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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5년 9월 20일
장소: 정읍 일원( 예동마을-만석보터-백산봉기터-동학혁명기념탑-황토현전적지-동학혁명박물관-동학혁명기념관-장성황룡전적지
주최ㆍ후원: 한국학호남진흥원
주관: 남도역사연구원
참여인원: 36명
동학농민혁명-1894년부터 1년여간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으며,1892년에서 1893년 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이 참여하였는 바,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운동, 재야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을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일시적 투쟁에서 장기 지속적인 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빈발 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 이었다.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었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피 참조)
동학농민혁명 최초봉기지역(예동마을)에서 답사는 시작되고...
고부농민봉기 배경-고부는 인근 쌀의 집산지이자 4포구(줄포,염소,동진,사포)상업의 중심지로 비옥한 농지에 형성된 배들평야와 고부천·정읍천 주변의 드넓은 농토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당시 지배세력의 억압과 수탈이 극심하였다. 1892년 4월 한양의 실력자(조두순-조병갑의 백부)를 배경으로 곡창지대인 고부지역의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은 갖은 방법 [강제로 신축한 만석보 수세(700석 착복), 불효죄, 불화죄, 음행죄, 불선죄(不善罪), 황무지 징세, 부(조규순) 공덕비(1천냥 징수) ]등 으로 수탈에 몰두하였다. 또한 均田使(토지조사 및 부세 균등 부과 목적)로 부임한 김창석(金昌錫)과, 轉運使(세곡운반 주관) 조필영(趙弼永)의 탐학으로 농민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였고 이에 견디지 못한 고부 고을 백성들은 전봉준등의 지도하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움직임으로 봉기하였으니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이었다.
예동마을에 관한 사료 입니다..
“3월 26일 낸 태인현의 보고에서 "그날 유시 무렵 저들 무리들이 고부의 백산 예동에서 일시에 산을 내려와 본 읍의 용산면 화호 신덕정리로 옮겨 주둔하고 총을 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세력이 매우 커서 방어할 계책이 없다."고 합니다.” 『隨錄』-작자 미상
만석보혁파선정비(萬石洑革罷善政碑)-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 일부만 파괴된 만석보(萬石洑)를 1898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만석보를 상징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선정비문 중에서>
만석보유지비 (萬石洑遺址碑)-만석보는 조선후기 수전농법이 보편화되면서 농민들은 수확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물이 흐르는 곳에 물막이 둑인 보(洑)를 쌓고 이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갑오년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농민들이 쌓아 사용하고 있던 민보(民洑=예동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그 하류에 새로 보를 쌓고 과중한 수세를 징수하였다. 이에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 고부 군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고부관아 및 전라감영에 수세감면을 진정하였으나 강제로 쫓겨나고 말았다. 급기야 1894년 1월 9일 전봉준이 고부군수로 부임하자 1천 여명의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부셔버렸다. 이것이 동학 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이다. 만석보는 고부농민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이다.
정읍천과 동진강(태인천)이 합류한 지역에 만석보(萬石湺)가 있었다.
만석보쉼터 정상에서 바라본 정읍천과 동진강(태인천) 합류 지점(두물머리)
만석보위치를 파악하고 쉼터를 내려오는 회원님들!
동학혁명백산창의비(東學革命白山倡義碑)앞에서
부안 백산성은 고부기포 이후 20여 일 동안 전봉준의 지휘부가 모여 관군에 대비하고, 무장기포(3월20일) 이후(3월 26일~ 29일) 전라도 각 지역의 접주들이 모여 군사적 지휘체계를 확립한 ‘백산대회’가 있던 곳이다. ‘백산대회’에는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 명의로 행동강령인 ‘사대명의(四大名義)’와 ‘12개군율’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반봉건(양반·부호↔민중, 방백·수령↔소리) 반외세적 선언문으로, 봉기 주체 세력을 농민 중심으로 밝히고, 자신들의 봉기 의의를 솔직하게 표현하였으며, 창의명분을 혁명운동으로 구체화하였고, 전국화 및 조직화를 모색하였다.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 오시영을 총참모, 최경선을 영솔장, 송희옥, 정백현 등을 비서로 뽑았다. 농민군은 1만여 명이 모여 후일 사람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고 하였다 한다. 백산성은 해발 47m에 불과하나 주변에 큰 산이 없어 정상에서 배들평야와 만경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로 관군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세곡 4천여 석이 저장된 해창(海倉)이 있어 군량미 수급에도 유리한 지역이었다.
어강(?) 황행자 부원장의 열정적인 해설은 정자위에서의 쉬는 시간에도 계속된다...음~하면 뭐라해야 동지이죠?
백산봉기에 관한 사료의 내용은 이렇다.
“고부읍에서 유숙한 지 3일 후에 대군을 몰아 고부 백산에 진을 옮겨 치고 다시 군을 조성할때, 중망에 의하여 전봉준이 대장이 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이 되고, 김덕명 오시영이 총참모가 되고 최경선이 영솔장이 되고, 송희옥 정백현 등이 비서가 되었고, 대장기폭(大將旗幅)에는 보국안민 4자를 대서로 특서하였고 이에 재도의 격문을 지어 사방에 전하였다.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모두 34개 지역으로 전라도 각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지도급 접주만도 160여명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였다”. <오지영의 동학사>
맛있는 점심시간~~ 와!! 맛있겠다! 꿀~꺽^^
남도역사연구원 회원님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하여! 건~배를 제안하는 노성태 원장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斥倭洋)을 주장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정신을 기리고자 1963년에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과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황토현에 세워진다. 1894년 5월 10일(음 4월6일)에서 11일(음 4월 7일)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의 대승으로 끝나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이탑을 세울 당시에는 ‘동학난’이라 불리던 시절로 ‘농민’의 존재와 역할보다는 ‘동학’ 상징성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자신의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시켜려는 의도로 ‘동학농민혁명’과 ‘5·16군사쿠데타’를 동일한 성격의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탑비(塔碑)에 새겨야 할 보국안민(輔國安民)은 당시 냉전 시대의 군사정권에서 보국안민(保國安民)으로 새겨놓았다. 탑의 규모는 높이 7.5m, 탑신 6.3m, 기단 1.2m, 둘레 4.64m이며, 기단부에 ‘甲午東學革命紀念塔’이라 새겨져 있다. 또한 뒷면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라는 구전민요가 새겨져 있다.<안내문 참조>
구민사(救民祠)에서 동학농민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제위(諸位)에 대한 묵념!
구민사 사당에는 무명동학농민혁명군을 주향( 主享 )으로 모시는 사민평등(四民平等) 정신이 나타나 있다.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東學農民軍象, 작품명: 불멸-바람길)- 기존 동상은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중에 추진된 ‘황토현 전적 정화사업’일환으로 1987년 10월 건립됐다. 하지만 친일 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동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결국 이 동상은 2021년 9월 철거·분해돼 정읍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정읍시는 2021년 6월부터 2022년 2월까지 8개월 간 국민성금을 통해 총 비용 13억 8천만원 중 2억 2,570만원을 모아 새로운 기념시설물을 건립 추진하였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국민성금으로 건립되어 그 의미를 더하였다. ‘불멸, 바람길’(조각, 가로 27미터, 세로 17.2미터, 높이 5.8미터, 재료: 청동·화강암·마천석)은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의 행렬 이미지를 부조, 투조, 환조의 기법을 활용해 제작했다. 이 작품은 ‘사람 인(人)’자의 형태로 배치하여 동학농민군의 기치인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만민평등 정신을 표현하였다. 좌측은 1차봉기(반봉건=제폭구민(除暴救民) 행군상이고, 우측츤 2차봉기(반외세=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행군상이다.
철거된 이전 동상
사발통문(沙鉢通文)-1968년 송후섭 씨(서명자 송대화의子) 발견으로 알려진 사료(필사본?)이다. 전봉준 등 동학교인 중심의 20명이 혁명의 대외명분과 행동강령을 적확하게 표현하였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각오하고 송두호집에서 주동자가 누구인지 숨기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전주감영 함락후 서울 직향(直向)등 계획적 혁명운동(반봉건) 성격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작성이후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1893.11.30.) 받아 현실적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사발통문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2023년 5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국제적으로도' K-민주주의'의 위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승전탑(장성 황룡전적지)-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제거하기 위해 전봉준 등 수천명이 봉기하여 고부를 점령한 뒤 황토현전투를 거쳐 정읍, 함평을 점령하였다.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장성으로 진군해서 전주에 주둔하였던 홍계훈의 경군(京軍=중앙군)을 유인하여 그 예봉을 꺾고 전주 점령계획을 세웠는데, 그 최적의 장소로 장성 황룡을 택하였다.
1894년 4월 23일 황룡전적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삼봉산과 황룡장터 등에서 이학승(李學承)의 선봉대와 결전하였는데 장태라는 신무기를 굴려 총알을 막으면서 관군에 육박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선봉장 이학승은 죽고 대포 2문과 양총 100여 점을 탈취했다. 당시 이학승이 이끈 관군의 수는 300여 명, 동학농민군은 6, 7천명이었다.
관군이 패주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경군(중앙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관군보다 먼저 전주로 들어가 점령했고,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휴전을 성립시키고 각 고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하기로 합의하여 역사상 유례가 없는 농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장태-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중앙군과 싸움에서 큰 승리를 안겨준 장태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있다. 다음은 황현(黃炫)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실린 내용이다.
“적(農民軍, 황현은 동학농민군에 대해 비판적임)은 위에서 아래로 관군(官軍)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홀연히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름한 닭의 집과 비슷한 것이 수십 개였다. 밖으로 창과 칼이 삐죽하게 꼽은 것이 고슴도치 같았고, 아래에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관군은 총탄과 화살, 돌을 쏘았지만, 모두 대나무 통에 차단되어 버렸다. 적(농민군)은 대나무 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초토군(焦土軍=관군)의 진영은 멀리서 빤히 바라보면서 도와주지 못한 채, 그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도록 방임하였다.”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에 대한 노성태 원장과 황행자 부원장의 계속된 해설은 이어지고....
이학승은 1852년생으로 1874년 무과에 합격하여 도판경첨(都判經僉), 장위영 초관 겸 선전관(壯衛營 哨官 兼 宣傳官)을 지냈으며,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 당시 나이는 43세였다. 그의 시신은 장성의 향리였던 박전성(朴銓誠)과 김중길(金仲吉)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1894년 5월에 한양으로 운구되었다. 비문은 면암 최익현이 지었으며, 비석 앞면에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라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1994)을 맞이하여 황룡전적지에 웅장하게 세워진 ‘동학농민군승전탑’과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이학승순의비‘는 현재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평가를 알 수 있다.
장성황룡촌 전투에 관한 사료이다..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중략). 동일(23일) 포시(晡時, 오후 3∼5시) 경 싸움터에 나간 병사가 황급하게 와서 보고하기를 “우리 군사가 장성(長城)의 월평(月坪)에 도착하자 저들 동학농민군 또한 마침 황룡촌(黃龍村)에 이르러, 차츰 서로 접전하여 한 바탕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측에서 극로백(克虜伯, 크루프 소총)을 한 번 발사하자 저들 중 맞아 죽은 자가 약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동학농민군 10,000여 명은 악에 바쳐 들고 일어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여, 30여 리를 쫓아오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은 관계로 우리 군사는 지쳐 쓰러지면서 창황하게 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쫓겨 올 때에 대관 이학승이 분발하여 칼을 들고 뒤에서 홀로 싸우다가 병정 5명과 함께 저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하니, 참혹하고 놀라움이 막심합니다. 극로백 1좌와 회선포(回旋砲) 1좌 및 실탄 얼마는 잃고 말았으니 매우 분하고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 홍계훈>
선생님들!! 이번에도 멋지셨습니다^^

첫댓글 남도역사연구원에는 보석같은
분들이 많아 쭉 번창하리라
믿습니다.
김명수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