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끝은 차가웠다. 2월은 아직 봄이 아니었다. 낡은 목선에 기대어 녹동 항을 떠났다. 20여 분 남짓, 작은 섬 소록도에 다다랐다. 이름이 참 예쁘다. 작은 사슴 섬이란다. 배에서 파란 눈의 아가씨가 내렸다. 큰 키에 안경을 끼고, 머리띠를 매고 있었다. 모두 떠나려는 섬인데, 젊은 처녀가, 그것도 외국 간호사가 소록도 병원을 찾아왔다. 그 때가 1962년, 28살 꽃 다운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는 그렇게 혈혈단신 우리 곁으로 왔다.
소록도병원에는 한센 병 환자들로 넘쳐났다. 전국에서 온 5000여 명이 무작정 섬에 눌러 앉았다.(1965년 환자 수 4877명) 소록도는 치료공간이 아니었다. 그냥 섬 전체가 병원 이름이 붙은 보호시설이었다. 한센 인들은 ‘하늘도 버린 존재’였다. 서울에서, 대구에서 밥 먹여주고, 약 준다기에 걸어 걸어서 소록도로 몰려들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한하운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
마리안느는 매일 새벽 6시 병원으로 향했다. 사택에서 걸어서 20여분 걸렸다. 미명의 새벽 길을 재촉했다. 홀로 가는 길, 파도소리만이 동행했다. 물을 끓여 우유를 타기 시작했다. 밥을 먹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일일이 떠먹였다. 환자들은 입술과 손가락이 뭉개져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환자들을 부둥켜안았다. 마치 어린애 젖먹이 듯 우유를 떠먹였다. 그 시절 한국 의사와 간호사조차 접촉을 피했다. 환자들을 쳐다보며 “직접 찔러보고 아픈지 말해주세요”라고 했다. 마리안느는 맨손으로 환자 손을 부여잡았다.
“등 피부가 벗겨져 진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기름 같은 약을 등에 붓더군요. 그러더니 진물나는 등을 손으로 문질러 주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내내 오전, 오후 두차례씩 손으로 문지르며 치료를 해주셨습니다. 한달이 지났는데, 정말 감쪽같이 나았습니다.”(소록도 거주 한센인의 회고)
1966년 10월 반가운 동료가 소록도에 왔다. 한 살 아래 대학동창인 마가렛 피사렛(Margareta Pissarek).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1952년부터 55년까지 오스트리아 인스브룩 간호학교를 함께 다녔다. 마가렛도 마리안느와 마찬가지로 환자들을 정성으로 돌보았다. 어느 날이었을까. 환자 한 명이 절뚝거리며 병원을 찾았다. 상처가 심했다. 마리안느는 자기 무릎에 상처 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얼굴을 상처에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부패가 진행됐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소록도 거주 한센인의 회고)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봉사는 소록도를 새로운 땅으로 바꾸었다.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들도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환자들을 진료했다. 병원 직원들도 예전과 확 달랐다. 그날 이후 소록도 의료진은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들의 환부를 매만진다. 파란 눈 간호사들의 헌신은 말 없는 간호교본이 됐다.
이들은 환자 간호와 함께 소록도 영아들을 책임졌다. 병원 측은 한센 인에게 자녀가 출생하면 감염을 우려해 바로 격리 조치했다. 마리안느는 0세부터 3세 아이들을 맡았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엄마, 엄마라며 따랐다. 한센인 부모와 자녀들은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됐다. 면회 장소는 직원지대와 병사(病舍)지대 경계였다. 직원지대 보육소에 있던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 부모를 볼 수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만질 수도 껴안을 수도 없었다. 1m 정도 떨어져 서로 눈으로 쳐다 볼 뿐이었다. 탄식이 흐르는 장소, 수탄장-.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고국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도움을 받아 소록도에 다양한 시설을 기증했다. 영아원과 결핵병동에 이어 정신과 병동, 목욕탕을 지었다.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도 건넸다. 장애교정 수술을 주선하고, 60~70년대에는 물리치료를 도입했다. 이들은 또 환자들이 생일을 맞으면 손수 빵을 구워 축하했다. “당신의 탄생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생일축하곡도 불러주었다. 병이 나아 소록도 밖 정착촌으로 떠나는 이에게는 작지만 정착금도 쥐어주었다. 하나 둘 그들을 “수녀님”이라 불렀다. 다른 이들은 “할매 천사”라 했다.
서관사 제11호, 마리안느ㆍ마가렛의 집. 병원 정문에서 500m 떨어진 언덕배기 벽돌집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2005년 11월21일 이 집에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홀연히 소록도를 떠났다. 그러고 보니 28살이던 마리안느는 71세 할머니가 됐다. 43년 9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마가렛도 마찬가지였다. 70세에 39년 1개월을 한센인들과 함께했다. 마리안느는 2003년 대장암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다른 이를 돌보기가 힘에 부쳤다. 서서히 자신이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을 계속하지 못하면 떠나야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편지를 보는 당신에게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아서
하늘만큼 감사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외국인으로써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같이 지내면서 저희에 부족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을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큽니다.
그 큰 마음에 우리가 보답을 할 수 없어
하느님께서 우리 대신 감사해 주실 겁니다.
-마리안느ㆍ마가렛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그들이 40여 년 머물렀던 집에는 낡은 침대와 책상만이 남았다. 그 가구마저 누군가 쓰고 있다. 나무로 만든 작은 십자가만이 유일한 인테리어다. 거실의 낡은 소파에 앉는다. 마리안느ㆍ마가렛 ‘수녀’가 음악을 선사했던 테이프가 그대로 있다. 그들이 심은 사랑의 향기는 소록도를 넘어 먼 나라에까지 퍼지고 있다. 매년 4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늙고 병든 이들을 돌보려고 찾는다. 또 소록도병원 간호사 한 분은 그녀들처럼 헌신의 삶을 살기 위해 가난한 땅, 남미 볼리비아로 떠났다.
“마리안느ㆍ마가렛 두 수녀님은 월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40여 년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않은 자원봉사자이자 간호사였습니다. 다른 이를 도울 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두 분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를 정화시켜 줍니다.”(소록도 성당 김연준 신부)
그들은 ‘수녀’가 아니었다. 두분의 삶이 거룩하고 성스러워서 누군가 수녀라 부른 바람에 ‘수녀님’이 돼버렸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집 팻말에 사랑, 헌신, 자원봉사자의 성지라는 글이 도드라진다. 하느님의 딸 수녀였다면, 아니 수녀라도 쉽지 않았으리라. 수녀 아닌 수녀님의 43년9개월, 39년1개월의 소록도 사랑….
신은 모르겠다. 근데, 천사는 정말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