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감상 (18)
논개(論介) -변영로(卞榮魯:1897-1961)-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작품 감상하기
이 시는 변영로의 대표작으로 의기(義妓) 논개를 기리는 글이다. 논개는 임진왜란 (壬辰倭亂)때 경남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文助]』을 끌어안고 남강(南江)에 몸을 날려 우리의 역사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여인이 되었다.
이처럼 이 시는 <논개의 절개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시구(詩句)와 연결해서 ‘거룩한 분노’는 ‘왜적에 대한 민족적 분노’를 암시하며 불붙는 정열이란 물론 ‘조국애, 민족애’를 뜻한다. ‘강낭콩 꽃’은 ‘푸른 남강’을 뜻하며 ‘양귀비꽃’은 논개의 짧은 생애를 상징하고 있다.
‘푸른 그 물결’은 ‘진주의 남강’을 의미할 수도 있고 ‘역사의 흐름’을 뜻하는 ‘중의법(重義法)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붉은 마음‘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말하여 '아미(蛾眉)‘란 자의(字意)로는 ’누에 모양의 눈썹‘이니 곧 ’미인의 눈썹‘을 말함이다.
‘그 석류 ~ 입 맞추었네’의 표현으로 ‘논개의 순국(殉國)을 아름답게 형상화(形象化)하고 있다. ‘흐르는 ~ 푸르리니’는 ‘민족과 역사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은유(隱喩)이다.
▣변영로 시인에 대하여
시인 변영로의 호는 수주(樹州)이고 경기도 부천 출생이다. 중앙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 중퇴한 뒤, 중앙기독청년회관(YMCA) 영어반을 6개월 만에 수료하고 17세 때, 영시《코스모스》를 발표하였다. 1918년 중앙고보 영어교사가 되어, 1919년 삼일운동 때는 YMCA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였다.
1920년《폐허》의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諧謔)이 넘치는 수필과 발자크(프랑스의 소설가)의 작품 등을 번역해서 발표하였다. 1924년 일제하의 민족적 울분(鬱憤)을 노래한 시집《조선의 마음》을 내놓았고, 193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산호세대학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신가정(新家庭)》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잡지《신가정》의 표지(表紙)에 손기정(孫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健脚)’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總督府)의 비위(脾胃)를 건드려 압력(壓力)을 받아 회사를 그만두기도 하였다.
1927년 ‘우리의 것’을 알아보기 위해 백두산에 올라가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정계비(定界碑)》, 《천지(天池)가에 누워》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49년 제1회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 한국대표로 참여하였고 1953년 ‘대한공론사’의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명정(酩酊=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함) 40년>, <그 때가 언제나 옵니까?> 등이 있다. 1981년 3월 그의 20주기를 맞아 새로 발견된 그의 작품까지를 수록(收錄)하여《수주 변영로 문선집(樹州 卞榮魯 文選集)》이 출간되었다.
변영로 시인은 한 때 우리나라의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卞榮泰)씨의 실제(實弟: 친동생)로서 그의 시문(詩文)이 수려(秀麗)하고 고풍(古風)스런 멋을 풍긴다. 아마도 한학(漢學)을 배경으로 신교육을 받아 동서양의 고전(古典)을 익힌 그 토대(土臺)가 그의 문학의 묘미(妙味)를 결정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미 13살, 14살 나이에 한시(漢詩)를 지었으니 한자문화에 녹아 있는 정취(情趣)를 수득(修得)하였을 것이고, 신교육을 받았으니 서양문화의 맛과 멋에도 무지하지 않았으리라. 특히 그는 영어에 소질이 있어 16살 때 “코스모스”(Cosmos)라는 영시를 썼는데, 캐나다 출신 선교사로서 한국문화와 역사 일반에 박식(博識)했던 기독교 선교사 ‘게일’을 놀라게 했다 한다.
4년 후, 이 시는 1918년 6월 <청춘지(靑春誌)>에 게재(揭載)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첫 시작(詩作)의 발표였다. 그가 보통학교를 마치고 사립 중앙고보에서 영어를 공부한 일은 있으나, 영어라고는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에서 6개월 공부한 것이 고작인데, 영시를 썼으니 그를 천재 시인이라고 칭한 것은 과찬(過讚)이 아니었다. 본래 이 영어 학교는 3년 과정이었으나 6개월 만에 마친 것은 그의 어학적 소질이 비범(非凡)했음을 보여준다.
그 후 그는 모교인 중앙고보에 영어교사로 채용되었고, 후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되기도 했다. 그의 형 변영태 외무장관도 영어실력으로 명성을 떨쳤고, 그만큼 영어를 잘했던 외무 관료가 없었다고 했을 만큼 영어에 뛰어났으니 형제의 영어능력은 실로 대단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두 형제가 독립선언서를 최초로 영역했다. 그 영역본(英譯本) 독립선언서가 이 나라가 처한 고난의 현실을 만방(萬邦)에 알리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이 때 시인 변영로는 21세에 불과했다. 우리가 모두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육당 (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초안(草案)한 ‘기미독립선언문’은 용어가 난해(難解)하여 경험이 많은 대학교 영문과 교수도 영역(英譯)을 쉽게 시도하기 어려운 과제인데 약관(弱冠)에 불과한 시인 변영로가 실형(實兄) 변영태 선생의 도움을 받아 완역(完譯)을 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변영로 시인은 삼일운동 이후 <폐허>와 <장미촌>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활동한 것을 보면 독립운동의 좌절(挫折)에서 오는 그 시대의 고뇌(苦惱)를 가슴에 안고 살았음을 짐작(斟酌)할 수가 있다.
▣논개(論介), 그녀는 누구인가?
'논개'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전해지고 있다. 논개가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는데 출생한 생년, 월, 일, 시가 ‘술년(戌年),’ ‘술월(戌月),’ ‘술일(戌日),’ ‘술시(戌時)’로 모두 ‘술(戌)’이어서 ‘12간지(干支)’ 중에 ‘개’를 뜻하므로 “놓은(‘낳은’의 방언) 개‘를 두 글자로 줄여서 “논개”가 되었다고 한다. .
1593년 6월 19일, 왜군들이 승전(勝戰)을 자축(自祝)하는 술판을 벌일 때, 문득 촉석루 난간(欄干) 아래 바위 위에 ‘가녀린’ 논개의 자태(姿態)가 드러났고, 그를 범(犯)하러 달려온 왜장(倭將)을 반겨 안는가 싶더니 순간 그를 껴안은 논개는 깊고 푸른 남강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그 후 논개의 시체는 10여일 후 남강 하류에서 발견 되었는데 논개는 그 때까지도 왜장을 부둥켜안고 있었고 그녀의 열 손가락에는 의도적으로 반지를 끼고 있었으므로 죽어서도 손가락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논개는 선조 7년(1574)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인 주달문과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가 동네 늙은이에게 민며느리로 팔자, 어머니가 논개를 데리고 도망쳤다가 잡혔으나 당시 장수 부사(副使) 최경희가 모녀를 무죄 판결로 풀어주고 자신의 식솔(食率)처럼 거두면서 논개와의 인연(因緣)이 시작된다.
얼마 뒤 논개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고아가 된 그는 최경희의 부임지(赴任地)마다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다가 18세쯤에 그의 소실(小室)이 된다.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1593년 진주성싸움에 참가하여 진주성 함락과 함께 전사하자, 논개는 사대부(士大夫)의 여인으로서 지아비와 조국을 위해 장렬(壯烈)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첫댓글 논개 변영로 시 감상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주
공부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