이에 지도원이 됐는지 알 것 같소. 그렇게 다치고도 혼자 걸어오질 않나,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농담을 하질 않나, 어쨌든 그런 정신력이면약이 없어도 곧 회복될 것이오." 의무과장은 아주 흡족해하고 있었다. 조원제는 붕대 위로 피가 밴 상처부위를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며 눈을 감았다. 옆에서는 네 명의 환자가 끊임없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화끈거리고, 욱씬거리고, 쑤셔대고, 비비틀리는 아픔들을 어금니에 물며 어제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가 일천구백오십일년 팔월 십팔일이라는 것을 머리 속에 새겨넣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팔월 하순을 고비로 각 지구들은 해방구를 잃어갔다. 일년 동안 해방구를 발판으로 삼았던 지역확보투쟁이 산악 이동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었다. 그건 군인들이 토벌대로 투입되면서 일어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잃은 것은 해방구만이 아니었다. 병력손실도 함께 겪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해방구를 잃은 것을 패배로 생각하지 않았고, 동지들이 죽고 다친 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들이 해방구를 잃은 대신 저 위쪽 전투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넓게 인민의 땅을 확보해나가고 있다고 믿었고, 자기네들이 다치고 죽는 것만큼 그쪽에서는 인민군 전사들의 생명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한 공통된 인식은 학습과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런 유대감 속에서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해방구를 잃었다는 것은 그 지역을 토벌대에게 완전히 빼앗겨버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과 같이 안전지대가 되지 못하고 불안지대로 바뀌어 지구의 각 조직부서들이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긴 것을 의미했다. 또한 경찰에서도 힘이 모자라 그 지역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는 대한민국이요, 밤에는 인공"이라는 말이 그 지역들에도 적용되게 되었다. 해방구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해도 각 지구의 관할지역이나 조직임무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천점바구의 중대가 후방대원들을 지원하고 있는 사업도 해방구의 상황변동에 따른 것이었다. 천점바구네는 후방부대원들이 굴파기 작업을 하는 동안에 경계임무를 맡고 있었다. 굴파기는 검은 돌덩이들로 뒤덮여 있는 너덜겅 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굴파기는 벌써 사흘밤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 굴은 곡식 저장창고였다.
너덜겅의 어느 부분 돌들을 몇 개 들어내고 땅을 파태려가서 널찍한 굴을 만들었다. 굴내부의 꾸밈은 병기과 비트나 마찬가지였고, 곡식 창고라서 넓이가 한결 더 넓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점 하나는, 곡식창고에는 반드시 사방으로 돌아가며 배수로 깊이 팠다. 곡식에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굴이 완성되면 처음에 들어냈던 돌들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감쪽같이 출입구가 가려졌다. 오래된 돌밭인 너덜겅 아래에다 곡식창고를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하는 돌투성이인 너덜겅이나 비탈지지 않은 곳이 없어서 빗물을 잘 받아낼 뿐만 아니라 아래의 비탈진 땅도 물기를 오래 머금고 있지 않았다.
무슨 용도의 굴을 파든지 제일 큰 애로가 흙의 처리였다. 굴의 위치를 감추기 위해서는 그 주변에 흙은 파낸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언제나 굴을 파는 인원보다 흙을 내다 버리는 인원이 몇 배나 더 동원되었다. 그것도 한 장소에다 쏟는 것이 아니고 사방에다 비료 뿌리듯이 흩뿌려 아예 토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천점바구 중대원들은 그 흙을 내다 버리고 있는 후방대원들을 경계해 주고 있었다. "굴이 영판 큰게비요이?" 외서댁이 천점바구에게 소곤거렸다. "그런갑소." "저리 크게 파서 쟁일 곡식이나 머 있겄소?" "금메요, 가실이 음매 안 남었응께라." "저 일이 원제나 끝나지겄소?" "오늘밤으로 다 끝낸답니다." "여그가 워디짬입니디여?" "몰르는 것이 약이오." "이, 냅두씨요." 외서댁은 "비밀"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들었다. 몰라야 될 것을 아는 것도 병이었다. 남모르는 것을 알고 있으면 입이 놀리고 싶어지고, 입을 놀리면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런 것을 일찍이 생활 속에서 터득한 그녀는 당이 비밀에 붙이고자 하는 일을 알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사실 굴을 파고 있는 후방부대원들조차도 그 위치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두워져서 작업장으로 왔고, 어둠 속에서 작업장을 떠났던 것이다. 모든 비트들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그렇게 철저하게 보안이 지켜졌다. 작업조의 경계를 책임 맡고 천점바구는 요즈음의 돌아가는 형편이 구빨치 시절인 재작년 겨울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겨울이 시작되면서 토벌대들은 맹렬하게 공격을 해대며 산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밤에는 산에서 멀찍이 떨어져 야영을 했고, 날만 밝으면 산을 헤집고 다녔다. 밤에도 길목, 길목마다 매복을 쳐 산과 산을 차단시키는 적극적인 작전을 펼쳤었다. 토벌대는 요즈음에도 그때와 똑같은 작전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병력도 화력도 강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작전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 포위당하는 일이었다. 적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포위당하기가 십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이 매복에 걸리는 일이었다. 숨어서 이쪽을 노리고 있는 매복에 걸려 사상자를 내지 않기란 어려웠다.
재작년 겨울에 비하면 이쪽의 병력도 막강했지만 그러나 토벌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천점바구는 부르르 어깻죽지를 떨었다.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팔월 중순이 지나게 되자 산속의 밤은 자정 무렵부터 서늘하게 변해갔다. 밤이슬을 오래 맞아서 서늘한 느낌이 더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둠 속 멀리에서 풀벌레 소리들이 가늘고 맑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가을이 실려 있었다. 저것덜언 잠도 안 자는가? 그는 문득 생각했고, 그 생각이 싱거워 픽 웃어버렸다. 저것덜 시상에넌 사람 시상맹키로 차등이고 계급이고가 웂겄제? 그렁께 해방투쟁도 웂을 것이고, 근디 워째 저 벌거지덜이 부럽덜 않제? 그려도 사람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낫제. 투쟁혀서 새시상 맹글어내는 맛도 있고. 요 맛얼 머시라고 혀야 될랑고? 꼬신 것도 아니고, 쌈빡헌 것도 아니고, 달치근헌 것도 아니고, 하여튼지간에 사내자석 목심내걸고 한바탕 혀볼 만헌 일이여.
"와따! 인자 봉께로 니 말이 딱 맞아뿌렀다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르든 니럴 술술 책얼 읽게 갤차놓다니, 그 좌익허는 사람덜 참말로 기맥히시! 나가 나이 묵어 나슬 수넌 웂고, 니가 나 몫아치꺼정 싹 다혀뿌러라. 고런 사람덜이 허는 일이먼 나가 인자 딱 믿어뿔란다." 전쟁이 일어나고 하산해서 아버지 이름 석자를 써 보이고, 옆집에서 빌려온 책을 읽어내자 아버지가 무릎을 쳐가며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염상진 대장에게 생간을 대접하기로 했던 것이다.
천점바구는 당원이 되었다는 사실도, 중대장 노릇을 하는 것도, 그리고... 여중학교 나온 여자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아버지에게 다 알리고 싶었다. 백정의 아들은 백정질만 하고 평생을 살다가 죽는것이 아니라 백정의 아들도 이렇게 사람으로 대접받으며 사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다 보여주고 싶었다.
"천점바구 동무, 당은 동무의 입당을 결정했소. 동무가 당원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심사과정에서 다 검토하고 확인된 것이지만 다시 한번 요약하겠소. 당원은 권리를 주장하는 자격이 아니라 의무를 수행하는 자격이오. 당원은 특권을 누리는 자격이 아니라 희생을 앞세우는 자격이오. 당원은 교만을 부리는 자격이 아니라 겸손을 실천하는 자격이오. 그리고 당원은 인민을 위하여 모든 짐을 지는 자격이며, 당을 위하여 마지막 생명을 바치는 자격이오. 이 점 명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투쟁하기 바라겠소." 당원이 되던 날 안창민동지가 악수를 한 채 해준 말이었다. 하늘까지 뛰어오르고 싶었던 그날의 감격과 함께 그 말을 한마디도 틀리지 않게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나날의 투쟁속에서 실천하려고 애써왔던 것이다.
천점바구는 날이 트이기 시작함을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동쪽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어둠만 가득했다. 그러나 어둠 그 뒤편 하늘에 어리고 있는 아슴푸레한 빛의 움직임을 느낄수 있었다. 어둠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은 방향에 따라, 장소에 따라다 달랐다. 다만, 그 정확한 느낌이 말로만 표현이 안 될 뿐이었다. 오랜 산 생활은 그런 것을 다 식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천점바구는 그밖에도 은하수와 북두칠성의 기울기를 확인했고, 풀벌레 소리들이 그쳐 있음을 알았고, 나뭇잎들이 아래서 위로 바람을 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대장 동무, 일 다 끝냈구만이라." 후방부 특무장이 천점바구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알겄소, 날이 새고 있응께 싸게 뜹시다." 천점바구는 총과 함께 어깨를 추슬렀다. 중대원들을 삼등분하고, 작업조도 삼등분시켜 인솔책임을 분담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출발허겄소. 제일 비상선 할매봉, 제이 비상선 미륵봉이오." 천점바구는 "빨치산의 생명선"이라고도 하는 비상선 두 군데를 지적해 주었다. 돌발사태를 당해 대원들이 산산이 흩어지게 되더라도 제일 비상선에서 다시 합류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대원들은 또다시 제이 비상선에서 합류하게 되는 것이었다. 비상선 설정은, 몸에서 총을 떼서는 안되는 것과 함께 모든 행군에 앞서 내려지는 빨치산의 두가지 절대수칙이었다. 그건 곧 항일빨치산의 기본 전략인 이령화정이었고, 그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모여 세력을 형서하는 전법으로 빨치산들은 토벌대의 추격을 쉽게 교란시켜버렸고, 대원들이 부대를 잃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맨 앞에 선 천점바구는 산굽이를 돌아 다음 산굽이로 건너가려 하다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우뚝 멈추었다. 그건 분명 사람 냄새였다. 아니, 그냥 사람의 냄새가 아니라 토벌대의 냄새였다. 몸을 바짝가 낮춘 그는 검지손가락을 입속으로 쑥 밀어넣어 침을 발랐다. 그리고 그것을 꼿꼿하게 세우고 신경을 모았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바람의 방향은 분명 그쪽이었다. 냄새를 잘못 맡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뒤로 수신호를 보냈다. 적정이 있으니 무장병력은 앞으로 나오고, 비무장은 뒤로 빼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네 중대만이 통하는 수신호를 열 가지 이상 가지고 있었다. 그는 건너편 어둠을 유심히 살폈다. 풀숲일 뿐 매복을 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무슨 바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덤 같은 게 있는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산굽이의 사이라는 점뿐이었다. 매복은 거의 자기방어에 유리한 은폐물을 끼게 마련이었고, 중요한 길목의 다리 부근이나 개울둑 같은 데에 많았다. 그러나, 매복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전방에서 분명 냄새가 끼쳐왔던 것이다. 그 냄새는 순각적일 뿐, 다시 맡으려 하면 할수록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천점바구는 중대원들이 다 앞으로 나온 것을 확인한 다음 땅바닥을 더듬어 조그만 돌 몇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한 개를 던졌다. 이어서 두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탕! 타당, 탕!어둠 속에서 총소리가 터져올랐다. "일조, 사격 개시! 이, 삼조, 후방대와 선 잡아라!" 천점바구는 신속하게 명령을 내렸다. 매복인원은 많지 않은 법이고, 비무장부터 뒤로 빼돌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쪽에서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요했던 새벽의 어둠을 양쪽 총소리가 예리하게 찢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적진의 총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적은 수가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적이 이쪽의 수를 알아차리기 전에 작전을 바꿔야 했다. 어물거리며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지끔부터 산개혀서 왼쪽 산으로 붙는다. 산얼 빨딱 넘어스는 것잉께, 출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왼쪽 산으로 흩어지며 뛰기 시작했다. 적들이 잠시 방향을 못 잡는 사이에 산으로 붙고, 그들을 산으로 유인해 비무장대원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산중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총알이 그들에게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동녘 하늘이 희붐하게 트이고, 어둠도 많이 묽어져 있었다. "쫓아라!" "잡아라!" 총소리와 함께 아래서 터지는 소리였다. 그들은 제각기 몸을 피해 가며 산을 치달아오르고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야산을 그들은 금방 넘어섰다.
"왼쪽으로!" 천점바구는 앞장서며 비탈을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이 산등성이에 오르는 동안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두 개의 야산 옆구리를 타고 돌아 큰 산줄기로 접어들어 숨길을 돌렸다. "워메, 외서댁 동무 워쩐 일이다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천점바구는 급히 몸을 돌렸다. "워째 그요?" 어리둥절하고 있는 외서댁의 오른쪽 목덜미와 어깨가 피범벅인 것을 천점바구는 발견했다. 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워디 봅시다, 동무." 천점바구는 별일 아닌 척 외서댁에게로 다가섰다. "워째, 나가 워디 상혔소." 외서댁이 의아해하며 천점바구를 쳐다보았다. 천점바구는 귀를 살펴보았다. 분명히 있어야 할 귓불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와따, 멀 그리 딜다보여? 무신 일 났소?" 외서댁이 짜증을 묻혀냈다. "요것 참, 귓밥이 떨어져나갔소." "귓밥이?" 외서댁이 놀라는 것 같더니 다음순간, "잘되야부렀소. 밥도 안 태이게 혀준 귓밥, 달고 댕기면 머헐 것이요. 무겁기만 허제." 그년 아주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허! 말 한분 요상허요이. 꼭 배짱 씬 남자맹키로." 천점바구는 시무룩하게 말하며 손수건을 꺼냈다. "나야 빨치산잉께." 외서댁은 씨익 웃으며 귀로 가져갔다. "손대지 마씨요. 피가 나고 있응께." 천점바구는 어른 외서댁의 팔을 붙들었다. 외서댁이 귀가 다친 것을 그리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을 천점바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앗다. 팔에 총을 맞고 쫓기다가 나무를 붙들려서 해서야 팔이 말을 안들어 총 맞은 것을 아는 사람도 있었고, 엉덩이에 총을 맞은 채 싸우다가 옆사람이 피를 보고 말을 해서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숨막히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 자기가 다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흔했다.
벌교 장날이었다. 햇발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모두모둠 자리잡은 마을에서마다 장길을 나선 사람들이 읍내로 이어진 길들을 채우고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 돈이 될 물건들을 이고들었고, 나들이를 한다고 삼베옷에는 풀기가 빳빳하게 서 있었다. 농사일로 검붉게 탄 얼굴들에는 그래도 웃음기가 퍼지고, 발걸음들도 가벼웠다. 그러나 그들의 기분은 언제나 읍내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구겨지고 말았다.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경찰들에게 일일이 도민증을 내보이고 검문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자들은 그나마 수월했지만 남자들의 조사는 까다로웠다.
닭이나 돼지처럼 그냥 드러나는 것이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짐들은 다 풀어 보여야 했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는 사람은 무조건 경찰서로 끌려갔다 의심을 사는 경우에는 여자라고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여자들은 낭자머리부터 풀어헤쳐져서 속곳 주머니까지 뒤짐을 당했다. 낭자 속에 빨치산의 연락문을 감추고 있나 해서였다.
검문소는 횡계다리목, 소화다리목, 철길건너목 세 군데였다. 그 세 곳을 막으면 날개를 달고 날아들지 않는 한 읍내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걸리게 되어 있었다. 역이나 철다리아래 선창에는 또 따로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에서는 벌교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지역의 접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판단은 옳은 것이기도 했다. 빨치산들은 분명 장날을 이용해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하고 있었다.
"안녕허심녀? 오늘도 애쓰시는구만이라잉." 등짐을 진 한 사내가 낡아빠져 위에 구멍이 뚫린 밀짚모자를 벗으며 꾸벅 절을 했다. "어 남샌, 그 짐 머시오?" 경찰 하나가 턱짓을 했다. "항시 그 짐이제라. 연지꼰지 폴아갖고 삼베 밖북는 것이야 항시 그 타령이제라이." 그 남자는 변죽좋게 말하며 등징을 벗어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투덜투덜 말을 씹어대고 있었다. "니밀헐눔에 빨갱이덜, 원제나 씨가 몰를랑가이. 고 잡년러 것덜 땀세 순사양반덜 못헐 일에, 우리 장돌뱅이덜 못헐 일. 고것덜얼 이 삶아 대디끼 혀뿌는 무신 방도가 웂을랑가 몰라?" 그 남자가 풀어헤친 짐 위에 회푸대 종이 봉투가 놓여 있었다. 경찰이 짐을 조사하려는듯 허리를 굽혔다.
"요것이 전분에 마씸허셨든, 거 머시냐, 긍께 그 털로 된 물뿌리가 달린 그 기라죽헌 양담배요." 그 남자가 경찰의 귀 가까이 대고 낮고 빨리고 말했다. "어허, 무식하게 털로 된 물뿌리가 뭐요. 필타지,필타." 경찰이 경멸적으로 말하며 그 봉투를 세워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메 말이오. 무식해빠진 장돌뱅이 대그빡이라논께 꼬부랑말언 아무리 들어도 모르겄당께라." 봉투는 어디로 갔는 없고, 경찰은 건성건성 짐을 살피고 허를 폈다.
"이, 인자 자네덜 차례시. 순사양반헌테 절 짚이 허고 싸게싸게 도민증 꺼내여." 그 남자가 짐을 묶으며 뒤에 서 있던 두 남자에게 말했다. 두 남자가 경찰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꾸벅꾸벅 절을 했다. 두 남자의 어깨에는 무명 보자기와 멜빵이 걸쳐져 있었다. 경찰은 두 남자가 내민 도민증을 힐끗 들여다 보고는 통과하라는 손짓을 했다.
"보성 삼베가 당신네덜 톡톡허니 믹여 살리는구만." 경찰이 짐을 지고 일어서는 남자에게 한마디 걸쳤다. "하먼이라, 보성 삼베야 조선시대부텀 명났고, 일본눔덜도 알아주든 명품잉께라. 보성 삼베야 하먼 발 골르고, 바닥 톡톡허고, 올 찬찬하기로 딴 것덜이 당헐 수가 웂구만이라, 원체로 똑별나게 좋아분께 우리가 장사해묵기 쉽코, 그 덕에 처자석 믹에 살리는 것 아니겄는게라." 그 남자는 눈웃음쳐가며 장돌뱅이다운 입담으로 엮어내고 있었다.
"수고허시드라고요이." 그 남자는 허리를 굽신하고 횡계다리목 검문소를 통과했다. 두 남자도 그의 뒤를 따랐다. 앞장선 그 남자는 벌교장을 넘나든 지 오래된 장돌뱅이 남판술이었다. 나머지 두 남자는 그의 조개이면서 동업자였다. 남판술은 여자들의 갑나가는 화장품이며 장신구 같은 것들을 큰 도시에서 받아다가 벌교 같은 데다 먹이고, 작은 도시에서는 그곳의 특산물을 가져다가 큰 도시에 넘기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건 장돌뱅이들이면 누구나 하는 방법이었고, 그가 벌교에서 사모으는 것은 예로부터 이름난 "보성 삼베"였다. 그를 따르고 있는 두 남자는 아침에 빈목으로 장터에 들어섰다가 저녁에는 부피 큰 삼베짐을 지고 장터를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장터 거리에 낯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경찰들하고도 어물쩍 잘 통하는 장돌뱅이들만이 아니었다. 남판술은 백아산지구의 후방부 특무장이었다. 그가 후방부의 실무책임자인 특무장이란 직책을 맡게 된 것도 장돌뱅이였기 때문이다. 그 직업상 각종 물건조달이 용이했고, 행동반경이 넓었던 것이다. 그는 화순장에서 벌교장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산만 타고 다니는 선요원들이 해낼 수 없는 정보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사하게 장터로 들어섰다가고 해도 행동은 여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장터 바닥 그 어디에 가시의 눈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맘놓고 사들일 수가 없었다. 남자 고무신을 서너 켤레 샀다가 끌려가는 여자도 있었고, 소금이나 석유를 많이 샀다가 조사를 당하는 경우도 숱했다. 일단 빨치산들이 필요로 할 듯한 물건들을 많이 샀다 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형사들이 덜미를 잡아챘다.
남판술이 장터마다 돌며 눈독을 들이는 것은 그런 부피 크고 표나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가 약이고, 둘째가 성냥이고, 셋째가 칼리비료였다. 약은 갈수록 필요한데도 갈수록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606호니 페니실린 같은 고급약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손쉽던 아까징끼(머큐로크롬)며 다이야찡 가루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차츰 품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다 칼리비료를 배급중단시킨 것과 마찬가지의 통제라는 것을 그는 환히 알고 있었다. 조개껍질에 두꺼비기름 담아 만병통치약이라고 외쳐대는 뜨내기 약장수한테 귀띔을 하면 다음장날 다이야찡가루를 몇 봉지 구해 오기도 했고, 엉뚱하게 쇠전 옆에서 뒷거래되는 칼리비료를 살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의무과에서는 아까징끼와 다이양찡 가루만이라도 빨리빨리 구해달라고 매일같이 성화였다. 그 다급하고 애타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낫질을 잘못해서 어디를 벤 것도 아니고 총을 맞거나 폭탄에 맞아 당한 부상에 약이 없으니 의무과에서 타는 속이 어떨지 알만했던 것이다. 다리에 박힌 파편을 꺼내는데 마취약이 없어서 소주 한자 먹여 팔다리를 묶어놓고 생살을 찢어대니 그 악쓰는 소리가 온 골짜기를 울려대 새들이 놀라 다 날아가버리더라는 종류의 이야기는 수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남판술은 자기가 약을 못 구해 살릴수 있는 대원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박감에 눌리며 장마다 눈을 부릅드고 다니는 판이었다.
"어이웨, 나가 한바쿠 삥 돌고 올 꺼싱께 장시 자알 허소이." 남판술은 옆의 장수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야아, 걱정 마시고 올 고르고 쓸 만헌 물건 나왔는가 싸게 걸음허셔야제랴." 부하 하나가 굽신거리며 말장단을 맞추었다. "아, 자네넌 말혀! 싸게싸게 안 따라나스고, 국밥 묵은 지 을매나 되얐다고 폴세 배거쪄부렀능가." 남판술은 성질을 돋우듯 다른 부하에게 목청을 높였다.
"아니구만이라, 아니어라." 다른 부하가 서두르는 몸짓으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남판술은 느릿느릿 걸으며 갖가지 물건들을 눈빠르게 살펴나가고 있었다. 장터의 물목자리를 환히 알고 있는 그는 왼쪽 장마당으로 발길을 하지 않았다. 거기는 자리잡힌 상점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고, 진짜로 장이 서는 곳은 극장으로 통하는 큰길과 그 뒷길이었다.
남판술은 싸전이 서고 있는 길로 꺾어들었다. 그 옆의 삼베를 주로 하는 포목전이었다. 싸전이 됫박쌀을 가지고 나온 여인네들로 붐볐다. 그것을 장수들이 사모아 다른 지방으로 넘겼다. 뒷짐을 진 남판술은 여인네들이 안고 선 삼베를 힐끗 보기도 했고, 필을 풀어놓고 흥정이 오가고 있는 데를 기웃하기도 하면서 느리게 걸음을 읆기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여인네들중에 가리마 왼쪽 머리에 삼베 상장을 꽂고, 남색 보자기를 든 여자가 있었다. 남판술은 그 여자에게로 다가섰다.
"벨 폴라고 나왔는갑는디, 워디 귀경 잠 헙씨다. 근디 이 삼복에 무슨 상얼 당혔다냐..." 그의 끝말에 여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야아, 귀경허씨요. 냄편이구만이라." 여자가 보따리를 풀어헤치며 뒷말을 낮고 빠르게 해치웠다. "워디 보자아아, 보오성 삼베라고 혀어서어 다 삼베넌 아닌 께로오오, 워디 보자아아..." 남판술은 가락을 늘여가며 삼베를 풀어 높직하게 들고 바탕을 요리조리 들여다보고 있었다.
"볼 것 웂소. 복내면서 짜낸 것잉께." 여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두 번째 암호까지 확인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값을 흥정하는 몇 마디 말이 오가고 나서 남판술은 돈을 꺼내 세기 시작했다. 돈을 받아든 여자는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다시 세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총총히 사라져갔다. 남판술은 다시 걷기 시작하여 극장 뒤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겹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는안쪽에서 쉰 목소리가 목청을 뽑고 있었다.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네하고 닭을 푹푹 과서 그 진짜배기만 쪽 뽑아 만든 만병통치약으로써..." 또 만병통치냐 싶어 남판술은 돌아서버리려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떠돌이 약장수가 분명한데 제법 규모 크게 패거리가 셋이었고, 못보던 얼굴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가까운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염치불고하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가까스로 약장수 옆에 다가선 남판술은 하는 일 없이 손톱을 깨물고 앉아 있는 나이 많은 남자를 질벅였다. "봇씨요. 우리아덜이 낫으로 다리럴 많이 비었는디, 아까징끼허고 다이야찡 가리 포는 것웁소?" "이 양반 뱃속 편네. 그런 약품 취급했다가 우리 콩밥 먹는 것 모르오? 그런 약품들 금지하는 덕에 우리가 먹고 산다는 거나 아시오." 약장수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정말 이 새끼들이 씨를 말리기로 작정했구나! 남판술은 고개를 젖히고 훅 한숨을 토해냈다. 뭉게구름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는 푸른 하늘이 그에게는 까만 어둠으로 보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